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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글 <가파도 레지던스>에서 새를 그리는 화가 이우만에 대해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오늘은 그가 관찰한, 혹은 내게 들려준 말을 떠올리며 가파도의 ‘새’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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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스에 처음 들렀을 때, 그는 붓을 잠시 내려놓고 나를 맞아주었다. 책상 위에 놓인 책 중 <<새들의 밥상>> <<청딱따구리의 선물>>이라는 표지 끝에 ‘보리’라는 글자가 눈에 띄었다. 파주 출판단지에 있는 그 출판사?
“아니, 보리출판사에서 책을 낸 거예요?”
“네.”
“그럼 파주에 자주 들렀을 텐데. 저도 거기서 오래 근무했으니 어디선가 우린 스쳤을 수도 있겠네요?”
머리는 희끗희끗한데 소년 같은 미소를 띠며 그가 대답했다.
“아마도….”
출판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진 공간에서 마주쳤을지도 모르는 사람을 남녘의 이 조그만 섬에서 만나다니. 나는 인연의 우연함에 놀라 아주 잠깐 말을 잃었다.
3
화가는 가파도에 두어 달 머물며 130여 종의 새를 만나 영상물 둘을 스튜디오에 남겼다. 하나는 새의 종류를 식별하는 데 주안점을 둔 것, 또 다른 하나는 새의 지저귐에 주안점을 둔 것이었다. 그밖에 담담히 적어나간 일기와도 같은 단상, 오랫동안 공들여 그렸을 새에 대한 세밀화, 물을 부으면 금방이라도 다양한 색채가 우러나올 것 같은 물감, 자세를 바꾸어 가며 앉았을 법한 의자 등이 주인의 체취를 머금고 남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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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텃새와 철새로 크게 나뉜다. 건너 섬 마라도에는 가파도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철새를 만날 수 있는데, 긴 여정에 걸쳐 태평양을 건너온 탓에 지친 날개를 접고 처음 쉬어가는 곳이라 그러하다. 숲이 좀 더 울창하다는 점도 숫자에 영향을 끼쳤다. 울창하다? 둘을 비교해서 그렇다는 거지. 가파도는 그만은 못하지만 숱한 텃새와 철새의 지저귐이 울려 퍼지기에 파도소리, 바람소리만 들려와 자칫 단조로울 법한 섬을 명랑한 분위기로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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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도에서 만날 수 있는 새를 불러보자. 가마우지·뻐꾸기·매·해오라기·제비 등 익히 알고 있는 이름을 가진 새, 동박새·종다리·물총새·휘파람새·꼬까도요 등 앙증맞은 이름을 가진 새, 시베리아알락할미새·검은이마직박구리·쇠솔딱새·개미잡이·흰배지빠귀 등 처음 듣는 이름을 가진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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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스튜디오에 들러 그가 남기고 간 영상을 돌려보고 새 이름들을 입술에 올리며 가벼운 설렘을 느꼈다. 이제 가파초등학교 둘레와 전망대 오름길, 치안센터 근처의 숲을 지날 때면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눈을 한껏 치떠서 그들의 존재를 식별하고자 애쓴다. ‘새’라는 또 다른 생명체를 만난 가파도, 기록해 두어야 할 나날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