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구리 _ 모옌

내가 가해자였던 적은 없었나?

by 보리보리

보리에게 _


모옌의 소설이 시작하면 거대한 이야기들이 서로 이야기하겠다고 모래 먼지를 날리며 달려오는 느낌이 들어. 이상하지? 인물이 아니라 이야기가 온다고 말한 부분이 말이야.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인물들이 모두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처음부터 이야기와 이야기로 만나서, 무수한 이야기 중에 의미 있는 부분들이 접착제가 되어 사람들을 연결시켜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어.


소설 속 주인공들이 인물들끼리 만나는 게 다라면, 주인공들이 자기의 억울함을, 허망함을 성토하는 게 다라면, 끝도 없이 본인들의 생각을 토해내면 어떻게 될까? 마치 우주가 처음 생겨났을 때 중력이 지금보다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지구가 될 어떤 것들이 서로 뭉쳐지지 못해 떠다니는 먼지가 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인물들의 고통도, 억울함도, 개구리가 우는 밤 시골길을 가는 고모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강으로 뛰어든 여자도 한 곳으로 수렴하지 못하고 다들 빈 공간으로 없어지겠지. 그 안의 생생한 두려움도, 그 사람의, 그 마을의 가치와 세계관도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릴 거야. 하지만 소설이니까, 그 안에서 이야기와 이야기가 만난다고 생각하면 고모가 위풍당당하게 자전거를 타며 달려오는 허풍 가득한 장면이나 뒤쫓아 오는 아이를 피해 도망가는 주인공이, 아이를 잃은 여인들의 슬픔이, 대의를 위한 미명 아래 희생된 개인의 고통이 흩어지지 않고 개구리(와)라는 이야기를 통해 엮어지기 때문에 모든 순간들이 사라지지 않고 의미를 갖고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어.


모옌이라는 작가는 바진, 루쉰를 이어 쑤퉁, 위화, 옌렌커로 이어지는 중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중국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란다. 작가가 예전에 노벨상을 수상하고 독일어판 출간지 인터뷰에서 한 말이 인상적이었는데 그는 거기에서 " 수십 년간 엄청난 변화를 겪은 중국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스스로를 피해자로 여긴다. 개구리는 내가 가해자였던 적은 없었나에 대한 질문을 다룬다."라고 말했단다.


나는 가까운 나라인 중국에서 예전부터 산아제한을 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계획생육'이라는 이름 아래 이렇게 오랫동안 개인의 삶을 억압하고 구속해 왔는지는 알지 못했어. 역자의 해설에서 그 당시 구호들을 볼 수 있는데 이 구호들만 보아도 그 당시 정책이 얼마나 살벌했는지 느낄 수 있다. ('물이 강을 이룰지라도 초과 출산하면 온 마을 남자들을 묶어 버릴 것이다.', '끌어낼 것은 끌어내고 유산시킬 수 있는 것은 유산시켜 단호하게 낳을 수 없도록 하자.' 등등) 계획생육정책은 국가주도의 강력한 정책으로 도시에서는 1명, 시골에서는 1명인데 낳은 아이가 여자이면 8년 뒤에 한 명을 더 낳을 수 있게 해 주었고 아직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정책이라고 해. 앞에 나온 구호만 떠올려도 개인의 삶이 얼마나 비극적이게 바뀔 수 있는지는 짐작할 수 있는데 이 소설이 그런 사회 정책을 비판하려고 썼구나 하고 넘어가기보다는 그걸 넘어선 질문은 없을까? 생각해 보았어.


첫 번째 질문은 '내가 가해자였던 적은 없었나? '하는 질문이야.

작가가 인터뷰에서 이미 한 질문이라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정말 모두가 피해자들 같아. 전통적인 가치를 지키려는 사람들과 새로운 세상을 위해 농민들을 계몽하려는(?) 의지를 가진 고모나 자식을 잃은 많은 어머니들, 자식을 지키다가 죽게 된 사람들을 떠올리면 그래.


그런데 이 소설에서 가장 흥미 있는 부분은 누구도 온전히 피해자이고 가해자일 수 없다는 것이야. 중요한 인물로 그려지는 고모를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마을에서 존경받는 산부인과 의사로 많은 산모들과 아이들을 돕지만 나중에는 산아제한정책이라는 큰 대의를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죽게 만들어. 고모는 자기가 인류를 위해 어려운 일을 맡아서 했지만 이후에 그 아이들을 떠올리며 고통받는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를 역사의 피해자라고 생각하지만 마지막 극본 장면에서의 모습을 보면 과거의 일로 괴로워할 뿐 천 메이의 아이를 빼앗는데 도움을 주게 되지. 편지를 쓰는 화자인 커더우 역시 자기 부인이 계획생육에 의해 희생되어도, 가족들이 고통을 받고 친구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아도 담담하게 글을 쓸 뿐이야. 자기 스스로도 아들을 원하지만 전부 인이 적극적으로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막지도, 돕지도 않고 방관하고 이후에 60이 넘어서 친구의 딸을 통한 대리모를 하려고 하고 그것을 옳은 일이라고 "좋아. 그럼 그냥 물 흐르는 대로 흘러가 보기로 하지."라며 합리화하는 모습도 나오지. 상황이 더 비극적인 천비와 천비네 가족을 떠올려봐도 어쩔 수 없는 흐름에 의해 가족이 붕괴되고, 아이들은 화재로 심한 화상을 입게 되는데 천비 역시 처음에 아내인 왕단과 전통적 가치를 위해 아들을 낳기 위해 임신을 하고, 아이가 딸이라는 걸 알게 되면서 실망을 하고 이후로는 삶의 의지를 잃고 딸들을 돌보지 못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게 되지.


