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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대기작 Sep 10. 2021

삶에 찌든 나를 최애로 모시기로 했다

내가 아니면 누가 나를 다독여줄까


「오늘 뭐 할까?」



- 집 근처에 새로 문 옆 카페 가볼까?

- 저번에 친구가 알려줘서 궁금했던 제과점은?

- 유튜브에서 보고 궁금했던 방향제 매장이 좀 먼 백화점에 있는데 드라이브 겸 가볼래?

- 아님 이것도 저것도 귀찮은데 오늘은 라면 끓여 먹고 게임이나 할까?



요즘 하루를 시작하는 루틴이 생겼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으로 TV를 켜고 대충 눈에 보이는 음식들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눈은 화면에 고정하고 입은 음식을 먹으며 멍 때리며 정신을 깨는 시간을 갖고 난 후에 커피 한잔을 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정신이 든다. 그러고 나면 대화를 시작한다. 상대는 나 자신. 이제 막 깬 나에게 오늘은 뭐하며 보내면 좋을지 대화를 거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데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거나, 스케줄을 확인하는 것과는 다르다.

정확히 나 자신에게 말을 걸고, 오늘은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어보고, 주변 사람들과 스몰토크를 하듯 '이건 어때? 저건 어때?' 하며 주고받는 대화를 하는 것이다.


나 자신하고 스몰토크를 한다는 게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 있지만 지금까지 경험해본 바로는 꽤 괜찮은 것 같다. 나에게 '오늘 뭐 할까?'하고 묻는 것만으로도 의사소통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지고 외로움도 조금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친구나 가족과 대화하면 될 일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사실 성인인 우리는 모두 잘 알고 있다. 각자의 삶이 바빠질수록 내가 원하는 때 원하는 만큼 소통하는 것을 타인에게 바랄 수 없다는 것. 그건 서로에게 부담만 될 뿐이다.


심지어 어느 정도 세상을 살아낸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은 자신의 경험에 따라 생각과 의지가 확고해졌고, 말을 하는 나나 그 말을 들어주는 상대나 자신의 주관이 뚜렷해졌기 때문에 사소한 부분에도 서로의 생각 차이를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나에게 100% 동조하는 소통을 바란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말도 안 될뿐더러 관계를 악화시키는 이기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때가 한참 하던 프로그램의 마지막 촬영을 준비하던 때였다. 안 그래도 바쁜데 온 우주의 기운이 모여서 이 프로그램을 막는 듯 사건사고가 하도 많아서 스트레스가 극에 달했다. 신경성으로 위염이 극에 달했고, 주변에 하소연하며 위로를 받아보려 몇 번 시도했지만 완전한 공감은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힘들 때쯤, 인터넷에서 한 글을 봤다.


정확히 내용은 기억 안 나지만 나를 최애처럼 여겨주라는 내용이었는데, 최애가 무언가를 잘하든 못하든 숨 쉬는 것만으로도 예뻐하고 실수를 하면 보듬어주듯이 나 자신에게 한없이 관대하고 친절해지고 포용해주라는 뜻이었다.


나랑 계속 있고, 내 마음을 백 프로 공감하는 것은 나 자신밖에 없으니 가장 귀하게 여겨야 하는 존재라는 말이 꽤 합리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화가 날 때마다, 어이없고 속상한 일이 생길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를 다독였다. 내가 나한테 말을 걸며 '아이고 힘들지, 진짜 저 사람들은 왜 그럴까?' '남의 돈 버는 게 쉽지 않아. 실수할 수 있지 괜찮아. 지금부터 고치면 돼' 등등의 말을 해보기 시작했고 그렇다고 아픈 위가 나아진 건 아니지만 그럭저럭 위기를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난 후에는 집에 틀어박혀 허송세월을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원래 가만히 있으면 잡생각이 많아지는 타입인 데다 그전에 바빴다는 이유로 밀린 잠을 자고 늦은 오후에야 활동하는 삶을 며칠 이어갔다. 처음에는 체력을 충전할 수 있어서 좋았지만 그것도 며칠일 뿐, 시간이 조금 지나자 왠지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바쁠 때 나는 이런 휴식을 원하지 않았는데, 왜 또 이렇게 집에만 머물고 있지?

