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냥 일기

말의 무게를 덜어낼 수 있을까?

그 간단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해 걸리는 무한의 시간

by 심미금




무슨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이끌어주던 세상에서 벗어나 자유라면 자유가 생긴 20살의 여름.

나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떠다녔다. 특별히 노를 저을 생각도 없었고, 시간이 흘러가는 데로 그냥 그렇게 내 몸을 맡긴 채 떠다녔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둥둥.


그렇게 흘러 다니다 문득 주위를 둘러봤을 때, 내가 일반적인 경로를 꽤 많이 벗어났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너무 낯선 환경과 적정한 거리를 둔 채 지나치는 사람들. 그 속에 홀로 떠 있는 나.


그렇게 20살 여름방학의 나는 기존의 세상과 멀어져 있었다.




20살 여름 하면 일반적으로 어떤 이미지를 떠올릴까. 설렘, 시끌벅적, 사건사고 이런 것들을 떠올리지 않을까.

내 20살 여름도 나름대로 즐거웠다. 하지만 일반적인 [이라 쓰고 미디어에서 주입하는 프레임] 생각과는 달랐다. 집에 콕 들어박혀 나 혼자만의 세상을 살았다.


누군가와 다퉜다거나, 충격적인 사건이 있었다던가, 인생을 돌아보게 되는 어떤 이벤트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냥 여름방학이 시작됐고, 그래서 혼자가 됐을 뿐이다.


20살의 나는 대학에서의 첫 학기가 꽤 만족스러웠다.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편도 한 시간 반이라는 긴 통학시간이 조금 버거웠지만 단 한 번도 지각하지 않았고, 교복을 입고 정해진 자리에서 공부하던 고등학교 때와 달리 시간표도 수업도 자유로운 환경이 매우 마음에 들었다. 성적보다는 적성에 맞춰 진학을 했던지라 새로운 수업내용이 즐거웠고, 잠시지만 학생회 활동도 참여하고, 수업시간마다, 공강 시간마다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며 학교 곳곳을 돌아다녔었다.


원래 여름방학 동안 아르바이트를 할 계획이었지만 마땅한 자리가 없어 금세 포기했고,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10대 시절을 함께 보낸 동네 친구들과 바다로 1박 2일 여행을 다녀왔다. 물놀이도 하고, 술도 마시며 딱 그 나이 또래처럼 엉망으로 놀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혼자가 되었다.



처음에는 문제를 인식하지 못했다.

딱히 음주가무를 즐기는 편도 아니었고, 대학 친구들은 다 너무 멀리 살았고 동네 친구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바빴다. 몇 번 나오라는 연락이 있었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나는 안락한 내 방에 앉아 온라인 세상과 책에 집중했다. 그렇게 여름이 지나 2학기가 되었고, 다시 나는 수업을 듣고 친구들과 떠들고 과제를 하고 아르바이트를 시작하며 평범한 일상을 보냈다.


하지만 1학기와 달리 묘한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친구 A "내가 그때 보여준 거 있잖아"

친구 B "너 그때 고민하던 동아리 들었어?"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나는 기억나지 않는 대화들이 자연스럽게 오고 갈 때가 있었다. 처음에는 내가 기억을 못 하나 보다 생각하고 넘겼고,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모르는 이야기들이 쌓이자 나는 덜컥 겁을 먹었다.


지금이라면 가볍게 '무슨 일인데?'라고 물어봤겠지만 대인관계에 유독 소심 해지는 나는 모르는 이야기에 끼기보단 입 다물고 듣기를 선택하는 편이 더 속편 했다. 하지만 속에서는 끝없이 '뭐지? 무슨 이야기지? 왜 나만 모르지?'라는 말들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친구들이 나를 따돌리는 게 아닌 건 분명했다. 분명 같이 생활하고 웃고 떠들고 했으니까.

그런데 왜 나 혼자 모르는 일이 생기고, 속이 시끄러울까? 이제 어린애도 아닌데 왜 나는 이런 거에 연연하지?


이 묘한 느낌은 쉽게 말로 꺼내기도 어려웠고, 해답을 찾기란 더더욱 어려웠다.


그렇게 영원히 풀리지 않을 거 같던 고민의 물꼬는 의외의 곳에서 터졌다.

당시 나는 주말마다 호프집에서 밤 8시부터 새벽 2시까지 아르바이트를 했다. 자정을 조금 넘기는 시간이 되면 주방 이모가 간단한 간식을 만들어줬고 손님이 없을 때는 다 같이 모여 간단한 식사를 하며 떠들곤 했다.


"말 진짜 많은데 의외로 핸드폰은 잘 안 보는구나? 평일 알바는 계속 핸드폰을 붙잡고 있던데"


사장님은 또래와 달리 핸드폰만 붙잡고 있지 않는 나를 칭찬한 거지만, 나는 그 말에서 다른 포인트를 찾아냈다.