그런 수많은 모순들을 소설은 이야기를 하듯이 멀리서 들려주는데 인물 한 명 한 명의 고통스러운 과거만 본다면 우리가 다 피해자인가 싶지만 한 걸음 더 뒤로 가보면 우리 모두 지켜야 할 개인적 또는 윤리적 책임이 있었지만 지키지 않았기에 사실은 모두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거지. 이 소설의 마무리는 주인공들의 반성이나 아름다운 속죄로 연결되지 않고 끊임없는 인물의 모순, 어리석음을 보여주면서 판단은 내리지 않지만 주변 사람들이 고모를 또는 천비를 죄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가해자였던 적은 없을까를 계속해서 묻고 있어.


눈만 뜨면 하루에도 엄청나게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석유가 바다에 뿌려지고, 사람들 사이에서, 집단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나고 있지.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전쟁으로 난민들이 생기고 사회적 불평등이 여러 곳으로 전이되어 진행되고 있어. 우리는 매 순간 피해자도 될 수 있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가해자일 수도 있어. 편지를 쓰는 주인공인 커더우처럼 멀리서 모든 일들을 바라보기만 해도 안되고, 또 매 순간 내가 나만 피해자라고 생각해도 안되지 않을까? 책을 읽으면서 나 스스로에게 이야기해. 또는 나에게 바라는 마음이 들어. 항상 진실되고 참되게 살기를. 자칫하면 다 사는 것이 그런 거지, 다른 사람도 다 그러는데 하고 생각하기 쉽지만,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옳지 않은 생각은 자신만 해치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을 해치기 때문에 매사 깨어있는 마음으로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두 번째, 대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허용되지 않는가?


주인공은 고모가 자신의 아내의 중절수술을 하닥 아내가 죽게 된 이후에도 '고모같이 충성스러운 사람이 없으면 나라에서 내놓는 정책들을 실현하기 어렵겠죠.'라고 이야기하거나 극본에서 "고모님, 그때 일들이 '악한 일'인가에 대해 지금은 단정하기 어려워요. 설사 '악한 일'이라고 결론이 난다 해도 고모님이 책임질 필요는 없어요. 자책하거나 죄책감에 시달릴 필요도 없어요. 고모님은 죄인이 아니라 공신이에요."라고 말해준다. 그러나 고모가 한 일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하는 많은 산모들을 죽게 하거나 아이들을 죽게 한 일이었다. 그 어떤 것도, 어떤 이유도 혹은 그것이 중국이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더라고 과정에서 죄 없는 많은 생명들을 죽게 한 것, 그리고 그 정책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가야 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해.


또한 고모에게 조카인 주인공이 위로하면서 했던 말들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의 대사들이야. 나치 부역자들이 재판에서 했던 말과 같고, 중일전쟁 당시 국민당 장제스가 화베이 지역의 대부분이 일본군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나라를 구하기 위해라는 명목으로 화위안커우 제방을 폭발했을 때와 같지. 그 이후의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인간 사회의 비극이 대체로 이런 논리로 일어난다는 것을 떠올려 볼 수 있어.


어떤 경우에도 한 사람의 희생을 쉽게 생각하는 것, 그런 생각 그리고 이어지는 행동들은 인류를 위한 길이라고 볼 수 없어. 처음에 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군의 자살특공대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런 전략은 정말 최강이겠구나 생각했어. 적에게 너무나 큰 고통과 상처를 주고 수많은 인명피해를 주며 막을 수 없기 때문이야. 그러나 역사 속의 뒷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런 소모품이 되기를 원하는 조종사는 결코 한 명도 없었고 길고 긴 전쟁이 보여주는 건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고, 한 명의 군인이라도 살리는 길이 결국은 나쁜 전쟁을 조금이라도 덜 나쁘게 하는 그리고 전쟁을 멈추는 길이기도 했어.



마지막으로 소설은 너무나 인간적인 결말이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잠시나마 회개하는 듯 반성하는 듯하다가 자기 발 밑의 낙엽들을 옆으로 치우듯이 쓱쓱 치우고 뒤를 한번 바라보다가 다시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린다. 어떤 판단도, 어떤 평가도 없이 소설은 조용히 연극과 함께 끝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