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 사이의 쉼표가 사라지면 어쩌지
오랜만에 퇴근길에 사당역에서 버스를 탔다.
서울과 경기를 오가는 삶을 산지도 벌써 10여 년째. 원래 시간이 조금 더 걸리더라도 창 밖을 볼 수 있는 버스를 선호하는 편이었지만, 최근에는 여러 가지로 일로 정신없는지라 이동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지하철을 선택하는 일이 더 많았다. 그래서 사당에서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탄 건 꽤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당에서 탄 버스는 남태령을 지나, 과천을 가로지르고, 인덕을 찍고 우리 집 앞을 지나친다.
출근길에는 반대 루트를 거쳐 서울로 나가는데 아침에는 버스에 타자마자 머리를 대고 자는 것이 일상이라 나에게 버스 풍경은 집으로 돌아오는 밤 길이 훨씬 익숙하다. 그래서인지 내가 지나오는 루트에 따라 도시의 인식이 다소 한정적으로 박혀있기도 하다. 사당은 늘 사람이 많고 대낮처럼 밝고, 과천은 늘 평온하고, 인덕원은 유흥의 네온사인이 화려하게 빛나고. 분명 내가 아는 도시에 모습은 하나가 아닌데, 머릿속에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떠다닌다.
버스를 타면 볼륨을 한껏 높이고 창 밖 너머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을 바라본다. 어떨 땐 그냥 배경화면 같고, 어떨 땐 이렇게 스쳐가는 순간에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치열한 삶이 있겠지란 생각이 꽤나 무겁게 다가온다. 주변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지하철보다 버스를 선호하는 경우가 꽤 있는데, 변하지 않는 듯 변하는 도시의 풍경을 캐치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이 분명하다.
워낙 먼 거리를 다니는 편이라, 은근 다양한 대중교통을 이용하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내가 이 루트를 가장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과천과 인덕원을 잇는 도로 때문이다.
서울에서 출발한 버스는 과천을 가로지르는데, 내 기준 과천의 시작인 과천성당에서 과천의 끝인 과천시 정보도서관을 지나가게 된다. 특히 도서관을 지나고 나면 3거리가 나오고 바로 인덕원으로 이어지는 넓은 8차선 도로가 나오는데, 높은 건물과 아파트 숲을 지나 등장한 넓은 도로와 광활한 땅은 조금 전과는 다른 묘한 이질감을 준다. 도로 초입에는 작은 규모의 주택단지가 있기도 하지만 조금만 벗어나면 빈 땅이 대부분이었고, 2-3년 전까진 과수원이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인위적으로 땅을 평평하게 만들지 않아 언덕을 따라 높낮이가 있는 과수원에는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득 심어져 있었는데, 봄이 되면 하얗고 작은 배꽃들이 나무에 가득 매달리곤 했다.
밤에 그 길을 지나치면 조금 전까지 화려하던 도심을 뒤로하고 새까만 어둠과 하얀 꽃, 시기에 따라 부천님 오신 날의 연등만이 남았다. 8차선 도로를 반으로 나누는 가로수 나무와 전봇대에 빨간색, 파란색, 노란색, 초록색 알록달록한 연등들이 달리고 과천과 인덕원 사이의 어두운 도로 위를 수놓는 꽃이 되는 그때.
그리고 그 시즌이 내가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때였다.
조용한 어둠이 깔린 도로에 동그란 색색 천이 달렸다고, 어둠에 묻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작은 꽃들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웬만큼 피곤한 게 아니면 무조건 버스를 타게 만드는 마법 같은 시즌.
도시에 살다 보면 온전히 밤의 어둠을 느끼기 어렵다. 반짝이는 도시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고, 나는 문명의 빛을 사랑하는 도시형 인간이지만 그럼에도 도심 사이를 이어주는 쉼표 같은 어둠은 빛만큼 값진 존재였다.
보통 이 구간을 지나는데 노래 두 세곡 정도의 시간이 걸리는데,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까만 밤과 은은한 불빛을 즐기고 있노라면 마음이 편안해지곤 했다. 가끔 일부러 작동하지 않았는데, 도로 진입과 동시에 좋아하는 노래가 울려 퍼지면 혼자만 느끼는 소소한 행복을 만끽했다.
홈타운을 벗어나 서울로 학교를 다니기 시작하고, 취직을 하고, 사회초년생에서 어느 정도 연차를 쌓은 애매한 사회인이 된 나에게 10분 남짓의 이 짧은 도로가 주는 평온함은 꽤 큰 안식처가 되었다. 화룡점정은 어둠이 길지 않고 적당히 즐기다 보면 다시 강렬한 도시의 불빛이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는 이 길이 어디로 가는지 어디로 날 데려가는지
그곳은 어딘지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알 수 없지만
어디로 가든 길은 나오고,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어둠 뒤에는 빛이 이어진다.
역시 우리 오빠들의 노래는 진리다.
꽃과 연등이 동시에 맞아떨어지는 기간은 1년에 길어봐야 2주 남짓.
나는 매년 그 시기를 손꼽아 기다렸고, 연등이 철거되고 꽃이 지고 나면
'내년에도 볼 수 있겠지. 1년 더 버텨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던 것 같다.
언젠가 내가 운전을 하게 되고, 내 차를 갖게 된다면 이 구간을 지날 땐 스피커 소리를 펑펑 크게 틀어놓고 달려야지. 시간이 있는 날은 과천, 인덕원 구간만 몇 번을 반복해도 좋을 것 같단 생각도 했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이제 그 조용한 도로는 없다.
어느 날부터 도로 옆에 있던 과수원들이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하더니, 도로가 평평하게 다져지고, 도로 옆에 아파트 모델하우스 같은 작은 건물이 생겨났다.
그리고 인덕원에 가까운 곳부터 아파트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 위치에 이렇게 개발이 안 된 곳이 남아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운 일이긴 했다. 서울과 인접해 있어 매년 땅값이 오르고 있는 경기도 도심 사이에 과수원이 존재한다니. 좁디좁은 수도권 땅덩어리를 쪼개 아파트를 올리고 있는 실정에 이런 노다지를 둔다는 게 애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을 이해하는 것과 마음이 이해하는 건 다른 문제다.
오랜만에 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퇴근길, 자정이 가까운 시간 유난히 까맣고 잔잔했던 도로 옆에 서있는 회색빛 건물들은 매우 낯설었다. 늦은 시간임에도 공사 중임을 알리는 불빛들이 잔뜩 켜져 있었고, 아직 짓고 있는 건물에서 나오는 불빛이 이 정도라면 아파트가 완공되고 주변의 상권이 발달해 새로운 동심이 형성되면 더 이상 까만 쉼표는 없을 것이란 결론이 나왔다.
그렇게 되면, 도시와 도시를 잇는 도시의 도로 중 하나가 되겠지.
그리고 이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나는 금방 새로운 도시의 불빛에 적응할 것이다.
아마도 내 퇴근 시간은 짧아지겠지만, 아쉬움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제 또 어디서 쉼표를 찾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