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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Feb 07. 2021

과연 지금을 놓치면 제대로 된 물건을 사는 날이 올까?

철이 없었죠 이 나이까지 그 고민을 안 해보다니


한때 내가 쇼핑을 안 좋아한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다.

쇼핑을 즐기지 않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근원은 여가시간에 백화점에 간다거나, 쇼핑 사이트들을 구경하며 아이템을 보는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목적이 있거나 갑자기 꽂혀서 관련 아이템을 미친 듯이 찾아볼 때도 있지만, 대게 2-3일이면 흥미를 잃고 다른 재미를 찾아 떠났다.


당시 내 주변에는 쇼핑몰을 운영하는 동생, 유행템을 빠르게 캐치하는 친구, 대중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쇼핑 사이트를 뒤지며 자기 스타일의 아이템을 사는 지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쇼핑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옆에서 지켜보던 때였다.


그 지인들의 기준이 많이 높은 것일 수 있지만 순수하게 쇼핑을 취미로 즐기는 그들을 옆에서 보고 있으니 내가 쇼핑에 흥미가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돈 쓰는 행위는 참 좋다. 예쁜 아이템을 사는 것도 좋고.

하지만 결과물을 얻기까지 과정이 주는 피로도가 나에게는 너무 높았다.


무수히 많은 아이템 중에 옥석을 가려내는 것도 힘들었고, 주머니 속 한계는 분명한데 갖고 싶은 아이템만 느는 것도 부담이었다. 쇼핑 사이트들은 옷 하나를 구경하려고 해도 온갖 감성적인 사진들이 주르륵 뜨는 것이 버거웠다. 코디 샷 같은 실질적인 사진이 아니라 카페 풍경, 커피 사진, 본인 셀카를 넣어놓은 것을 보면 도대체 뭘 팔고 싶은 걸까 싶어 화면을 꺼버리기 일쑤였다.


가장 귀찮은 점은 비교를 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다이어리 하나만 사도 2021년 형인지, 만년 형인지, 커버가 가죽 소재인지, PVC 소재인지 하나하나 생각해보고 따져야 한다. 취향이 은근 확고한 편이라 잠시 둘러봐도 '이건 예쁘네' '저건 별로'하는 생각은 금방 드는데, 이런 비교 과정에서 어떤 아이템이 예쁜지, 실용적인지, 가격은 적당한지, 나한테 맞는 물건인지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하면 끝없는 비교의 굴레로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모르면 몰랐지 한 번 비교를 시작한 순간 만족할 때까지 멈추기 어려운데, 현실적으로 마음에 드는 물건은 비싸고 적당히 싼 물건은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들고, 적당히 괜찮은 걸 봐도 내가 잘 활용할 수 있는지 고민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다.


이렇게 비교에 취약한 내가 그간 취한 쇼핑 패턴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뉘었다.

[쇼핑하기 귀찮아서 대충 산 적당한 아이템], [덕통 사고처럼 한순간에 꽂혀서 산 아이템]


전자의 경우는 썩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필요해서 산 것이기 때문에 그럭저럭 잘 쓴다. 물론 물건에 대한 애정은 없지만 한 번 필요가 충족되면 적당히 참고 쓸 만했기 때문에 넝마가 될 때까지 쓰다 버린다.

간혹 가다 잃어버리거나 막상 사놓고 마음에 안 들어서 안 쓰고 구석에 처박아 둘 때도 많은데, 그런 물건들은 모두의 방구석 어딘가에 있다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서 영영 사라진다.


후자의 경우는 상황이 좀 더 안 좋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꽂혀서 샀기 때문에 결제를 하고 물건을 손에 넣은 순간은 기쁘지만 그다음에는 이 물건을 어떻게 써야 하나 난감해지고, 충동적이고 짜릿했던 구매일 수록 더 큰 자괴감이 찾아온다. 한때 미친 코덕으로 살았던지라 특히 화장품 중에 이런 형태로 구매한 물건이 많았다.

화장대에 무덤처럼 쌓인 립스틱을 뒤로하고 새 아이템을 산 다음에 왜 그랬을까 반성하지만 다음에도 비슷한 소비 패턴이 반복됐다.


한 아이템을 사서 끝까지 쓰고 버리고 새 아이템을 산다는 것은 내게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유튜브로 보니 색이 너무 예뻐서, 그냥 구경하다 예뻐서, 기분이 안 좋아서 샀던 수많은 아이템들은 초반에는 반짝반짝 빛났지만 금방 빛을 잃고 조금 쓰다 구석에 처박히고, 방구석 어딘가에 있는 블랙홀로 사라져 버렸다.


물론 모든 소비의 결말이 비극적이지만은 않았다. 한참 여행을 좋아할 때 사 왔던 인테리어 소품들은 '가져오긴 힘들었어도 그때 사길 잘했지'하며 매우 흐뭇하게 생각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다만 이런 아이템도 10개 중 2-3개 정도가 시야에 보인다면 나머지 7-8개는 둘 곳이 없어서 상자에 봉인한 채 몇 년을 방치한다는 게 문제였다. 그나마 블랙홀 신세는 면했지만, 제대로 활용도 못할 거라면 블랙홀에 빠진 수많은 물건들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다.


이 정도면 정말 평범하고 합리적이지 않고 감정적인 쇼핑 패턴을 가졌다는 증거가 될 것 같다.


그런 내가 지난해 작은 방으로 이주한 후 생각이 많아졌다.

'예쁘다 = 소비'로 연결되던 고리를 미미하게나마 고민하고 비교하고 시뮬레이션해보는 습관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아이템 하나를 살 때도 몇 주에 걸쳐 다양한 물건을 보며 내가 원하는 취향, 현실과 타협점, 다른 아이템과의 어울림 등을 생각하며 내 좁은 방에 들여도 될 물건인지 머릿속에 생각하게 됐다.


