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건강검진에서 아찔한 경험을 했다.
30대지만 생애 처음 해보는 건강 검진이었는데, 이 나이까지 제대로 된 검진을 못한 건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프리랜서 방송작가로 살기 시작했고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은 착실하게 냈어도(심지어 지역가입자라 더 비싸다) 내 건강검진을 해볼 생각은 한 번도 못해본 것이다.
직장가입자가 아니니 회사에서 지원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나라에서 짝수년 생 무료 검진 안내가 오긴 했어도 귀찮다는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해를 넘기기 반복.
필요하지만 긴박함은 느껴지지 않는 이 이벤트를 청산하리라 마음먹은 것은 백수기간 종료를 눈 앞에 둔 초여름의 일이었다.
이유는 딱히 없다.
그냥 생각이 났고
왠지 이번엔 하는 게 좋지 않을까란 마음이 들었고
그래서 바로 신청
10년간 미루고 미룬 숙제를 심플하게 정리해버렸다.
원래 모든 일이 그 일을 해야 하는 결정적인 타이밍이 오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고 믿는 편인데, 이번 결정 역시 이런 사고의 흐름에 따라 진행됐다.
참으로 심플하고 별 거 없는 일에 요란이다.
급한 성격 탓에 검진 내용을 꼼꼼히 읽어보지 않았고 위내시경 신청을 깜빡하는 바람에 검진을 이틀로 나눠서 진행해야 했다. 한 끼는 참아도 잠들기 전까지 입에 물을 달고 사는 나는 액체를 마실 수 없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무지한 과거의 내가 주는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다.
최대한 공복 시간을 줄여보기 위해 가장 빠른 시간에 검진을 요청했고, 예약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모든 순서를 빠르게 빠르게 클리어해나갔다. 얼른 이 공복을 벗어던지고 시원한 사이다에 컵라면을 먹고 싶다는 생각만 간절했다.
그런데 검진 도중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정말 예기치 못했고 그래서 더 놀라웠는데, 부모님의 지병인 고혈압을 유전자 속에 착실히 물려받아 혈압 감사에서 고혈압 전 단계가 나온 것도 아니었고, 위내시경 중 용종이 발견돼 조직검사를(검사한 결과 일반 염증으로 판명됐다) 한 것도 아니었다.
내 가슴을 덜컹이게 만든 것은 바로 시력검사였다.
검사 초기에 하는 그 시력검사.
병원에 도착해서 서류를 작성하고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시력 검사대 앞에 섰다. 그리고 한쪽 눈을 가렸는데... 맙소사
1.0 아래로는 뿌옇게 흐려 형체만 보일 뿐 막대기로 가리키는 것이 숫자인지 그림인지 글씨인지 알 턱이 없었다.
‘헐 안 보여요 그거 7 아니에요? 샌가????’
내 다급한 목소리에 간호사는 일필휘지로 내 시력을 채워 넣었고 그렇게 검진 후 받은 내 시력은 0.9/0.8
남들이 보기엔 '그게 뭐야'라고 할 수 있지만, 한평생 시력 하나만큼은 자부심을 갖던 나에게는 충격 그 자체였다.
오복 중에 그나마 하나 있는 게 시력인데 그거마저 떨어지기 시작하다니...
나의 생활패턴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생기기 시작했고 그 고민은 '생활패턴을 바꾸는 대신 시력보호안경을 사자'는 소비지향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추세다.
사실 나는 다른 복은 거의 전멸한 상황이다.
신체 오복 중 유일하게 시력 하나만 타고났고 학창 시절에는 기본 1.2 컨디션이 좋을 땐 1.5까지 넘보는 시력을 자랑했다.
학교 다닐 때 개근상 다음으로 유일하게 내가 상위권을 차지하는 항목인지라 나름 자부심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시력이 좋으면 좋은 점이 꽤 많은데, 맨 뒷자리에 앉아도 칠판 끝쪽의 글씨까지 빼곡하게 잘 보였고, 친구들과 운동장을 보다 저 멀리 들어오는 친구들의 짝사랑남을 누구보다 빨리 찾아내는 위력을 발휘했다.
시력이 좋으니 안경과 렌즈는 낄 일이 없었고, 오히려 밤에 너무 눈부신 것을 싫어해서 방 불을 몽땅 끄고 책상 위 작은 스탠드를 켜고 라디오를 들으며 숙제하는 것이 몸에 배어버렸다. 그리고 이 습관은 나날이 진화해 성인이 된 후에는 어둑어둑한 방에서 TV를 보거나 핸드폰, 컴퓨터를 하는 그야말로 시력을 박살 내는 짓만 골라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너 그러다 눈 나빠진다'
원래 가진 자는 소중함을 모른다고 했던가. 온 가족이 시력이 좋은 편이지만, 부모님은 내 경악스러운 생활 패턴을 늘 지적하셨고, 나는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착실하게 한 살 한 살 먹었다. 그리고 30년 넘게 쓴 내 눈도 남들만큼은 아니지만 조금씩 닳고 있긴 했나 보다.
