가파도 우영팟 일지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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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순신 삼촌의 우영팟(텃밭의 제주어)에서 오후 한때를 보냈다. 베프는 일복을 갖추어 입은 다음 나도 똑같이 차려주었다. 감물을 들인 갈옷에다 햇빛을 가리는 모자와 슬리퍼, 면장갑까지. 삼촌이 커다란 남방을 입은 나를 보고 놀린다. “거울 함 보라게. 꼭 엄마 옷 입은 아이 닮아(같아).” 내가 봐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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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물 들인 남방은 가슬가슬하고 슬그랑하다. ‘슬그랑하다’는 살갗에 달라붙지 않는 살짝 빳빳한 베옷의 감촉을 말한다. 바위나 돌이 많아 거친 제주에서 웬만한 옷은 금방 떨어지거나 헤져 남아나지 못한다. 그런데 감물을 들이면 풀을 먹인 것처럼 질겨져 돌에 걸려도 잘 찢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단점은 기계세탁이 되지 않는다는 것. 베프의 아들이 갈옷을 한 벌 입어보고 싶다고 했다. “아내에게 부탁하지 않곡 네 손으로 빨아 입을켜?” 그러자 그 얘기가 쏙 들어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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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프의 우영팟에서 자라는 채소 중 수시로 뜯어다 먹는 상추의 품종은 청치마상추다. 돌아서면 자라고, 돌아서면 쑥쑥 자라서 삼촌과 내가 먹는 걸로도 감당을 못해 이웃과 수시로 나눈다. 상추를 선두로 요즘 우영팟에선 호박, 오이, 참외, 가지가 싹을 틔우고 있다. 오늘은 여린 싹 주위로 비료를 살살 뿌린 다음 잡초를 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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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늦게 씨를 뿌린 가지의 싹이 막 올라오는 중이다. 위로, 위로 자라는 특성상 길쭉한 대를 세워주어야 한다. 가는 철근을 망치로 탕탕 두드리니 땅속으로 폭폭 들어간다. 이제 이 지지대를 버팀목 삼아 삼촌과 나의 입으로 들어갈 가지가 주렁주렁 열릴 것이다. 우영팟에서 일을 하는 내내 잔 돌이 올라와 골라주었다. 역시 돌의 섬답다. 매끈한 보라색 채소가 여름날의 우영팟에서 빛날 그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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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노동의 마무리는 상추 따기. 오늘 저녁은 청치마상추쌈+삼겹살, 그리고 한라산이다.

갈옷을 입은 베프. 강한 바람을 막으려 망사 지붕을 덮었다.
‘블루’의 식당에 베프의 상추로 차린 한 상. 한라산 같이 한 잔? 오리지널? 순한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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