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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Mar 22. 2021

어쩌다 보니 매달 100km 달리기 중

프로 게으름쟁이를 움직이게 하는 배지의 힘

"오늘부터 최소 일주일은 땀나는 운동 피해 주시는 게 좋아요. 특히 잘 지워지는 편이니까 신경 써주시고요."


눈썹 리터치를 막 끝내고 이어지는 친절한 목소리에 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일주일간 땀나는 운동 금지? 이번 달에 나 얼마나 뛰었더라?'


이어지는 주의사항을 듣고 인사를 하고 샵을 나서는 동안에도 머리 한쪽에서는 러닝 어플과 무수한 숫자들이 제멋대로 뛰놀았다. 결국 샵을 나오자마자 급하게 러닝 어플을 켜서 이번 달 챌린지 진행상황을 확인했다.

주간, 월간 챌린지에 기록된 러닝 이력을 확인하고 이번에는 달력 어플을 켜서 챌린지 완수까지 남은 기간과 뛰어야 하는 거리를 확인했다.


남은 20여 일에 일주일을 빼고 100km 인증까지 남은 거리를 나누고.

한 번에 달려야 하는 거리가 길어지면 부담스러운데...

땀만 안 나면 되니까 기어가는 속도로 조깅하면서 조금씩 채울까?

땀구멍이 특정 부위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어쨌든 움직이면 나긴 날 텐데...


"배지의 노예네"


지하주차장에 도착할 때까지 다양한 경우의 수를 고민하는 나를 보던 동생이 결국 한 마디 했다.

하지 말라는데도 굳이 하겠다고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는 모습이 도저히 이해 안 간다는 것이었다.

지금 동생의 눈에 나는 배지 집착자로 보일 것이다.


"그거 못하면 마는 거지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해?"

"됐어 넌 말해도 몰라"


그간 달성한 기록 배지들이 모여있는 페이지를 보고 있으면 얼마나 뿌듯한 줄 알아?

내 감성은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동생에게 설명하려 해 봤자 입만 아플 것이 분명하므로 깔끔하게 포기하고 주제를 돌리는 편을 선택했다.


사실 내가 왜 어플이 주는 배지 하나에 이렇게 집착하고 있는지 설명할 방법이 없고, 지금은 열정적이어도 당장 내일 이 열정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마음 한쪽에 숨기고 있기 때문이다.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떠들지 않아야 그만둘 때도 쥐도 새도 모르게 그만둘 수 있다.

조금 비겁하지만 이게 지금까지 내가 취하고 있는 스탠스다.


지난 몇 달간의 나는 몇 개의 챌린지 어플에 빠져있다.

정확히는 챌린지를 완수하면 주는 배지를 모으는데 꽂혀있는 상태다.

핸드폰 화면에만 존재하는 데이터에 나름 (나 치고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애정을 주고 있다.


'챌린지 인증을 하면 운동을   열심히 하려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해 지난 3달간 100km 러닝 인증을 받았다. 하필 코로나로 헬스장도 문을 닫았던 1 달에는 눈이 오는 날에도 추위에 떨면서   공원을 뛰었다. 오로지 배지 하나 받겠다고. 그리고 이번 달은 4번째 100km 월간 챌린지에 도전하는 중이다.


아직  남았지만  이변이 없는  순조롭게 4번째 챌린지도 완수하게   같다. 귀차니즘의 화신, 허송세월로 시간 낭비가 특기인 내가.   동안 100km 달리다니. 그거도   동안.


사실 매일 10분이라도 움직여 보자, 안 되면 말지 하는 마인드로 설렁설렁 임했던지라 100km라는 숫자가 새삼 엄청 무거워 보인다. 실제로 느꼈던 무게감의 100배쯤 더 크게 느껴진다.

어차피 노는 거 배지나 모아보자고 한 건데... 일 년 전의 나라면 내가 4달째 매달 100km를 달렸다고 누군가 말했다면 거짓말 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다.