예전에도 한참 바쁘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죽은 듯이 사는 삶에 염증을 느꼈던 것 같은데?

뭔가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다가, 한참 바쁠 때 써먹던 최애 전법을 활용해보기로 했다.

코로나 때문에 여행은커녕 지역 이동도 자제해야 하는 시기이다 보니 본격적으로 큰 활동을 하는 것에는 분명 제약이 있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 그렇다면, 나랑 가장 오래 같이 있는 나와 놀면 되지 않을까? 바로 옆에 있는 나에게 대화를 시도해보면 뭔가 나오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그렇게 모닝 루틴으로 [나와의 대화]가 시작됐다.


그렇다고 엄청 거창한 내용은 아니고, 아침에 일어나서 정신이 의식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나면 나에게 습관적으로 뭘 하고 싶은지 물어보는 게 끝이다.

다만 반드시 의문형으로! 상대가 쉽게 대답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대화를 이끌어 가는 것이 포인트다.


물론 '나'는 대화하기 쉬운 상대는 아니다. 워낙 까다로운 데다 지가 뭘 원하는지 표현하지도 않고 뚱하고 게으른 기분파다. 하지만 내가 최애, 그것도 얼마 전까지 바쁘게 일하느라 지친 상태라는 것을 상기하며 어르고 달래며 이것저것 제안해본다. 다행히 성격이 개차반이어도 내가 질문하면 묵묵히 다 들어주긴 한다. 내가 물어본다고 친절하게 다 대답해주고 움직여준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래도 이 바쁜 현대 사회에서 누가 내 말을 군말 없이 들어주는 게 어딘가 싶다.


그렇게 나와의 대화를 시도하는 단계에서 얻은 게 뭐가 있냐고 물어본다면, '판단 기준'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에게 말을 건다고 인생의 진리가 보인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내가 확 달라지는 일은 없다. 외로움과 심심함이 사라지지도 않는다. 하지만, 이런저런 질문을 하다 보면 지금 내가 뭐가 더 끌리는지, 반드시 해야 하는데 하기 싫어서 마음에 걸리는 일은 뭔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 귀찮은 일들을 대화로 깨닫고 나면 어떻게 배치하면 서로가 만족할 수 있을지에 대한 판단하기 쉬워진다.


가령 오늘 가을맞이 옷장 정리를 해야 하고, 점심도 해 먹어야 하고, 저녁에는 피디가 보낸 영상을 보고 작업을 해야 한다면, 옛날 같았다면 가을 옷장 정리는 생각만 해도 귀찮아서 엄두가 안 나고, 점심은 해 먹기가 귀찮아서 대충 배달에, 일은 언제 올지 모르니 아무것도 못하고 하루를 허비하며 상대에 대한 의미 없는 분노만 쌓으며 하루를 보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지금까지 남은 게 뭐지?


최애가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며 귀차니즘과 짜증으로 하루를 보내게 할 순 없지.

그 존재가 누구든 최애를 모셔본 모든 사람들은 공감할 것이다. 내 최애에게는 최대한 좋은 것, 예쁜 것만 보여주고 싶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법이다.


물론 나 자신은 강제 최애기 때문에 아직 진짜 최애처럼 좋은 것만 보여주고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단 의무감이 약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일단 해보기로 했으니, 나 자신에게 의견을 물어보며 하고 싶은 것과 해야 하는 것의 조합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부모님이 아침에 먹다 남겨둔 사과와 구운 계란을 씹어 먹으며 나 자신에게 모닝 대화를 끈질기게 요구해 나에게 얻어낸 오늘의 정보는 대략 이러하다.


