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상반기 회고

나를 지탱하는 힘들에 대하여

by yeji

올해 카메라 앨범의 스크롤을 다시 올려보았다. 올해 나에게 있었던 큰 변화들이 어느새 먼 과거의 일처럼 무디게 느껴지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오히려 아등바등하면서도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해 온 일상의 루틴들이 남아 나를 지키고 있었다. 흔들리거나 실망하거나 분노할 때에도 내가 제 자리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공간 덕분이었다.


올해로 조카들이 4살, 5살이 되면서 말이 많이 늘었다. 첫째는 길거리에 있는 현수막에 있는 글씨를 읽어 내기 시작했다. 이제는 저 혼자 책에 있는 구절들을 점차 빠르게 읽어내며 박수세례를 받곤 한다. 둘째는 아직 글씨를 읽지는 못하지만 특유의 눈치가 대단히 늘었다. 한 살이 많고 워낙 말을 잘하는 제 언니와도 이제 말로 싸울 때 지지 않을 정도다. 외할머니에 엄마와 이모까지 분야는 달라도 모두 가르치는 업을 기본으로 해서인지 아이들이 쓰는 말에 특유의 어른 말투가 묻어있다. 그래서 가끔 내가 하던 말을 아이들로부터 들으면 헉, 하는 순간이 있다. 가끔 생각 없이 말을 툭 내뱉으면 꼭 유심히 들었다가 따라 하기 때문에 '이모가 미안해. 잘못했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항상 다짐한다. 아이들에게 매 순간 좋은 이모가 되고 싶어서 더 잘 살아야겠다고. 이 철없는 이모는 너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좋은 사람이 되고 싶으니까.


그러다가도 이런 생각을 한다. 고성에 가면 너희가 이모를 부를 때 당장 달려가기 힘들 텐데 괜찮을까? 이모는 너희를 볼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는 지금이 안심이 되는데 어떡하지? 이모는 너희를 못 보는 일이 생길까 봐 가끔 겁이 나거든. 올해 상반기 내가 한 가장 큰 결심은 고성으로 옮겨 살아보겠다는 마음이었다. 고성으로 가겠다고 했을 때 내가 고려한 건 돈도, 커리어도 아니었다. 우리 조카들 뿐이었지. 내 배로 낳지도 않은 아이들 생각에 속절없이 눈물이 차오르곤 하는 바보 같은 이모라서, 그런 생각을 하면 고성에 가겠다던 굳건한 마음이 살짝 뒷걸음질치곤 한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으려고 생각하는 이모의 주문은 이것이다. '이모가 있게 될 고성으로 오면 또 다른 세상을 너희에게 알려줄게. 우리 더 재밌게 놀자.'


올해 상반기에는 고성을 3번 다녀왔고, 제주에도 1번 다녀왔다. 회고를 하면서야 깨달았는데 올해 고성에 방문한 3번이 모두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이었다. 3번 모두 내가 혼자 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내가 원해서 다른 이들을 초대해 만든 여정이었다. 올해의 나만 본 사람들이라면 저 사람은 원래 다른 사람들과 여행 다니는 것을 편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환경과 사람이 바뀔 때 적응하기 위해서 예민해진다. 나뿐만 아니라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도 민감하게 촉을 세우는 편이라 에너지가 많이 든다. 그래서 고성을 다니던 초반에는 차라리 혼자 다니는 것을 선택했다. 그랬던 내가 왜 변했을까? 다른 이와 함께 할 때 더 많은 것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열린 마음으로 과감한 선택을 하고, 혼자라면 하지 않았을 일에 도전한다. 같은 풍경도 저마다 다르게 보는 것에 놀라고, 다른 경험을 가진 이들이 한 장소에서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도 재미있다. 여정에 함께 하는 이들의 숫자만큼이나 경험이 곱절로 더 풍성해진다. 그래서 이제는 주변 누군가와 함께 고성에 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오히려 그 사람의 시각이 더해져 새로워질 여정이 기대된다. 그러니 그게 누구든 나와 함께 고성을 가자는 이야기에 너무 놀라지 않기를.


특히 5월에 있었던 고성 일출항해는 상반기 최고의 순간으로 한번 더 남겨둔다. 고성을 오갈 때마다 몇 번이고 도전하려고 했는데 항상 날씨나, 컨디션이 맞지 않아서 포기했던 일출항해. 맹그로브 팀에서 초대해서 방문했던 5월의 여정에 일출항해가 있었다. 나의 기대가 높았음에도 그 기대를 뛰어넘었고 스스로 한없이 겸손해지는 시간이었다. 아침부터 차와 토스트를 준비해 준 매니저님, 약속 시간에 맞춰 졸린 눈을 비비며 나온 사람들, 해가 안 보일 거라 아쉽다고 하시면서도 자꾸만 먼바다로 나가시던 선장님, 그리고 결국 우리 앞에 선명히 떠오른 해까지. 모든 순간 위에 정성이 더해져 기적과도 같은 일출이었다. 그 일출항해를 마치고 들어와서 점심이 되기 전에 일출항해에 대한 글을 썼다.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써낸 글이었다. 상반기 최고의 순간을 고른 기준은 생각보다 명료했다. 내가 당장 글을 쓰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강렬했던 것들 중에 고르면 되는 것이었다. 그런 순간은 고성의 일출항해가 유일했다.


스크롤을 올리다 보니 언젠가 볼 것 같아서 캡처해 둔 화면들이 많았다. 역시나 다시 보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껏 올린 입꼬리와 자그마한 브이자를 들어 올리며 눈 맞춰주던 아이들과 이른 아침 시시각각 바뀌는 해를 담아낸 수백 장의 일출 사진은 이미 여러 번 다시 보았다. 예전 같으면 내 상반기 회고가 모두 일, 커리어, 직장의 이야기였을텐데 이제 그런 것들은 후순위가 되었다.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게 생겨버려서 그렇다. 몇 년 사이에 이렇게 변한 내가 싫지 않다. 어디로 튈지 모르지만 그래서 더 기대되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내가 사랑하는 방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