강렬한 귀차니즘, 아쉬운 결단력, 약한 추진력, 거의 존재하지 않다 시피하는 지구력

나를 이루고 있는 가장 큰 4형제들이다. 세상 늘어져서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뭔가 결심했다가 금방 흐지부지되는 게 30여 년간 내 루틴이었다. 지난해에는 클린 한 식단과 운동으로 다이어트에 성공했지만 몇 달 뒤 일이 바빠졌단 핑계로 제대로 무너져서 다이어트 전 몸무게로 정확히 다시 회귀했다. 매주 브런치 글을 쓰겠다는 1년 전의 다짐도 흐지부지해진 지 오래고 클라이밍을 배워보겠다는 버킷리스트는 쌈 싸 먹은 지 오래다.


이제 정말 누구도 내 인생에서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말을 얹지 않는 30대 중반이 되었는데, 강제로 회초리질을 하는 사람이 없으니 그걸 연료로 달리던 나는 매우 당황스럽다. 이런 시기에 나처럼 자아는 있지만 근성은 없는 어른들은 방치된 잡초처럼 제멋대로 삐죽삐죽 자란다. 다들 쭉쭉 뻗어 나가는 것 같아서 뭔가 하긴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바짝 열심히 하다가도 눈에 보이는 성과가 없으니 금방 에너지를 잃는다.


물론 여러 번의 시도와 실패가 준 교훈이 있긴 하다.

한 번에 바로 결과가 나오는 것은 세상에 없다. 있어도 그런 기회가 나한테는 없다는 점이다.

30년을 게으르게 살았으면 최소 1/10은 투자해보고 된다 안 된다를 말해야 한다는 이론도 알게 됐다.


하지만 이론을 머리로 알게 된 것과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요즘 광고에도 나오지 않는가, 이거 아는 건데? 하는 건 모르는 거라고. 지금의 나는 여전히 꾸준히 노력해 성취를 얻는 것이 어떤 의미를 주는지 모른다. 그걸 알았으면 지금처럼 마음 불편한 한량으로 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는 좀 달라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자주 들기 시작한 건 요 몇 년 사이 주변 환경이 많이 바뀌면서였다. 한 집에서 복닦대던 동생이 결혼해서 신혼집으로 떠났고, 문학 전공을 하던 친구는 고향에 내려가 샵을 열었고, 초등학생 시절 얼굴이 여전히 눈에 선한 친구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근처 동네에 살던 친구들도 하나 둘 독립하기 시작했고.


30대 초부터 이어진 급격한 주변 환경의 변화에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나도 열심히 굴러온 거 같은데 왜 나는 여전히 20년 전에 살던 동네에 살면서, 10년 전과 똑같이 일만 하고, 연락할 사람이 하나 둘 떠나가는 동안 토템처럼 남아있는 걸까?


그래서 이런저런 자잘한 시도를 무분별하게 하기 시작했다. 원래 목표 세우기는 수없이 많이 했다. 온갖 시험, 다이어트, 영어회화, 자격증 등등. 다양하고 뻔한 계획을 수없이 세웠다.

새해에도 해봤고, 월말에도 해봤고, 월초에도 해봤고, 아무것도 아닌 날에도 해봤다.

때론 성공하기도 하고 대부분 실패하기도 하면서.


어떻게 하던지 늘 끝은 같았다. 엔딩이 정해진 게임을 하듯. 분명히 다른 방법이 있을 것 같은데, 히든 스테이지로 진입하는 방법을 모르는 듯 조금 더 가거나 덜 가며 익숙한 퀘스트를 반복했다. 뭔가 하긴 했는데 이어지지 못해서 문득 돌이켜 보니 사라진 수많은 시간들은 어디로 간 걸까, 허무한 느낌도 들었다.


'좀 꾸준히 할 수 있는 방법 없나?'


작심삼일도 20년쯤 하다 보면 질리긴 하나보다. 특히 최근 몇 년간 폭발적으로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반복하다 보니 '꾸준한 연속성'의 위대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원래 나한테 없는 거라고 하기 전에 지금부터라도 노력해서 흉내라도 낼 수 있게 해야 하지 않나는 생각도 들고...

몇 년간의 삽질 끝에 얻은 뻔하지만 귀한 교훈인 셈이다.


