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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Jan 21. 2021

의외로 나는 아귀를 좋아한다

다수결에 편승하면 새로운 세계를 발견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취향이라는 것은 언제 생기는 것일까?

어떤 것은 좋고, 어떤 것은 싫은 그런 나만의 기준들

그리고 내 취향이 아니라고 믿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기준점은 언제일까?


내 취향이 확고한 편인지는 모르겠다. 사실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내 성향을 크게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마음속에 취향, 호불호는 확실하게 있는 편이지만 타인과 함께 있을 때 크게 드러내지 않는 편이다. 분위기를 망칠 만큼 강렬한 호불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원체 성격이 급해서 선택의 기로에서 갈팡질팡하는 걸 더 못 견딘다.


선택지 앞에서 주저주저하는 것보다는 빨리 뭔가 선택하고 부딪쳐봤는데 아니면 그때 고민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있을 때는 대세 의견에 편승하는 편이고, 서로 눈치 보며 의견을 모으지 못할 때는 빨리 의견을 제시하고 정리하려 드는 편이다. 때론 이런 성격이 손해 보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정을 보류하고 모호하게 두는 것이 나에겐 더 큰 스트레스다.


그래서 호불호가 매우 확실하고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그것이 대세 의견일지라도

'난 그게 싫은데? 난 이게 먹고 싶은데?'라고 의견을 표출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기하면서도 부럽고,

때론 너무 강한 호불호는 불편하게 느껴진다.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빨리빨리 정리하고 싶어 하는 나에게 자신의 의견, 감정, 취향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는 것은 매우 난이도 높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어떤 제안을 했을 때 '그건 싫은데 이거 하자'라고 내가 답할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no를 말해도 껄끄럽지 않고 불편하지 않은 극소수의 사람들. 보통 이들은 내 반응에 '그래? 난 그건 싫은데 이건 어때?'하고 다른 해답지를 내놓는다. 티키타카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내 의견을 표현하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불편하단 뜻은 아니다.

애초에 내가 표현을 어려워하는 성격이다 보니 상대방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임에도 의견을 주고받을 기회가 없어서 지나치는 경우가 더 많을 것이다. 아마 상대는 '웬만하면 다 오케이 하는 애'로 생각하고 있을 수 있는데 나쁘지 않다.


모든 관계가 똑같을 수 없듯이 서로를 배려하며 적당히 예의 차리는 관계는 많은 것을 가르쳐준다.

내 호불호를 강렬하게 표현하는 것보단 상대방의 취향을 더 고려하고 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였을 때, 때론 불편할 수 있고, 남들 눈치를 너무 보나 싶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의외로 새로운 취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막내 생일인데 아귀찜 먹으러 갈까?"


선배의 말에 나는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아귀찜이라는 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해산물을 잘 안 먹는 집안 분위기 탓에 그때까지 내가 경험해본 해산물의 가짓수는 매우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 보니 아귀찜은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고, 사실 아귀찜이란 단어를 들었을 때 그 요리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바로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무지했다. 그만큼 낯선 음식이었다는 것이다. 호불호도 바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그날은 생방송 전전날이었다. 그리고 내 생일 즈음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생방송 직전에는 하루가 모자랄 만큼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이제 막 촬영한 테이프들이 쌓여있고, 방송을 준비하느라 바쁜 시기. 원래대로라면 식사시간에 맞춰 대충 배달 가능한 음식을 시켜 각자 자리에서 먹으면서 일했겠지만, 막내 생일인데 그건 아니지 않냐며 한 선배가 의견을 낸 것이다. 멀리 갈 수는 없고, 이왕이면 맛있는 걸 먹자며 이것저것 찾아보더니 근처에 아귀찜 맛집이 있는 걸 누군가 기억해냈고, 항상 궁금해하면서 못 가봤던 곳인데 다들 괜찮으면 거기로 가자고 의견이 모였다.


여러 쌍의 눈이 내 선택을 기다리며 돌아보자 나는 더 안절부절못해졌다.


한참 어린 후배였던 나는 무언갈 선택하는 게 매우 어색했고 항상 어떤 선택지가 내려오면 그걸 수행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싫다고 말하면 받아들여졌겠지만, 내가 봐도 뾰족한 수가 없긴 했다.


점심도 저녁도 아닌 애매한 시간대인 데다 딱히 먹고 싶은 음식도 없었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보단 퇴근이 더 하고 싶었던 나는(물론 그게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란 것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어색하게 웃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아귀찜 집으로 끌려갔다.


