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기작 Dec 10. 2020

트리 옆에는 발리 향, 약간의 꽃무늬, 다수의 반짝이가

지금의 취향인가보오


퇴근 후 집에 오자마자 인센스를 켰다.

그리고 환기를 위해 방에 있는 문이란 문, 창문, 방문, 옷장, 서랍장 문까지 몽땅 열어재꼈다.

이 작은 방에 뭔 문은 그리 많은지 눈에 보이는 문은 다 열고 트리에 불을 켜고 절간 향과 차디찬 겨울바람의 콜라보를 마음껏 느끼며 이불 위에 드러누워있다.


작은 방으로 이주한 지 한 달째.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소소하게 많은 것들이 달라지고 있다.


일단 평생 침대 생활을 하던 내가 공간이 없단 이유로 20년 만에 바닥 생활을 하고 있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돈을 주고 인테리어 소품을 샀으며,

어떤 공간에 내 취향과 내 취향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때려 박으며 조화롭게 만들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말 그대로 때려 박는 중이라는 말이 잘 맞는 게, 내 공간을 가져본 적이 처음인지라 특정 공간을 공간을 꾸미는 데도 어색하고, 모든 물건을 내 마음대로 정하는 것도 처음이다 보니 어느 정도 선에서 조율해야 조화롭고 진짜 내 마음에 드는 공간이 연출될 수 있는지 그 중간을 알 수가 없다.


적당히라는 선을 모르니 일단 눈에 보이는 데로 치열하게 쇼핑하고

작은 공간에 이것저것 다 갖다 놓다 보니

내가 봐도 방이 버거울 만큼 과하게 힘을 주는 중이다.


커튼 하나도 몇 날 며칠 동안 심혈을 기울여 고민하다 보니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인데 그래도 좋은 점(?)이 있다면 귀가 극세사 수준으로 얇은 내가 내 마음대로 어떤 결정을 내리면서 내 취향의 바운더리를 조금씩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불과 얼마 전의 나는 방에 커튼을 다는게 사치라고 느끼고

(집 안보단 밖에서 보이는 나에 투자하는 게 이득이라 생각했다)

내 취향껏 물건을 고르다가도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팔랑팔랑 휘둘렸으며,

내 마음에 100% 드는 물건을 선택하지 못하고 타인의 취향과 절충이 가능한 선에 선택지를 고르곤 했다.


하지만 이곳은 온전히 나만의 공간이고 망해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이 없단 생각이 들자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다 보니 적어도 다른 사람의 눈치(예를 들어 꽃무늬 커튼은 촌스러운데? 같은 반응)를 보는 일이 조금 아주 조금 줄었고, 적어도 내 방에 둘 물건은 내 눈에 뭐가 더 예쁜지, 지금 있는 물건을 살리면서 어울리는 조합은 무엇일지 고민하는 쪽으로 초첨이 바뀌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나 혼자만의 치열한(?) 선택의 과정에서

현재 내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은 [환기]다.

정확히는 방에 베인 오래된 냄새를 없애는 것이다.



20년 전에는 그림을 그리던 아빠의 작업실

4년 전에는 쇼핑몰을 했던 동생의 옷무덤

그리고 그 외 대부분의 시간을 조명조차 켤 일 없던 기타 등등 잡동사니 모음



내 방의 과거 이력이다.


꽤 오랜 시간 방치된 창고방은 20년을 산 집임에도 불구하고 낯선 느낌이 존재했고, 이 방만 가지고 있는 어색함이 존재한다. 언제가 될지 몰라도 독립하기 전까진 내 방으로 정 붙이고 살아야 하는데 왜 내 취향으로 꾸며보려고 마음먹었음에도 어색함이 느껴지는지 한참을 고민했는데, 주말 내내 방에 붙어있다 보니 방 안을 맴도는 오래된 먼지 냄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놈들부터 없애고 뭔갈 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시각적인 면도 중요하지만 후각적인 면이 맞아 들어야 찐 내 공간이라는 느낌이 오지 않을까?


디퓨저 대신 인센스를 선택한 이유는,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인센스를 켜 두면 마음이 이상하게 안정되는 느낌이 드는데,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는 개미처럼 열심히 번 돈으로 흥청망청 놀던 동남아 여행지가 연상되기 때문인 것 같다. 놀고먹는 게 일이던 그때, 어딜 가나 익숙하게 맡을 수 있는 향을 맡으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편하게 살고 싶다는 소망이 조금이나마 충족되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디퓨저는 향이 너무 강하다는 인식도 영향을 준 것 같은데, 비염 피플임에도 불구하고 향에 대한 호불호가 매우 강한지라 디퓨저를 두면 이 작은 방이 온통 향에 먹혀버릴 것 같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그냥 향 냄새를 좋아했다.

더운 여름에 나무가 타는 냄새를 맡고 있으면 항상 요동치던 마음도 조금 단정 해지는 느낌이 드는 것 같다.


트리는 마음에 드는 무드등을 아직 찾지 못해서 시즌에 맞게 배치해본 것인데, 의외로 인센스와의 조합이 나쁘지 않아서 12월이 지나고 나면 이 조명들을 어떻게 활용할지 좀 더 고민해보게 될 것 같다.


빈티지가 취향인 것은 같지만 빈티지에서도 선호하는 결이 매우 달랐던 동생과 한 방을 쓸 때는 꿈도 꿀 수 없던 꽃무늬 커튼에 여행지에서 하나 둘 모아 온 워터볼에 한껏 요란하게 꾸미고 나니

'내 방이란 게 이런 느낌이구나. 이런 걸 두고 취향이라고 하나보다'하고 체감하는 요즘이다.


이 나이 먹고 내 공간이 생기고 나서야 새삼스레 내 「취향」 무엇이었는지 느끼고 있다.


정확히는 머릿속으로 알고 있는 사전적인 의미의 취향이 아니라 체감으로 느끼는 진짜 「내 취향」이라는 게 어떤 의미고 이런 공간이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이제 막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다.


물론 내가 어려서부터 당연하게 내 공간이 있었다면 너무 당연한 일이라 이 정도로 감사함(?)을 못 느꼈을 수도 있지만은.


이런 감정을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가도

지금이라도 알게 돼서 얼마나 다행이야 하는 복합적인 감정이 든다.



내 생각보다 나는 나무 타는 냄새를 좋아하고,

이벤트에 관심 없는 편이라고 착각했지만 직접 장식한 트리의 반짝임은 좋고,

와인은 좋지만 캐럴은 의외로 안 땡기는

동서양이 아주 미묘하게 섞인 나의 공간.



그래서 매일 밤 퇴근 후에 인센스를 켜고 트리에 불을 켜고 와인을 마시는 게 저녁 일상 루틴이 되었다.





인센스는 내 취향이고, 트리는 하고 보니 의외로 내 취향이고, 와인은 지금 알아가는 단계다.



이 이야기를 하자 친구가

'인센스도 향인데, 향 피우고 그 앞에서 술 마시면 귀신 부르는 행위 아냐?'라고 물어봐서 조금 찝찝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20년간 방치된 방을 방치해 두는 거나 인센스를 피우고 알전구를 켜고 병나발을 부는 거나 귀신 입장에선 별 반 차이가 없을 것 같아서 당분간은 이 생활을 계속할 것 같다.



그리고 지금 아직 낯선 내 방에 앉아

인센스를 켜고 트리에 불을 켜고 병나발을 불고 노트북으로 게임방송을 보며

이 평화로움을 마음껏 느끼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변화가 나쁘지 않은데,

과연 이 방의 취향은 어느 시절이었을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 컴퓨터 방으로 이사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