처음으로 계획적인 지출이란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렇게 재고 따지는 쇼핑 패턴의 시작은 책상을 살 때였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필수품이 다르지만 나에게는 책상이 방을 구성하는 필수 아이템이다. 직업 특성상 컴퓨터와 노트북을 쓰는 일이 많았고, 집에 있을 때도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다. 지금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책상에 앉아있으니 말이다.


집안에서 내가 가장 오래 생활하는 공간의 위치를 옮기게 됐을 때, 방 안의 구조를 바꿀 때도 가장 먼저 했던 생각도 책상을 어떻게 할지였다.

사실 얼마 전까진 책상 앞에 앉아있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멀쩡한 책상을 두고 바닥에 상을 펼쳐두고 그 앞에 앉아서 일하거나 주방 식탁을 전전하곤 했다. 그 이유는 20여 년 전 초등학생 때 산 책상이 집 안의 유일한 책상이었기 때문이다.


책장과 책상, 서랍 조합으로 된 책상은 어느 집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디자인에 민트색이었다.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부모님이 들인 것으로 20여 년이 넘은 지금도 튼튼한 걸 보면 좋은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인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물건이어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정이 안 가는 법.

미안하게도 세월의 흔적이 묻은 그 책상이 나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번째로, 방 사이즈에 비해 지나치게 컸다.

작은 방은 커봐야 2평 남짓? 붙박이장까지 있어서 책상과 침대를 함께 둘 수 없을 정도로 작았다.

그런데 기존에 있던 책상은 이런 방 사이즈를 고려하지 않고 샀던지라 그 존재만으로도 방 전체를 압도하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책상의 방에 내가 얹어사는 느낌이 들 정도였달까. 원룸에 그랜드 피아노를 둘 수는 없듯이 공간에 맞는 사이즈가 분명히 존재하는데 그 영역을 확실히 침범한 책상이었다.


두 번째로, 올드한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옅은 갈색 나무에 민트색 도색을 해놓은 그 책상은 산뜻한 느낌이었지만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나는 빈티지를 좋아했고 톤 다운된 색상의 가구가 주는 안정감을 선호했다. 가뜩이나 좁은 방에 사용하지도 않을 책장이 세트로 구성된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세 번째로, 내 스타일로 방을 꾸미는 일에 제약을 만들었다.

애초에 내 취향과 필요에 의해 산 물건이 아니니 방을 꾸미려고 다양한 인테리어 소품을 보다가도 책상의 존재만 인식하면 숨이 턱 막혔다. 어떤 아이템을 가져다 놔도 원하는 분위기의 1/3도 나오지 않을 것임은 누가 봐도 자명했기 때문이다.


'이걸 어쩌지? 귀찮은데 그냥 쓸까?'


책상이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은 작은 방으로 이주한 초기, 나는 눈 앞에 책상을 보며 한참을 고민했다.

가구도 적고 사람도 한 명뿐인데 빈틈없이 꽉 찬 느낌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고 이 공간을 내 마음대로 꾸미고 싶다는 생각에 태클을 거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책상처럼 큰 물건을 들이는 게 보통 일이던가. 책상 같은 가구를 사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 막막했고, 멀쩡한 물건이 있는데 새로운 물건을 들인다는 것도 영 찜찜했다. 그리고 확고하게 반드시 갖고 싶은 어떤 물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계속 보다 보니 눈도 적응하는 것 같고, 그냥 깨끗하게 정리하고 활용방안을 고민해서 물건들을 진열하고 그대로 살까? 몇 년 안에 독립할 건데 그때 제대로 된 걸 사는 것이 합리적이란 생각도 들었다.


'과연 나중에 내가 제대로 된 물건을 살까?'


사고의 흐름을 바꾸게 한 것은 이 질문이 들었을 때다.


내가 소비를 미룬 다음에 [제대로 알아보고 고민해서 마음에 드는 물건을 구매]하는 행위를 한 적이 있던가? 과연 이번이 지나가면 다음은 언제 올까?


분명 몇 번이고 이런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매번 귀찮다는 이유로 눈 앞에 상황을 외면했고, '적당히''무난한 것'을 사서 쓰거나 '그냥 있는 걸 쓰자'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다독였다. 지금 이 충동도 조금 지나며 사그라들 것이고 그럼 또 적당히 적응한 채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불만족스러운 소비패턴을 이어왔다.

그렇게 아꼈던 돈은 어디에 썼지? 대부분 작고 반짝이는 아이템, 화장품 등 부피가 작으면서 반짝이며 내 눈을 현혹하는 부담 없는 사치품을 사는데 썼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 필요 없는 걸 살바에 필요한 걸 살걸'하고 후회하고... 종종 이뤄지는 충동적인 소비패턴의 시작의 뿌리가 바로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정말 내가 이 소비패턴에 만족했다면 이런 고민도 안 했을 테니 말이다.


돈은 돈대로 쓰고 불만족스러울 거라면 이번에는 이런 소비 패턴을 바꿔보자고 다짐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감이 안 왔지만, 일단 적당히 있는 거에 억지로 만족하지 말고 시간을 두고 여러 가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재고 따져서 마음에 드는 아이템을 발견하면 그때 구매를 선택하자.

좀 더 시간은 걸리겠지만 장기적으로 이게 더 만족스러운 느낌을 줄지 누가 알겠어.

사치품도 아니고 내가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책상이라면 이 정도의 고민할 가치는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처음으로 합리적인 소비를 하기 위한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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