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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쿠폰과 ‘탐나는전’

by 배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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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 가파도터미널은 출생년도 끝자리가 1과 6인 주민들이 모였다. 민생회복 소비쿠폰을 준다니 받으러 간다. 인터넷 신청이 쉽지 않은 연령들이라 직접 나선 참이리라. 나는 6이고, 베프는 1이라 같이 길을 나섰다. 마침 대정오일장이 겹쳐 터미널이 꽉 찼다. 다른 때 같으면 배표를 끊자마자 다들 항구로 나서지만 에어컨 바람이 좋으니 시간을 채울 모양인지 아무도 나서질 않는다. 쿠폰을 받으면 어디에 쓸지 각자 의견을 내놓느라 실내는 와글바글, 입가엔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모슬포 나가는 날 삼촌들의 차림은 깔끔해지고 색깔은 알록달록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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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만에 햇살이 과랑과랑해 손차양으로 해를 가리며 배에 올랐다. 승조원들도 까만 얼굴가리개에다 선글라스로 무장했다. 앞쪽 칸에 베프와 나란히 앉았다. 대정읍사무소에 도착해 ‘탐나는전’ 카드를 받았다. 온오프라인과 다양한 방법으로 발급해 그런지 읍사무소는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탐나는전’은 제주지역화폐다. ‘탐나다’의 활용형인 ‘탐나는’과 ‘전’(錢)의 합성어이며, 앞의 ‘탐나’가 제주도의 옛 명칭인 ‘탐라’의 발음과 같기 때문에 중의적 의미를 띤다. 카드 속 돌하르방이 말을 건다. ‘요거 많진 않으난 제주에서 요긴하게 잘 씁서.’ 네네. 외식을 하고, 카페에 들르고, 머리를 자르고, 사우나에 가서 요망지게(똑똑하게) 잘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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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일장으로, 베프는 ‘아름다움의 시작 인순이미용실’로 퍼머를 하러 갔다. 한여름인데도 장은 살아서 돌아간다. 생선보다는 채소·과일가게가 문전성시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채소나 과일은 마트보다 훨씬 싱싱하고 싸다. 하우스 감귤을 까놓고 손님을 부른다. 보기만 해도 신맛이 떠올라 침이 꼴딱 넘어간다. 살 것도 별반 없으면서 올 때마다 호기심이 일고 가벼운 설렘이 핀다. 이른 시각임에도 식당엔 손님들이 시원한 메뉴를 앞에 두고 먹새를 자랑 중이다. 상인들은 아이스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타서 마셔가며 더위를 식힌다. 베프는 점심을 먹지 않는지라 혼자 끼니를 해결한 다음 홍마트로 가서 생필품을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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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2시 배를 타러 운진항으로 가니 베프가 먼저 와 있다. 매표소 여직원이 창구에 서자마자 표를 내민다. “내 이름 외웠어요?” 놀라서 물으니 생긋 웃는다. 베프와 나는 출발 직전까지 에어컨이 시원한 대합실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4, 5월이 지나면 가파도나 마라도를 찾는 방문객 숫자는 뚝 떨어진다. 익숙한 얼굴들만 배 시간을 기다리고 있다. 채소로, 생필품으로 나의 배낭은 묵직하고, 오랜만에 퍼머를 한 베프의 얼굴은 오전과 사뭇 다르다. “삼촌, 파마 예쁘게 했네요”라고 추어주니 “기?”(그래?) 하며 주름진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는다. 쪼글쪼글 주름이 짙어지긴 했어도 미소는 언제나 보기 좋다.

‘탐나는전’엔 노오란 감귤과 입 꼬리가 귀에 걸린 돌하르방이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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