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대기작 Aug 22. 2021

문득 생각해보니 이 나이는 고려해본 적이 없다

즐거운 50살을 위해 뭐하며 놀지를 생각해야 할 시점


'잠깐, 4개월 뒤면 35살이잖아?'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여느 때처럼 밤늦게 퇴근한 후, 컴퓨터로는 유튜브를 핸드폰으로는 게임을 동시에 하는 멀티플레이어로써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이며 짧고 소중한 여가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이젠 정말 안 자면 내일 큰일 난다」의 마지노선인 시간이 돼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잠자리에 들고 나서도 무의미하게 새로고침을 눌러가며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비집고 들어왔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 혹은 잊고 있던 과거가 엄청난 발견이라도 되는 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일은 매우 흔한 일이다. 새벽 감성이란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나는 새벽 감성에 매우 충실한 생활을 사춘기 때부터 해왔었다.


'그렇구나. 시간이 진짜 빠르긴 하네.'


이렇게 생각하고 잠을 청했다. 최후의 최후의 순간까지 자지 않고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한 번 자겠다고 마음을 먹으면 금방 잠드는 편이라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빠르게 접고 잠에 들었고, 꿈 하나 꾸지 않고 잘 잤다. 어제와 내일과 다를 것 없는 평범한 하루가 그렇게 저물었다.


그리고 다음 날 평소처럼 일하고 먹고 운동하다 문득 어제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그리고 그제야 조금 놀랐다.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사실에 놀란 건 전혀 아니고,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내가 그냥 흘려보냈다는 점이 놀라웠다. 한 번 어떤 생각이 들면 소가 되새김질하는 것처럼 씹고 뜯고 맛보고 우울해하며 새벽을 허비하던 내가 무덤덤하게 넘어가다니? 이게 무슨 일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어른이 돼버린 건가?


어릴 때부터 나는 오만 상상과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아이였고, 특히 사춘기 이후부터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어떤 생각(주로 과거의 단편들)때문에 잠 못 드는 일이 많았다. 이때 떠오르는 생각이라는 건 굉장히 감정적인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한 번 공상이 시작되면 가슴이 두근거리고 속상하고 눈물이 나고 때론 설레는 감정에 지배되곤 했다. 그리고 새벽 감성은 짧게는 잠에 영향을 주었고, 길게는 인간관계, 내 삶에 영향을 주곤 했다. 공상하느라 키가 안 컸다고 하고 싶지만 키는 유전자의 영향이니 제외.


이렇게 생각에 많은 덕분에 빨리 적성을 찾기도 했지만, 필요 이상으로 많은 생각과 감정은 내가 과거에 발 묶이게 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수없이 과거를 반추하는 편이지만 내가 새벽 감성에 덤덤하게 잠드는 날이 생겼다는 것은 감정에 묶여있던 족쇄가 조금 느슨해졌단 뜻이기도 하다. 떠오르는 생각을 외면하지 안돼 무덤덤하게 받아들이는 날이 늘어날 수 있을까? 그 방향이 맞다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두 손 들고 반길 일이다. 나 혼자 고립되어 있다는 콤플렉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으니까.


내가 가진 가장 큰 콤플렉스를 「나만 그대로」라는 점이다.

20대까지는 이 생각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는데, 30대가 되고 주변 환경이 급변하면서 나도 모르게 점점 부정적인 의미로 변질되기 시작했다. 가장 파동이 컸던 시기는 작년 하반기부터 얼마 전까지였는데, 동생의 결혼을 비롯해 주변인들의 삶이 급변화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다 보니 '왜 나만 그대로지?'라는 생각이 지배하기 시작한 것이다.


원래 인생은 저마다 다른 것이고 각자 가진 속도감이 다르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론은 알고 있지만 실전에 적용 못 시키고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수학 문제처럼 내 삶에 대입하지 못해 초조해했다. 물론 초조해하기만 할 뿐 적극적으로 뭔갈 바꿀 만한 추진력은 안 돼서 마음속에 불편함만 안은 채로 평소처럼 똑같이 루틴 하게 살았다. 일하고 - 집에서 뒹굴거리고 - 운동하고.