그래서 고민하다 찾아낸 방법이 배지 모으기였다.



챌린지에 도전하는 방법은 이미 여러 번 써봤다. 내가 생각할 즈음에는 이미 누군가는 정보와 결과물을 내놓기 때문에 다양한 챌린지 어플을 써보기 시작했다.


개인 기록을 할 수 있는 어플, 인증샷을 올리면 평가 후 성공 여부를 알려주는 어플, 목표금액을 거는 어플 등


남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건 다 해봤고, 이번에도 역시나 초반에는 열심히 하다가 익숙해지면 금방 시들해졌다. 이전에도 시도를 안 해본 게 아니다 보니 챌린지가 주는 자극도 딱 내가 경험해본 정도까지만 이어졌다.


그나마 다이어트라는 영원불멸 목표와 백수가 되면서 다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시간이 있으니 운동을 하긴 하는데 운동을 하면 할수록 (식단이 안 되니) 더 몸이 커지는 느낌이라 딱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들 때 즈음, 한 러닝 어플의 기록 인증 배지가 생각났다.


러닝 하는 동안 gps로 기록된 주행 기록으로 챌린지를 완수하는 너무 유명한 어플이었다.

하루, 주간, 월간 등 다양한 이벤트가 있고 이벤트를 완수하면 챌린지 완수 배지를 주는데, 이미 몇 달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고 큰 목표는 무서워서 쳐다보지도 않고 자잘한 챌린지만 몇 번 도전해본 정도였다. 심지어 실패도 많았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사용하던 어플이고 새로운 것도 없지만, 방법을 달리하기로 했다.


철저하게 날짜와 달린 기록만 기록되는 어플이니 내 마음대로 이어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부터 한 달에 100km를 달리는 것은 어렵지만, 매주 15km 달리기 챌린지를 동시에 신청해두는 것이다. 이 어플은 여러 개의 챌린지를 신청해도 각각이 아니라 통합으로 기록되기 때문에 내가 매주 15km 러닝 챌린지를 4주 동안 하면 한 달 100km 러닝 챌린지의 기록도 자동으로 채워졌다.


한 달에 100km를 달리라고 하면 숨이 막히지만, 매주 15km씩 4주를 달리면 60km

그럼 주간 챌린지를 채우는 김에 매일 1~2km 정도만 추가해줘도 100km 챌린지 채우기가 가능하다.


한 가지 일에 열정을 갖고 몇 달, 몇 년 꾸준히 하는 것은 로망이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너무 거창하고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루, 일주일, 한 달 단위라면 허들이 한층 낮아지는 느낌이었고 부담감이 확실히 덜했다. 그리고 워낙 불규칙하고 바쁜 일을 하기 때문에 모든 도전을 최소한의 나노 단위로 쪼개 놔야 삶이 달라져도 이어나갈 때 부담이 덜할 것 같았다.


그렇게 지난 12월부터 나도 모르는 100km 러닝 챌린지가 시작됐다.

'안 되면 포기하지 뭐' '오늘은 진짜 조금만 하자'

이 마인드도 함께 장착하고.


그리고 막상 하려는데, 12월은 정말 혹독했다. 코로나로 운동센터들은 다 문을 닫았고 러닝을 뛰려면 야외에서 하는 수밖에 없는데 아무리 해가 쨍쨍한 낮에 나가도 집 밖을 나서는 순간 동태가 되는 것 같았다. 세상에서 추운 게 제일 싫은(심지어 초겨울에 이미 강원도의 추위를 맛본지라 추위라면 질색이었다) 나는 초반의 며칠은 불타오르는 의지로 운동을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허송세월 하며 흘려보낸 날이 많았다.


어차피 나 혼자 하는 거니까라며 마트에 간다거나, 어딘가를 걸어갈 때도 러닝 어플을 켜고 '어째튼 움직이긴 했잖아'라고 합리화하며 가짜로 거리를 채운 날도 많았다.


그렇게 꾸역꾸역 하다 보니 어느새 2020년의 마지막 날이 됐다. 100km 챌린지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약 10km를 채워야 했다. 이미 그전에 며칠을 아무것도 안 하고 와인이나 축내며 보낸 후였다. 야금야금 나눠서 했으면 이렇게 긴 거리가 남지 않았을 텐데.