- 아직 더우니까 옷은 자주 입을 바지만 옷걸이에 정리하기

- 점심으로는 칼칼한 라면이 땡기니 마늘을 폭탄처럼 넣기

- 어제 게임에서 망한 부분 오늘 다시 시도해보기

- 지금까지 통계로 영상은 빨라야 밤늦게 올 테니 밖에서 할 일은 7시 안에 끝내기

- 내추럴 와인이 사고 싶긴 하지만 일단 집에 남은 와인부터 털기


그렇게 해서 나와 대화를 통해 만든 오늘의 일정은

오전에 좋아하는 예능을 켜놓고 가을용 바지를 옷걸이에 정리해서 걸고, 간 마늘과 부추, 스테비아(설탕 대체)를 살짝 넣은 분식집 st 라면을 먹은 후, 평소에 가고 싶었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브런치 글을 쓰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을 한 다음 집에 돌아가서 게임을 하며 편집 영상을 기다리다 영상이 오면 일을 하고 자는 것으로 정해졌다.


나와 나의 아침 대화로 만든 이 규칙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 몇 가지 있다.

첫 번째, 절대 무슨 일이 있어도 '나'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 것

두 번째, 안 하면 밥줄 끊기는 공적인 일을 제외하면 하기 싫으면 하지 말 것

세 번째, 점심 메뉴를 골라도 '그냥저냥 나쁘지 않은 것'보단 '그거 괜찮은데?' 하는 것을 고를 것.

마지막, 모든 일정은 '내'가 하기 싫다면 그 즉시 중단되며 언제나 매우 자유롭게 바뀔 수 있음


강제성을 띄게 시작하면 뭐든 계속하기 싫어지는 법이고, 어떤 선택을 하든 그냥저냥으로 채워지는 것보단 아까보단 나은 것을 고르는 게 더 만족감을 준다. 최애인 내 의견이 언제나 존중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거고.


엄청난 결심이 필요한 일들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고 물어보신다면, 누누이 말하지만 저는 상상 이상으로 엉덩이가 무겁고 게으른 편이라... 라면 하나 끓여 먹는 것도 어마어마한 결심이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에 굉장히 생산적인 하루를 보낸 것이라고 단언하고 싶다. 심지어 이 과정에서 최애인 내가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오히려 성실하게 살았다는 뿌듯함에 매우 기분이 좋아졌으므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요즘 나에게 스몰토크를 걸며 하루를 시작하다 보니 전처럼 똑같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날도 '오늘은 내가 이러고 싶은 날'이라는 판단이 든 후에 하는 행동이기 때문에 죄책감이 든다거나 허송세월 했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는다. 편하게 쉬고 싶고 하루 종일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날도 있기 마련인데 그런 날의 마무리는 항상 찜찜하고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는가 하는 죄책감을 느끼곤 했는데, 내가 그럴 필요가 있다고 판단한 이후에 한 행동이라고 생각하면 '그래 그간 열심히 달렸지 내가 쉬고 싶다는데 누가 뭐라고 할 거야'라는 마인드로 행복한 베짱이가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나를 최애로 여기고 귀하게 대해도 어려움은 많다. 하던 일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인간관계에서 스트레스가 온다거나, 이렇게 발버둥 쳐도 결국 나는 혼자라는 외로움이 덮쳐올 때도 있다. 사실 이럴 때는 내가 아무리 나를 아무리 위로해도(?) 진심을 다 할 수 없기에 큰 타격을 입는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기분 안 좋은데 오늘은 다이어트 다 버리고 아이스크림 먹을까?'라는 질문을 나한테 던지면 그냥 욱하는 마음에 뭔가 먹을 때보단 기분이 비참하지 않다. 욱하는 마음에 뭔가 먹는다거나 일을 저지르고 나면 내가 왜 그랬지 하는 죄책감이 따라붙는데, 내가 나에게 '네가 충분히 화날 만 해. 필요하다면 우리 기분 전환하고 잊어버리자'라는 사인을 준 다음에 내가 그렇게 할지 말지를 결정해서 행동하는 것은 행위 다음에 주는 감정의 차이가 매우 크다.


이러다 과해지면 안 되겠지만, 일단은 나는 좋으나 싫으나 한 평생 같이 해야 하는 나를 최애로 모시고 살아보기로 결정했다. 좋은 일이 있든, 안 좋은 일이 있든. 항상 나에게 말을 걸고 내가 결정을 하고.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아까와 달라진 게 없는 상황이라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누군가에게 지지받고 있고 귀하게 여겨지고 있는 나는 내일은 더 나은 선택을 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어도 되고. 어차피는 나는 항상 나를 지지할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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