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사람

by yeji

그런 질문을 종종 듣는다. 왜 갑자기 커리어를 이쪽으로 시작하게 되었냐고. 지금 생각해 보면 별 이유는 아니었다. 어떤 리더를 오래 좋아했고 지켜봤고, 그 리더 곁에서 배워보고 싶었다. 인생의 중요한 전환점에 그 선택을 해서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그분은 헌트라는 자신의 블로그에 자신의 생각을 남겨두곤 했다. 일과 일상, 가족과 회사, 친구와 동료까지 영역은 다양했다. 학생 때 우연히 그 글을 보고 나서 블로그를 즐겨찾기 해두었다. 어린 내가 읽어도 쉽게 읽혔으니 참 좋은 글이었다. 그 후로는 생각이 나면 블로그로 들어가서 잡다한 글을 찾아 읽곤 했다. 특히 좋아했던 글들은 딸 은비에게 남기는 글이었다.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이야기들이었으니, 표현은 더욱 쉬웠으나 생각은 보다 날카로웠다. 한 회사의 대표이니 신비주의는 할 수 없었겠지만 회사보다 본인이 더 드러나는 것을 경계했던 사람이었다. 아주 가끔씩만 인터뷰를 했고, 얼굴이 없는 채로 사진을 찍었다. 그럼에도 그분의 블로그는 자주 언급되었고, 그는 내성적인 보스라는 드라마 주인공의 이야기가 되기도 했다.


이 사람이라면 좋은 리더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과 일하는 방식을 내가 두 눈으로 꼭 보고 싶었다. 그걸 내가 배울 수만 있으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해도 살아남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임용고시 3년이 내게 남긴 것은 없었기에, 그저 20대 후반 경력 없는 내가 그 홍보 회사에 지원할 힌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분의 인스타그램을 미친 듯이 파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희망의 끈을 잡았다. 바로 그가 자신의 취향을 담은 편집샵을 낸다는 이야기였다. 그것도 서울이 아니라, 무려 수원에! 이렇게 운과 때가 맞을 수가 있었나? 내게는 천운이었다.


그 이후엔 여느 회사를 들어가는 과정과 같았다.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을 봤고, 4월의 어느 날부터 출근을 했다. 그렇게 그 회사에서 약 2년을 일하고 나왔다. 중간에 디렉터님이 계셨기 때문에 내가 대표님과 직접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매장을 관리할 때 일일보고서를 써서 보내면 어떤 날은 답장이 왔다. 회사의 월 매출이 플러스가 되었던 어느 날은 수원으로 내려와서 비싼 갈비를 사주시면서 편지와 봉투 하나를 주셨다. 우리가 낸 수익을 직급 상관없이 인원수대로 나눈 금액이었다. 액수는 크지 않았으나, 그 마음은 컸다. 마음을 적절한 때에 적절하게 전달하는 법, 블로그에서 글로만 보던 것이었다. 그걸 내가 받았다니!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고 들어갔던 그 회사에서 일하던 날들이 모두 좋지는 않았지만, 그날 그 마음은 아직도 종종 생각이 난다. 그 편지와 돈은 여전히 보관함에 잘 넣어두고 있다.


그 회사에서 일하면서 좋은 리더에 대한 생각을 잘 정리했는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매일매일이 생존의 고비였기에 살아남기에 바빴던 시절, 코로나가 우리의 일상을 완전히 바꿔놓았던 그 시절.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뛰어들었지만 그걸로 극복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좋은 사람도 만났지만 빌런 같은 동료도 많이 만났고, 내 직속 상사였던 디렉터님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다. 대표님과 직접 소통할 기회도 많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위에 쓴 편지와 봉투를 받았던 것처럼 몇 번의 인상적으로 남은 기억들이 있다. 팝업스토어를 하는데 굳이 그 첫날 오픈 시간에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시던 모습이라던가, 전시 준비를 하는데 수원까지 내려오셔서 밥과 술을 사주시던 모습이라던가. 물론 그분의 기준은 아주 높았기 때문에 일에서의 기준을 충족하는 날은 많이 없었지만.


최근에 그분이 처음 창업한 홍보회사가 벌써 25주년이 되었다는 게시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것을 기념해, 그동안 회사와 관계가 있었던 모두에게 기념주를 전달해 주신다는 이야기도. 사연을 써서 보냈고, 그저께 배송해 주신다는 문자를 받았다. 그분이 기쁜 일을 나누는 방식을 보며 여전하시구나 생각한다. 가끔 돈보다도 더 귀한 것을 스스럼없이 나눠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동시에 지금의 나는 어떤지도 생각한다. 어린 시절 좋아했던 그 리더의 모습을 지금의 나는 조금이라도 닮아가고는 있는지.



keyword
작가의 이전글2025 상반기 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