그런데 왜 생각의 변화가 생겼냐고 한다면, 나도 잘 모르겠다. 극적으로 생각이 바뀔만한 큰 사건은 없었으니 아주 오랜 기간 서서히 쌓인 무언가가 수면에 드러났다고 밖에 볼 수 없는데, 나이의 영향이 크다는 게 현재 나의 결론이다. (더 나이 든 미래의 나는 진짜 원인을 찾아낼 수 있을까? 일단 지금의 내 시야에서 찾은 솔루션은 이러하다)


어릴 때 수학 문제가 이해 안 돼서 '왜?'라고 물어보면 그냥 풀라는 대답을 듣곤 했다. 이해하려 하지 말고 공식을 외우고 계속 풀고를 반복하면서 습득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이건 원래 그런 거니까' 할 수 있게 된다고.


10대 중반부터 20년간 끝없이 '나는 왜 그럴까' '왜 나만 그대로 일까'라는 생각을 품고 살았는데, 똑같은 생각을 20년쯤 반복하다 보니 이제는 면역이 생겨서 '그렇구나' '그렇구나'하고 넘길 수 있는 여력이 생긴 모양이다. 당장 현실을 바꿀 수 없지만 그렇구나 하고 인정하고 넘겨버리는 쪽이 생각에 함몰되어 있는 것보다는 낫다는 걸 채득 했기 때문일까? 억지로라도 리프레쉬하는 편이 살아가기에 좀 더 편하다는 걸 이제 깨닫고 있는 중이다.


그렇게 잘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억지로 돌리다 보니 35살을 목전에 둔 나는 어릴 때보다 0.5도 정도 시야를 돌리는 게 가능해진 것 같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거북목 피플에게는 매우 가시적인 성과다. 15년쯤 더 반복되면 탄력이 붙을 테니 50대의 나는 3도쯤 시야를 돌릴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그렇게 된다면 50대의 나를 기대해봐도 좋을 것 같다.



며칠 전 이런 소소한 깨달음을 얻고 요즘 생각해보려고 하는 일이 있다.

커리어를 제외하고 나라는 사람이 앞으로 10년, 20년, 30년을 어떻게 살아가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항상 과거에 잡혀 살면서, 나만 고립된 미래를 걱정하면서도 한 번도 구체적으로 이런 걸 생각해본 적 없다는 게 매우 놀랐었다.


일에 대해서는 항상 어느 정도 다음에 대한 생각이 있었다.

물론 항상 생각만큼 된 건 아니지만, 다음 프로그램은 이런 걸 해보고 싶다, 이런 포맷은 해보니 나랑 안 맞네?, 20년 차쯤 되면 메인작가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얼마나 일할 수 있을까?, 일을 그만두면 두 번째 직업은 뭘 하지 등등


그런데 '그럼 미래의 나를 뭘 하면 놀까?'하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니. 이 질문에 떠오르는 답이 없어서 한 동안을 멍하니 있었던 것 같다.


어릴 때는 막연하게 남들 따라 20대 중반쯤 만난 사람과 30대 초에 결혼하지 않을까? 정도까진 생각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남들이 하는 말과 미디어의 따라간 것일 뿐이었다. 이 플랜이 전혀 나쁘지 않고 나도 좋은 사람을 일찍 만났다면 그 루트를 따랐겠지만, 그렇게 됐다고 하더라도 이 플랜에는 30대 중반 이후의 '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다음엔 뭘 하지?


심지어 그 플랜에서도 벗어난 지금의 나는 당장 내일에 대한 인생 계획이 없다시피 하다. 30대 중반의 '내'가 어디서 살고 무엇을 먹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취미를 갖고 어린것도 나이 들지도 않은 중간 지대를 살아갈 것인지 생각해본 적이 한 번도 없다니. 놀랄 노짜다.


코로나 전에는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조금씩 해보면서 막연하게 '이렇게 살면 좋겠다'한 적은 있는데 일이 년 새에는 그런 생각마저도 경직된 채 살았던 것 같다.


100세 시대에 30대까지만 살 것처럼 좁은 시야를 가지고 살아온 것에 반성하며, 이제 살짝 시야가 틀어진 것을 기념해서 더 먼 미래를 생각해보려고 한다. 어차피 상상을 멈출 수 없는 운명이라면 과거보단 미래를 그려보는 편이 더 즐거우니까.


상상만 한다고 하는 점이 포인트다. 상상은 지금 당장 이룰 필요 없고 품도, 돈도, 코로나 현실도 장애물이 되지 않는다. 끝없이 생각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에 맞는 상황이 오면 내가 하고 있을 테니까.


치열하게 과거를 반추해온 나의 20년을 청산하며, 즐거운 50대를 위해 행복한 상상을 의식적으로 해야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매거진의 이전글 어쩌다 보니 매달 100km 달리기 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