한참을 머리를 감싸 쥐고 고민했던 것 같다. 괜히 이런 챌린지 도전은 왜 해가지고. 차라리 터무니없이 많은 거리가 남았으면 깔끔하게 포기했을 텐데, 오늘 하루만 좀 뛰면 충분히 성공 가능한 남은 거리에 한 달 동안의 내 노력을 이대로 날려야 한다는 양심의 가책이 들었다. (물론 가짜로 채운 러닝 거리는 잊은 지 오래였다)


'죽을 만큼 춥진 않겠지 일단 나갔다가 못하겠으면 들어오자'


2020년 12월 31일 최고 기온 영하 3도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집 뒤 공원으로 향한 나는 무책임하게(?) 이런 챌린지를 하겠다고 도전 버튼을 누른 한 달 전의 나와 내일 하겠다며 와인을 마시며 동면하던 엊그제의 나를 욕하며 공원을 뛰었다. 아무리 달리고 몸에 열이 올라와도 추운 건 추운 거였고, 오늘 러닝을 성공리에 마치면 반드시 맥주와 떡볶이를 먹겠다는 일념으로 달렸다. 말이 '러닝'이지 다른 사람이 걷는 속도보다도 느렸지만, 이를 악물고 달리고 달렸다.



2020년의 마지막 날 기어이 10km를 달린 나는 처음으로 한 달 100km 러닝 챌린지를 완수했다.

그리고 그날이 하루에 최장거리를 뛴 날이기도 하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며 뿌듯함, 성취감보다는 '진짜 미루지 말고 매일 조금씩 해야겠다. 한 번에 10km를 뛰는 건 도저히 못하겠다'란 생각만이 가득했다.


미루면 주옥이 된다는 걸 깨달은 채 새해가 밝았고 지금의 나는 한 번에 몰아서 했다가 험한 꼴을 당하는 일을 두려워하며 매일 조금씩 야금야금 챌린지를 이어가고 있다. 물론 식이를 매일 조금씩 하는 레벨까진 올라오지 못해서 살은 더 쪘다. 결국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던 다이어트는 사라지고 한 달에 100km를 달리는 건강한 1인이 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아직 반년도 안 됐고, 그 사이에 재취업을 하지 못해 여전히 시간만 많은 백수 상태여서 내가 꾸준히 이어나갈 수 있을지 미지수지만, [매일 조금씩]해서 올해 내내 [한 달에 100km 러닝] 챌린지를 완수하는 작은 목표가 생겼다. 그리고 이렇게 글을 쓰는 건 나태해질 미래의 나를 알기 때문에 미리 박제해두는 것이랄까.


남들은 사랑이 넘치는 연말에 혼자 찬 바람을 맞으며 역사의 심판을 받았던 그 날을 기억하면 두 번 다시 그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움직이지 않을까? 움직여라 제발 미래의 나야.


그리고 과정이 어떻든 꾸역꾸역 쌓은 챌린지 인증 배지가 늘어난 걸 보면 꽤 건실하게 산 것 같아서 뿌듯하기도 하다.


사람마다 맞은 방법이 다르겠지만, 나처럼 의지박약인 사람에게는 단기간 눈에 보이는 보상을 만들어 두는 게 좋은 것 같다. 그리고 임하는 마인드를 조금 비트는 게 중요한 것 같다.


애초에 큰 목표는 보지도 말고, 반드시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갖지 말고, 도저히 못하겠으면 약간의 사기도 치면서,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날 보면 나름 쌓여있는 것이 있더라.

일주일에 15km가 한 달에 100km가 되는 마법처럼.


남한테 피해만 안 주고 스스로 뿌듯함을 느끼다 보면 언젠가는 꾸준히 뭔가를 해낸 근면성 실함이 주는 감정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그놈의 성취감이란 걸 한 번 느껴보러 오늘도 러닝을 나간다. 나갈 때도, 달릴 때도 진짜 귀찮다는 말을 속으로 되뇌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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