또래처럼 핸드폰을 붙잡고 있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친구들은 문자로 항상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니 핸드폰을 잡고 있는 시간이 많았던 것이다. 반면 나는 연락이 오지 않고, 누군가에게 연락을 하지도 않으니 들여다볼 필요를 못 느꼈던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 소통의 부재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수다쟁이인 내가 소통의 부재라니. 하지만 그때의 나는 핸드폰을 붙잡고 하는 소소한 대화에는 영 소질이 없었다. 학생 때는 작은 교실에 하루 종일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소통을 했지만, 각자의 생활 반경이 달라진 성인이 된 후에는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친구라는 존재가 사라진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그 대화를 모바일로 옮겨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소통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고 친구들이 문자로 일상을 공유하는 사이 나 홀로 덩그러니 남게 된 것이다. 특별히 싸운 것도 아니고, 어쩌다 만나면 즐겁게 하루를 보냈으니 친구들도 나도 이상할 점을 느낄 세 없이 이런 상황이 고착화된 거다.


하지만 한 번 인식하고 나니 누구를 만나도 어떤 생활을 하고 있어도 마음 한쪽이 불편했다.

원래 이런 일에 무심한 성향이라면 괜찮지만, 나는 그런 성향이 아니었다. 누구보다 수다와 소통을 좋아했고,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기는 동기화에 실패했을 뿐이다.


사소한 연락을 안 좋아한다고 느꼈지만, 막상 겪고 보니 소외되면서 오는 외로움은 더 크게 나를 덮쳤고, 바다에 빠졌을 때처럼 어쩔 줄 몰라 버둥거렸다. 왜 이런 깊은 심연의 바다에 빠졌는지 이해하지 못했고, 숨을 쉬기 위해 밧줄을 잡고 수면 위로 올라가야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그래서 똑같이 밥 먹고 학교에 가고 친구들과 떠들고 수업을 듣고 아르바이트를 하고 집에 와 홀로 외로워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몰랐다. 관계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단 사실을.

내가 귀찮다고 외면했던 시시콜콜한 대화는 서로에 대한 애정과 호기심을 기반으로 시작되는 것이었고, 교실에서 얼굴을 마주 보면 말을 걸듯, 다들 그렇게 핸드폰을 통한 세상에서 말을 걸고 있었던 것이다. 교복을 벗고 교실을 벗어나 생활이 달라진 친구들에게 핸드폰 속 대화는 얼굴을 마주 보던 대화의 자연스러운 연장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걸 나는 몰랐을 뿐.


필요하면 먼저 연락하면 되지 않냐 생각할 수 있지만. 이게 또 마음처럼 쉽지 않았다. 과제로 쓰는 글은 쉽게 써져도, '잘 지내?' '나 오늘 어디 갔는데 너 생각났다' 이런 편안한 한 문장은 좀처럼 써지지가 않았다. 얼굴 보면 자연스러운 이야기가 텍스트화 됐을 뿐인데 왜 이렇게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나는 문제를 인식하고도 꽤 오랜 시간을, 망설이며 보내야 했다.

이렇게 보내는 게 맞을까?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을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들을 등에 짊어지고서.

몇 번이고 시도하다 결국 포기하고 일상에서 만났을 때 대화에 치중했고, 혼자가 되면 또 우울해졌다.


아마 두렵고 무서웠기 때문이 아닐까. 뉘앙스를 알 수 없는 모바일 속 대화로는 내 의도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할까 두려움이 컸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만남을 추진하지도 못하면서 내가 스스로 나를 고립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짧은 문장들은 시간의 힘으로 쌓이며 더 크고 단단하고 무거워졌고, 그럴수록 나는 더 깊게 가라앉았다.

핸드폰만 손에 쥔 채,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며




'잘 지내? 우리 얼굴 못 본 지 오래됐다. 얼굴 한 번 봐야지'


지금은 생각나면 바로 문자를 한다. 어릴 때와 달리 카톡도 생겼으니 가벼운 마음으로 톡을 보내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데도 익숙해졌다. 인연이 닿은 누군가의 생일이면 가벼운 메시지와 함께 선물을 보내고 인터넷을 하다 TV를 보다 흥밋거리가 생기면 먼저 가져와 이야기를 한다.


처음부터 이렇게 된 것은 아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말 위에 쌓인 시간의 무게를 덜어내려면 지금이라도 부지런히 말을 보내며 조금씩 무게를 덜어내는 수밖에 없다고 깨달았을 뿐이다.


말의 무거움의 압박감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더 많이 하는 수밖에 없다. 남들은 긴 시간을 조금씩 쌓아왔다면, 나는 늦은 만큼 더 열심히 더 많이 쌓는 수밖에. 텍스트 넘어 상대방의 반응은 알 수가 없다. 얼굴을 마주 보고 있지 않으니 표정도, 뉘앙스도 알 수 없다. 그래서 더 두렵지만, 무섭고 아플 것 같은 일은 더 빨리 여러 번 부딪쳐야 익숙해진다. 처음에는 상대가 답을 하지 않거나 답이 늦으면 내가 보낸 말의 무게의 두 배만큼 충격이 더해졌지만, 개의치 않고. 하지만 나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선에서 조금씩 천천히 더 많이 말을 보내기 시작했다.


특별하지 않은 날 특별하지 않은 대화를 던지기 시작했고 특별한 계기가 없이 단절됐던 만큼, 특별한 계기 없이 대화는 다시 이어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말의 무게는 무겁다. 무겁고 버거워서, 더 쌓이면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더 많은 말을 보낸다.

그로 인해 내 삶이 달라진 것은 없고 외로움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를 짓누르던 텍스트의 무게는 아주 약간 덜어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지금도 그 무게를 덜기 위해 노력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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