이것마저 잃어버리면 진짜 오복 중에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되는데...
지금부터 잘 관리해주면 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지금 이 순간도 온 집안에 불을 끄고 노트북 불빛에 의지해 글을 쓰고 있는 걸 보면 나아질 것 같진 않다.
철없는 소리일 수 있지만,
어두운 밤에만 느낄 수 있는 평온은
시력의 소중한만큼 놓치지 어렵다.
창 밖으로 타닥타닥 비 내리는 소리가 들리고, 세상은 고요하다.
이 분위기에 어떻게 불을 켤 수 있을까.
불을 끄고 빛에 묻혀 있던 생활 속 소음을 감상할 시간이다
어둠은 묻혀있던 작은 소리를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불빛은 잡다한 생각을 잠시 내려놓고 눈 앞에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촬영 구성안이나 스튜디오 대본을 쓸 때 주로 밤에 쓰게 되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어둠이 내려앉고 노트북 불빛과 마주 보고 있으면, 세상에 나를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없어진 느낌이 든다.
워낙 외부 자극에 민감하고 작은 것에도 에너지를 쏟는 내 성격상 일의 능률을 올리는데 이만한 방법이 없다.
유난히 일과 사람에 시달린 날은 컴퓨터 불빛 조차 없이 인센스 하나를 켜 두고 어두운 방 안에 멍하니 앉아있기도 한다. 가족들은 무섭다고 말하지만 나름 진지하게 허공을 바라보며 멍 때리는 시간을 갖는 때다.
자주 하진 않지만 이 멍 때리기 의식을 갖는 시기는 보통 일이 너무 많고 바쁘고 나를 찾는 사람들이 많을 때다. 해야 할 일이 넘쳐나기 때문에 머릿속이 어지럽고, 스케줄 중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의 순서를 정리하는데만 100만 년이 걸린다. 내가 빼먹은 것은 없는지, 너무 성질을 내진 않았는지, 잠시 모든 것을 차단하고 나를 돌아보고 나름 참회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 방법을 낮에 쓸 도리가 없어서 항상 자기 전에 시도하는 편인데,
요즘처럼 비가 내리는 여름밤이 가장 최적의 시즌이다.
일이 잘 못 될까 봐, 내가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여유로운 마음을 억지로 주입시켜주는 시간이다. 실제로 모든 걸 다 커버하지도 못하고 쥐지도 못할 거면서, 마치 그런 일들이 가능한 양 집착하는 나 자신에게 진정하라고 너 없어도 세상은 돌아간다고 충고하는 타이밍이다.
타고난 성격이 급한 데다 빠른 피드백을 요구하는(카톡을 보내자마자 1이 사라지지 않으면 화내던 몇몇 분들) 방송계에서 혼나지 않고 책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이렇게 강제로 마음의 여유를 주입해주지 않고는 살 수가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홍대에서 인센스를 잔뜩 사 와서는 하루에 하나씩 피우며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는 타이밍을 갖기로 한 것이다.
방 불을 끄고 인센스를 켜고 그냥 멍하니 바라본다. 핸드폰도 뒤집어 두고, 짧게는 1분이라도 가만히 가만히 있어본다.
어둠이 시야를 가리면서 신경이 예민해지고 잊고 있던 감각들이 하나 둘 올라온다.
오늘처럼 비가 오면 타닥타닥 창문에 빗방울이 부딪치는 소리, 도로를 달리는 버스 바퀴가 밀어내는 작은 물웅덩이 소리, 인센스가 타면서 희미하게 올라오는 연기, 불꽃이라기 보단 불이 꺼지기 직전의 장작에서 보는 작은 불씨, 절로 나오는 깊은 한숨.
뭔가 달라지는 것은 아닌데, 뭐라도 달라지는 느낌이 든다.
이런 시간을 갖고 나면 다시 일을 하든, TV를 보든, 핸드폰을 하든 마음이 조금은 정돈된다. 쥐고 있는 것이 너무 많아 힘들다고 생각했는데 잠시 내려놓아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교훈도 얻는다.
물론 오래가진 않지만.
그리고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지도 않지만, 언젠간 좀 나아지겠지. 내일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하지만 눈이 슬슬 적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 이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다른 방식을 찾긴 해야 할 것 같다.
일단 오늘은 이 평화를 즐긴 다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