'아니 그래서 이게 뭔데? 어떻게 먹는 음식인데?'


커다란 접시에 산더미처럼 쌓인 시뻘건 음식을 보자 내 머릿속은 더 혼란스러워졌다.


적당히 생선찜 같은 거겠거니 했던 내 예상과 달리 아귀찜은 훨씬 난이도가 높은 음식이었다. 콩나물과 살코기인지 뭔지 모를 정체모를 무언가가 가득 담긴 접시는 보기만 해도 매운 소스에 덮여있었다. 선배들은 각자 그릇에 간장과 고추냉이를 풀었고 가장 큰 덩어리를 내 접시에 담아주었다. 얼뜨기마냥 간장에 고추냉이를 푸는 행위까지 따라 하는 데 성공한 나는, 내 앞에 있는 고기 덩어리를 멍하니 바라봤다.


다들 맛있게 먹는데 도저히 어떻게 먹는 건지 감이 오지 않았다. 뭐든 잘 먹는 잡식성 동물의 표본인 나도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과감한 모습이랄까.


"안 먹어?"

"어 아니요 언니 먹어요 먹어요"


다들 나 때문에 외식하는 건데 분위기를 망칠 순 없지. 콩나물 위주로 먹으면 될 거야. 못 먹을 비주얼은 아닌데?

이 생각을 속으로 되뇌며 아귀찜을 먹었다.


그리고 눈이 동그래졌다. 해물찜이라는 것 자체를 제대로 먹어본 적이 없어서 막연히 내 취향이 아닐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아귀찜은 새로운 세계였다. 적당히 매우면서 고기, 생선과 다른 묘한 식감이 완전 취향저격이었던 것이다. 몽글몽글 따뜻하면서도 아삭한 콩나물과의 조합은 밸런스가 맞았고, 적당히 매운 소스는 계속 입맛을 당겼다. 고추냉이를 푼 간장에 찍어 먹으면 또 새로운 맛이 나서 그제야 나는 이 음식이 비싼 이유가 있구나 마니아층이 있는 이유가 있었어하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수결에 따른 덕분에, 잘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간 덕에 새로운 세계를 하나 더 알게 된 것이다.


그날의 식사는 매우 만족스러웠고 그 이후로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귀찜을 비롯한 해산물 찜을 찾게 되었다.

이전에는 제주도에 가면 흑돼지만 찾았는데, 한 번 해산물 찜에 눈을 뜨고 나니 가끔 그 맛이 당길 때가 있어서 일부러 해산물 집 가게를 찾아간다. 아귀찜이 종종 생각날 때도 있지만, 같이 먹는 상대가 동의해야 먹을 수 있어서 자주 못 먹는 게 슬플 뿐이다.

한평생 고기파, 밀가루 파라고만 생각했던 내가 잡식 파였구나 깨닫는 경험이었다.

친구들과 함께라면 절대 먹지 않았을 아귀찜은, 내 마음속 취향의 범위를 널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에도 방송작가로 일하면서 처음 보는 것, 새로운 것, 내 취향이 아닌 것이 다수의 의견이 될 때마다 크게 의견을 피력하지 않고 다수의 의견을 따라가 보고 있다. 실패할 때도 있지만 의외로 괜찮다던가, 안 좋게 생각했던 것이 지금은 나와 잘 맞는 색다른 경험들을 하고 있다.


원래 안 좋아하는 것을 한 번 더 시도해보고 여전히 싫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래 이건 확실히 나와 안 맞는구나'하고 불호 취향마저 확고하게 다질 수 있어 좋다. 그리고 이렇게 확고하게 다져진 불호 취향은 정말 나와 맞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에서 그 의견이 나올 때 '나는 그걸 안 좋아하는데 다른 건 어때?'라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웬만하면 대세에 따르는 인물이라고 인식되어 있어서인지 내가 이렇게 의견을 표현하면 다들 정말 싫은가 보다 하고 받아준다.

만약 이 정도의 의견도 묵살하고 멋대로 강행하는 관계라면 굳이 이어나갈 필요 없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려고 하는 내 모습은 여전히 스트레스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확실한 편인데, 그걸 표현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싫다.

하지만 때론 이런 성향이 새로운 길을 열어준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스트레스 지수가 낮아지는 기분이 든다.

나처럼 애매한 평화주의자한텐 다수결에 묻어가는 선택이 내 삶을 풍족하게 하는 전략인 건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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