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Yorker 기사가 말하는 신문의 죽음
Jill Lepore 는 "저널리즘의 미래가 있는가? (Does Journalism have a Future?)"에서 신문, 잡지의 변천사를 이렇게 정리한다.
60년대: 묘사(description)
70년대 중반~: 해석 (interpretation)
이전까지 녹음기처럼 사실만을 전달했던 신문/잡지사의 역할이 변한 이유는 텔레비전의 대중화이다. 텔레비전이 독자에게 웬만한 모든 팩트를 제공했기 때문에 그 외의 콘텐츠를 찾아야 했던 것이다. 그러니 인터넷이 등장한 후, 신문/잡지사의 길은 더욱 협소해졌을 수밖에.
기자는 의견을 반영해 날카롭고 자극적인 기사를 쓰기 시작했고, 자연스럽게 정치적인 색깔을 띠게 되었다. 기자는 대부분 진보주의기 때문에, 보수주의의 반대(트럼프가 CNN을 거짓 뉴스(fake news), 민중의 참 원수(true enemy of people)라며 비난하는 등)가 일어났고, 어느 신문사도 온전히 신뢰할 만 하지 못하다는 인식이 생겼다. 신문이 독자를 끌어모으려다가 정치를 닮아버린 것이다.
르포레는 에디터들이 무엇이 중요한 스토리인지 더는 신중히 정하지 않고, 트럼프의 트위터 포스트를 전달하곤 "좋아요"를 받기에 급급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최근 인기가 New York Times를 능가한 Buzzfeed는 다른 신문사에서 발표한 내용을 목록 형식으로 재포장해 감성을 앞세워 독자를 끌어모았다. "LOL", "OMG", "WTF" 등 다양하게 반응할 수 있도록 해놓고. 여러 신문/잡지사가 문을 닫는 판국에 Times는 이 방식을 받아들여 이제까지 살아남았다고 밝혔다.
좋은 정보(good information)는 비싸지고, 혼란스러운 정보(chaotic information)는 공짜로 난무한다. 사람들은 돈을 내고 좋은 정보를 얻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 문제인데.
나도 너무 비싸게 느껴져서 The New Yorker를 구독했다가 취소하기를 반복한다.
신문도 독자 몰이에 돌입한 현실 가운데, 어차피 한 소스(source)만을 신뢰할 순 없다. 다양한 정보를 접하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텔레비전, 인터넷, 신문 모두 사용하기 나름이니까. 정보의 바닷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헤엄쳐 멀리 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질문하고 사유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와 글쓰기를 멈추지 말자. 책엔 온라인에서 찾아보기 힘든 깊은 성찰이 담겨있으니까.
오늘 소개할 소설은 레이 브레드베리의 "화씨 451"이다. 영화의 배경은 책과 펜이 금지된 미래 사회이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불법으로 책을 소지하고, 주인공은 그들을 찾아내 책을 태우는 방화수이다. 슬픈 눈을 한 여성이 그에게 왜 책을 태우는지 아느냐고 물어보고, 태우기 전에 읽어보라고 권한 후, 주인공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서장은 철학이나 문학 같은 책들이 인간을 쓸데없이 고뇌하게 만들고, 비판적인 시각을 키워 불행하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책은 인간으로 자발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그렇게 되면 마음대로 다루기 힘들기 때문인 것이다.
Maybe the books can get us half out of the cave. They just might stop us from making the same damn insane mistakes!
어쩌면 저 책들이 우리를 이 동굴에서 반쯤 벗어나게 해줄지도 몰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게 해줄지도 몰라.
Ray Bradbury, Fahrenheit 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