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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Jan 26. 2021

충전기 위에 쌓아둔 책을 치웠다

너나 나나 할 만큼 했다 이제 안녕이야 #새 스피커는 어서오고


얼마 전 블루투스 스피커를 샀다.

이제 겨우 백수 한 달 차. 아직 다음 기약이 없는 FA 상태라 계획에 없던 소비는 자제할 생각이었지만, 사용하던 스피커가 한 달 전부터 말썽을 일으키더니 열흘 전부터는 하루 종일 충전해도 한두 시간이면 배터리가 방전되며 꺼지는 상황을 반복해서 어쩔 도리가 없었다.


원래 음향기기 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고, 기존에 쓰던 스피커도 동생이 몇 년 전에 사놓고 분가하면서 두고 간 제품을 주워서 쓰던 상황이었다. 컴퓨터를 쓰려면 이 스피커가 필요했고, 당장 제 성능을 하는 물건이 있으니 시간적 여유를 두고 합리적인 가격에 마음에 드는 제품을 사면 구매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 건지 스피커가 먼저 이별을 고했고 예상보다 빠르게 새로운 스피커를 사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원래 소비라면 두 손 들고 반기는 편이지만, 우선수위가 높지 않던 생필품을 급하게 사야 하는 상황이 오니 골치가 아프기 시작했다. 스피커가 필요하긴 한데 지금 당장 이거에 쓸 돈이면 다른 게 더 하고 싶달까...

하지만 백수가 되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아침부터 밤까지 스피커를 켜 두는 삶에 익숙해진 지 오래였다. 이대로 어느 날 스피커가 제 맘대로 운명을 다하기라도 하면 그 정적을 견딜 수 있을까?


정답은 노였다.

그럼 어떻게 사야지. 돈은 미래의 내가 벌 것이다.


처음에는 적당히 싼 제품을 살 생각이었다. 성능 좋은 비싼 제품을 사봤자 스피커한테 미안한 수준의 막귀여서 말이지. 하지만 보다 보니 점점 마음에 드는 디자인, 필요한 기능 등이 확고해지기 시작했다. 몰랐으면 몰라도 한 번 '이런 기능이 필요한데?' '이건 디자인이 좀...'란 생각이 들기 시작했고 당연한 쇼핑의 수순답게 아주 먼 세계까지 날아갔다가 급하게 정신을 차리고 내 수준에서 가능한 지상계에 발을 붙였다.


그렇게 이런저런 조합 끝에 겨우 선택한 스피커는 휴대성이 강조된 20여 만원대의 제품.

누군가에게는 합리적일 수도 있고, 생각보다 저렴할 수 있고, 비쌀 수도 있지만 스피커를 내 돈 주고 사겠다는 생각도 안 해본 백수 소시민에게는 꽤 무거운 가격이라 한참을 또 심사숙고하는 기간을 가져야 했다.


며칠의 고민 끝에 결국 내 방으로 들어온 새 아이템은 지금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해내고 있다. 역시 비싼 게 좋긴 좋구나 느끼며 흡족하게 새 스피커를 바라보다 이제 생명력을 다한 녀석을 버릴 때가 됐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우나 고우나 정이 꽤 들었는데 그냥 버리자니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딱히 기계에 감정이입을 하는 타입은 아니지만, 불을 끄고 옛날 스피커를 보고 있으니 묘한 마음이 들었다.

아마 지난 한 달여간 소생 시켜보겠다고 노력한 내 시간이 떠올라서겠지?



스피커에 문제가 생긴 것을 깨달은 건 한 달 전이었다.

케이블에 연결하는 충전 방식의 제품이라 평소처럼 연결해두고 외출을 했다. 그리고 평소처럼 집에 돌아와 스피커를 켜고 음악을 연결해 몇 곡 들었을 때... 배터리가 없다는 안내와 함께 스피커가 꺼졌다.


어제만 해도 멀쩡하던 스피커가 왜 이러나 싶어 황당한 마음이 잠깐 들었다. 그러다 곧 콘센트를 꺼놔서 충전이 안 된걸 수도 있겠다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콘센트에는 이상이 없었고, 함께 충전 케이블을 연결해둔 다른 전자기기는 문제없이 완충되어 있었다.


그럼 내가 제대로 연결을 안 해뒀나 보다. 생각하며 케이블을 다시 연결하니 충전을 의미하는 빨간 불빛이 반짝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꺼졌다. 마치 미세하게 남아있던 불씨가 공기와 닿으면서 호로록하고 꺼지듯이.


'아니 멀쩡하던 게 갑자기 왜 이러지?'


그제야 뭔가 이상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전까진 매일 쓰면서도 이 스피커에 대해 신경 써본 적이 없는데, 문제가 생기고 나니 그제야 관심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케이블을 어떻게 연결해야 하고, 충전이 되면 빨간 불빛이 들어오고 이런 것들.


