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家訓): 한집안의 조상이나 어른이 자손들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 한집안의 전통적 도덕관으로 삼기도 한다.
2023년 10월 13일 금요일 수업시간. 선생님께서 가화만사성이라는 단어를 호제에게 설명하던 중 ‘가훈’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호제는 ‘가훈’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은 집에 가서 부모님께 여쭤보라고 하셨다.
맙소사. 가훈이 없었다. 이참에 만들기로 했다.
“조직, 기업은 지향하는 바를 한 문장으로 딱!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훈, 캐치프레이즈에서 조직의 방향성을 조직원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킬링 메시지가 없다면, 색깔이, 방향성이, 정체성이 뚜렷하지 않은 겁니다.”라고 있는 조언, 없는 조언 다 끌어다 해놓고, 내가 만든 조직의 방향성은 정작 없었다는 걸 10년이 다 되어서야 알았다.
본가에는 가훈이 있다. 엄마아빠가 급조하지 않은 티를 내지 않으려 했지만, 뭔가 급조한 미심쩍은 티가 나면서도 고심한 흔적도 은근히 느껴지는 태도로 딱! 내놓은 가훈.
“슬기롭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
단어의 사전 정의를 보면, 슬기는 “사리를 바르게 판단하고 일을 잘 처리해 내는 재능”이다. 쓸모는 “쓸 만한 가치“라는 뜻이다.
학교에서 가훈을 적어 오라면, ”슬기롭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자“를 적어냈다. 어릴 때는 그런 가보다 하고 적었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려면, 능력치가 높아야겠군이라고 생각했다. 조금씩 머리가 커가면서 왜 쓰임이 있어야 하지라는 의구심이 들었다. 의구심이 커질 무렵부터 학교에서는 가훈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나와 Y, 그리고 호제. 이 세 명이 함께 살아갈 때 무엇을 떠올리고 살아가면 좋을까 고민에 빠졌다.
본가 가훈의 ‘쓸모’는 안 그래도 자본주의에서 이래저래 쓰이는데 굳이 가훈으로까지 정해서 쓰임을 당해야 하는가 싶어 참고하고 싶지 않았다. 쓰임이 많아야 가치가 높아지지만, 쓰임만 당하고 가치는 높아지지 않는 경우도 살면서 왕왕 봐왔으니까. 집에서 만큼은 쓰임이 없어도 존재만으로 귀한 사람이길 바라는 마음에서 본가의 가훈은 물려주지 않기로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가족 문화를 만들고 싶을까. 나, Y, 호제 셋은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만났지만, 우리 셋은 다르다. 비슷한 구석도 분명 있지만, 서로 뿜어내는 에너지, 취향 등 각자 지닌 색깔이 다르다. 그림을 그리면 3종류의 그림이 나온다. 카메라로 같은 곳을 찍어도 3종류의 사진이 나온다.
가족이라는 이유로 함께, 똑같이를 강요받기보다 이렇게 다름 속에서 자신의 색깔을 스스로 찾고, 다름을 인정하는 사람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내 색깔을 알면, 타인의 색깔도 궁금할 테다. 타인의 색깔도 알고, 내 색깔을 알면 색깔들이 섞였을 때 또 다른 색이 탄생하는 것도 알게 될 거다. 그렇게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지혜를 터득했으면 하는 희망으로 생각이 다듬어졌다.
예쁜 사람보다 아름다운 사람, 부티 나는 사람 말고 귀티 나는 사람이 되고픈 나로서 여러 단어를 떠올리다가 “아름답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나도, Y도, 호제도 아름다운 사람으로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는 소망이 샘솟았다. (가훈을 생각하기 전에는 아름다운 할머니가 되는 나만을 생각했다.)
아름답다에서 아름이 ‘나’를 뜻한다는 내용이 15세기 <석보상절>에 있다는 학설을 빌리기로 했다. 완성형, 종결의미의 ‘나답다’보다는 ‘나답게’라는 형용사를 써서 여기저기 붙일 수 있는 열린 단어를 쓰고 싶었다.
그래서 결정된 호제네의 가훈은 바로
”나답게“다.
그날 밤 침대에 호제와 함께 누워 ‘나답게’는 여기저기 붙일 수 있다며 문장을 서로 주고받았다.
“나답게 먹는다.”
“나답게 잔다”
”나답게 논다“
”나답게 똥싼다“ (까르르르르르르르)
“나답게 죽는다“
”어머, 그러게 호제야. 나답게 죽는다는 건 뭘까. 그게 가능할까. 나답게 죽는다는 건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 해보면서 호제다움을 찾아갔으면 좋겠어. 나다움을 알려면 이것저것 해봐야 발견할 수 있어. 금방 찾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어. 엄마도 지금 나다움을 다시 찾고 있어. 아빠도 나다움을 꼭 찾아서 아빠가 바라는 행복을 느낄 수 있길 엄마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어. 우리 잘 찾아보자.“
내 말이 끝나자 호제는 말했다.
”응. 졸려. 잘래. 책 읽어 줘.“
나답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