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 직장생활
캐나다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가장 놀랐던 건 Sick day. 바로 병가다.
한국에도 병가라는 제도가 존재하긴 하지만 사실상 그 병가를 사용해 본 적은 없다. 당시 다녔던 회사는 무제한 연차를 제공하는 회사였어서 정말 몸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연차 사용을 했었다. 그런데 그것도 정말 안될 것 같을 때만 눈치를 보면서 사용했었다. 몸살기운이 있는 정도에선 그냥 일할 뿐. 이후 이직한 회사에서는 아팠지만 일이 너무 많아서 참고 일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캐나다에 오고 직장 생활을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매년 제공되는 10일의 Sick day 덕에 조금은 마음 편히 쉴 수 있다. 어느 날 회사에 출근을 했는데 옆 동료가 매니저에게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동료: 나 오늘 몸이 좀 안 좋아. 일단 일을 하다가 안 되겠으면 말할게.
매니저: 놉 아니야. 네가 몸이 안 좋을 때 일하는 걸 우린 바라지 않아. 오늘은 집에서 쉬어. 그리고 몸이 안 좋으면 출근하지 말고 그냥 연락해 못 나오겠다고.
저렇게 단호하게 집에 가서 쉬라고 말하는 모습에 조금 놀랐다. 일반화할 의도는 절대 없지만 한국에서 일했을 땐, 아프다고 맘 편히 쉬는 게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한국에서는 '병가'라는 것을 사용해 본 적이 없는데 여기서는 아플 땐 병가를 당연하게 사용한다. 아프면 회사에 나가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비서로 일하고 있지만 HR업무를 함께 담당하고 있는데, 몸이 아픈 동료들은 아침에 상사에게 연락을 한 후 HR이메일로 메일을 하나 보낸다. 회사 못 나온다고. 그러면 그날은 푹 쉬어도 되는 거다. 물론 남용하거나 오용하면 안 되지만, 아플 때 편히 쉴 수 있다는 게 정말 큰 복지로 느껴진다. 특히 캐나다의 첫겨울을 지내고 있는 나의 경우, 아직 적응이 안 되서인지 올해만 해도 감기를 두 번 겪었다. 아침에 조금 고민을 하다 매니저에게 '몸이 좀 안 좋아서 출근하지 못할 것 같다. 쉬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하니, 정말 쿨하게 '그래 푹 쉬고!'라고 하더라. 덕분에 이틀을 말 그대로 푹 쉬고 출근해서 다시 충전된 기운으로 열심히 일할 수 있었다. 이게 별 거 아니지만 전체적인 삶의 밸런스를 맞추는 데 큰 도움이 되더라. 우선 아프지 않아도, 아플 때 쉬어갈 수 있다는 생각 자체만으로도 스트레스가 덜하다. 그리고 회사보다 내가 우선이라는 마인드가 점점 장착된다. 회사가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결국 내가 있어야 일이 있다는 당연하면서도 중요한 가치관이 마음속 깊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이 더 강해졌을 때는, 작년 말 회사의 HR 정책을 새롭게 만들었을 시기였다. 매니저(사장님)께서 초안을 보시더니 'Mental Health Day'를 추가하자고 하셨다. 앨버타주 법에서는 Mental Health Day라는 건 찾아볼 수 없었기에 '그건 어떤 휴일이야? 법적으로 보호받는 병가 같은 거야?'라고 물었다. 그렇게 들은 답변은, 아래와 같았다.
매니저(사장님):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번에 새로 만들어보려고. 몸이 아픈 게 아니어도, 정신적으로 힘들 때가 있잖아. 일이 너무 힘들거나, 개인적인 일로 힘들거나, 번아웃이 왔을 때 분기 별로 한 번씩 쓸 수 있게 하고 싶어. 사용 방법은 아침에 8시 이전까지 매니저한테 연락해서 Mental Health Day 쓰겠다고 말하기! 그날은 하루 종일 집에서 영화를 봐도 되고 스파를 받으러 가도 되는 거지. 회사에서 복지를 위해 제공하는 추가적인 휴일이야.
충격적이었다. 솔직히 정말 충격적이었다. 한국에서 약 2년 간 다닌 회사에서도 무제한 연차가 복지로 있었기에 아플 때 연차를 이용해서 쉬기도 했지만, 회사에서 직원들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다니. 이럴 수 있나?
새롭게 도입된 Mental Health Day를 2025년 1분기 기준, 4명의 동료가 사용했다. 사유는 당연히 묻지 않았지만, 친한 동료들이어서 자연스럽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서비스 론칭 후 조금 쉬고 싶어서 사용한 동료, 키우던 반려동물이 무지개다리를 건너 마음의 치유를 위해 사용한 동료 등 사유는 다양했다. 실제로 해당 휴일을 사용한 직원은 13%를 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냥 그렇게 사용할 수 있다는 휴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하다. 내가 힘들면 쉴 수 있다는 것, 회사가 그걸 지지한다는 것 자체로 힘이 난다. 캐나다의 모든 회사가 병가(Sick day)를 자유롭게 사용한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 더 편히 사용하는 건 사실인 듯하다.
봄과 겨울을 몇 번이고 넘나드는 캘거리의 날씨 덕분에 올해만 3번의 봄을 맞이했고, 지금은 4번째 겨울을 보내고 있다. 덕분에 감기는 조금 더 자주 걸리지만 그래도 심적인 여유 덕에 마음은 조금 더 편하다. 정말 아프면 잠시 쉬어가도 되니까!
*앨버타주에서 Sick Day가 법적으로 의무 사항은 아니기에, 회사마다 세부사항이 다를 수 있다는 점 참고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