케이블 선의 문제가 아닐까 싶어 다른 케이블로 교체해보고 원래 스피커 충전에 사용했던 케이블은 같은 충전 타입의 전자제품들을 연결해보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케이블에는 이상이 없고 스피커의 충전 부분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케이블이 연결되는 부분을 손으로 억지로 눌러 압력을 주면 빨간 불빛이 들어왔지만, 손을 떼고 몇 분 지나면 불빛이 사라졌다. 내가 모르는 새에 마법 능력이 생긴 건가?

다행히 첫날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손을 떼고 몇십 분을 넘겨도 충전 불빛이 사라지지 않는 방법을 찾아냈다.


'오래됐으니까 그럴만하지'


충전이 되자 다시 제 역할을 해내는 스피커를 보며 그날의 위기를 가볍게 넘겼다.

조금 수고스럽지만 오늘처럼 하면 앞으로 몇 달은 더 쓸 수 있겠지 하는 마음.

하지만 이 안일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주일 정도가 지나자 어떤 각도를 써도 충전이 안 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빨간 불빛이 들어오기 위해 필요한 압력은 더 강해졌고, 아무리 세게 눌러도 손을 떼면 빨간 불빛이 사라지는 것을 무한 반복해야 했다. 압력만 요구하면 귀여운 수준이지. 전자 기기 주제에 케이블을 꽂는 각도는 어찌나 세세하게 따지는지, 케이블을 꽉 물려서 꽂아도 보고 좀 설렁하게도 꽂아보고 대각선으로도 해보고 아래로 눌러보고 위로 올려보기도 하며 오만 쇼를 다 해야 했다.

매일 밤 책상 아래에서 아무도 보지 않는 혼자만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정신 못 차리는 전자기기에는 매가 약이라는 지론을 갖고 있어서 괜히 스피커를 툭툭 손으로 치며 협박 아닌 협박을 해보기도 했고 컴퓨터를 하는 내내 발끝으로 케이블 연결 단자 부분을 누르기도 했다.

그나마 막판까지 가장 효과적이었던 방법은 적당한 각도로 케이블을 연결한 뒤 책을 올리는 것이었는데, 책도 너무 크거나 작으면 안 돼서 온 집안에 있는 책을 다 꺼내서 다양한 충전 압력 실험을 진행해야 했다.


실험 끝에 선정된 영광의 책은 해리포터 시리즈

초등학생 때 사서 고이 모셔둔 해리포터를 차가운 방바닥에 두려니 미안했지만, 방법이 없었다.


생각보다 집요한 내 행동에 스피커도 꽤 질렸을 것 같다. 웬만하면 포기하고 방치해두고 새 거를 사거나, 안 듣거나 할 텐데 꾸역꾸역 스피커를 사용하겠다고 시도해보다가 스스로에게 현타가 와서 책상 아래에서 기어 나온 게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면 또 책상 밑으로 들어가서 스피커를 충전해보겠다고 케이블 앞에서 몇십 분을 씨름했다. 예전 같으면 몇 번 시도하다 안되네하고 방치했을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 예쁜 제품이 보이면 그걸 샀겠지, 하지만 이번에는 좀 더 노력을 해보자란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내 방이 처음 생기면서 생긴 패턴인데, 과거에는 눈에 보이는 것, 갖고 싶은 것에만 집중해서 무작정 지르거나 아예 포기하거나 둘 중 하나였다면, 지금은 해볼만큼 해보고 떠나보내도 되겠다는 마음이 들었을 때 새로운 걸 들이자는 마음 가짐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이런저런 노력을 해보면서 시간을 벌어야 내가 진짜 만족할만한 물건을 찾는 시간을 벌 수도 있고.


이러한 노력 덕분이지 알 스피커와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안 된다고 아예 안 쓴 것도 아니고 그 기간 동안 매일매일 영화도 보고 노래도 듣고 팟캐스트도 듣고 쓸 수 있는 한 최대한 뽕을 뺐다. 충전으로 애먹이긴 했지만, 몇 번이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에는 충전의 빨간 불빛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알 스피커는 어떤 수를 써도 더 이상 빨간 불빛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각도를 잘 맞추고 책도 겹겹이 쌓아봤지만 돌아오는 것은 '파워 오프'라고 외치며 장렬하게 꺼지는 일뿐.

이제 그만 이별을 고하는 스피커를 보고 이제는 새 물건을 들일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날 저녁 한 달여간 고르고 따진 스피커를 샀다.


이제 진짜 알 스피커와도 안녕이다.


집요하고 굳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때론 이렇게 집요하게 노력해보는 시기가 필요한 것 같다.

모 아니면 도로 극단적인 선택만 해온지라 사람이든 물건이든 어떻게든 좀 더 관계를 이어가려고 눈치를 보고 노력해본 적이 없는데, 노력할 만큼 해보고 나면 더 이상 빨간 불빛이 들어와도 덜 서운하다는 것을. 상대의 사인을 더 분명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내 마음도 조금 더 빨리 정리된다는 것을 이제야 연습을 통해 깨닫는 중이다.


내일은 직접 쓰레기장에 스피커를 가지고 가서 재활용 스티커를 붙여줘야겠다.

스피커 하나가 나에게 주는 교훈이 꽤 크다.

이제 보낼 건 보내주고 책은 원래 자리에 두고 새로운 스피커를 맞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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