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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Dec 08. 2023

‘우리’라는 이름: 함께, 또 같이


드디어 제1회 서울시펜싱협회 단체전 대회날이다! 1-2학년 남자 에페는 총 6팀이 출전했다. 8강부터 시작한다. 뽑기를 통한 토너먼트 배치 방식이었다. 원장님이 뽑고 오셨다.


뽑기 결과는 같은 지점 2학년 팀과 1학년 팀이 8강부터 만난다. 2팀은 자동으로 4강으로 진출, 나머지 2팀은 8강에서 맞붙는다.


8강에서 지면, 탈락이다. 결승에서 만났으면 두 팀 모두 메달을 갖고 가는 거지만, 이제 같은 클럽이지만 한 팀만이 살아남는 대진표다.


다른 종목/학년 추첨결과도 호제네 클럽 출전 선수들에게 그리 쉽지 않은 결과였다. 피하고 싶은 선수가 있는 팀을 첫 대전부터 만나야 했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출발이었다.


‘도대체 운은 어떻게 움직일까. 오늘의 운은 누가 가지고 가는 걸까. 또 얼마나 큰 강인함을 주려고 하는걸까’ 싶은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역시 운이 전부가 아니었다. 운 없는 출발일지언정 운을 극복하는 순간, 운 좋은 출발이라도 운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결과. 이 모든 것이 곳곳에서 나타난 하루였다.






9시부터 시작하는 경기에서 호제는 바로 집에 가게 될까, 조금 더 경기장에 머물게 될까. 오늘 호제에게는 나름의 목표가 있었다.


체육관 출입구를 들어갈 때즈음 호제가 말했다.


“엄마, 오늘은 oo(같은 팀 친구)의 첫 메달 따는 날이 될 거야. 나 그렇게 할 거야! “ 라며 스스로 결의를 다지며 경기장에 들어왔다.


2학년 팀과 붙는다는 걸 안 1학년 팀은 긴장보다는 그저 신나고 즐겁고 열의에 넘친다. 생기발랄한 초등학교 1학년 생이다.






8강이 시작했다. 점수가 엎치락뒤치락 1점을 오고 가며, 앞서 가다 뒤쳐지다를 반복했다. 도무지 누가 이길지 짐작이 안 되는 경기였다.


호제가 찔리면, 같은 팀 다른 선수가 메워줬다. 같은 팀 다른 선수가 찔리면 호제가 실점을 만회하기를 반복했다.


1학년팀, 2학년팀, 각 팀에 선수가 3명씩 구성됐다. 한 명당 상대편 3명과 모두 경기를 뛰고, 뛸 때 4점까지 낼 수 있다. 최대 점수는 36점. 36점을 먼저 내거나, 종료시간에 점수를 많이 낸 팀이 이긴다.


1학년 팀은 자기 팀 선수가 나갈 때마다  선생님과 손을 모으고 “파! 이! 팅!”이라 외치며 손을 한껏 하늘로 치켜올렸다. 한 번도 빼먹지 않고 9번을 내내 외쳤다. 그것도 아주 큰 소리로. 체육관에서 누가 소리 지르는가 싶을 정도로.


결국 1학년팀이 이겼다. 경기가 종료된 뒤, 1학년과 2학년이 서로 인사를 하고 포옹을 했다. 내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서로를 찔러대다가 안고 또 안는 모습이 너무 대견했다. 온 힘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패배를 인정하는 형아들도, 형아들을 부둥켜안는 동생들도. 이토록 순도 높은 진정성을 직관하다니. 영광이었다.


인사를 끝낸 호제팀 아이들은 서로 어깨를 부둥켜안고 기뻐했다. 호제는 소리를 지르며 슬라이딩하듯 무릎을 구부린 뒤, 체육관 천장을 향해 외쳤다.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기쁨에 포효하는 호제 (photo by @youhannlax)





4강에 진출했다. 만만치 않은 상대가 떡하니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지점 2학년 형들. 호제를 비롯해 같은 팀 선수들이 모두 최소 한 번 즈음 만나 형들에게 졌던 경험이 있다.


역시나 쉽지 않았다. 8:4의 상황에 호제가 들어갔다. 호제가 갑자기 호랑나비처럼 몸을 파닥파닥 거리더니,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호제는 8점을 따냈다. 역전을 만들었다. 3세트였기에 최대 12점까지 점수를 낼 수 있다.


아직 24점이 남았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나머지 두 선수도 더욱 열심히 뛰었다. 호제가 찔려 점수를 쌓지 못하면, 다른 선수가 역전하며 나가줬다. 9세트 때, 호제팀의 마지막 선수가 어려운 상대 선수를 대상으로 득점을 따냈다.


9번 등판을 할 때마다 1학년 팀은 선생님과 함께 모두 모여 손을 모으고 “파! 이! 팅!”을 외쳤다.


결국 막강한 2학년팀을 이겼다.

결승 진출!






결승 상대편에 또 2학년 형들 팀이 올라왔다. 심지어 잘하는 2학년 형들을 비롯해 4명이 한 팀을 이루고 있었다. 8강을 뛰지 않고 4강 직행 후 결승을 온터라 에너지도 충만해 보였다.


그에 반해 호제네 팀은 힘이 빠져 보였다. 그래도 열심히 외쳤다. 피스트에 9번 오를 때마다 “파! 이! 팅!!!!!! “


힘겨운 경기를 끝내고 오면 어깨도 쳐주고, 뭐라 서로 말도 하고. 셋 모두 차분히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진심을 다해 뛰었다. 경기 종료까지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관중석에서도 느껴졌다. 경기가 끝나갈수록 소리는 지르지만, 의자에 앉아 대기하는 뒷모습이 이미 지쳐 보였다. 에너지가 많아 빠져 보였다. 셋 모두.


결국 결승에서 졌다.


경기를 종료하고 상대편 선수와 한 명씩 악수를 나눴다. 악수를 안 한 사람이 있으면 그쪽으로 이동해 악수를 나눴다. 같은 팀 친구는 심판에게도 공손히 꾸벅 인사했다.


그렇게 호제네는 은메달을 획득했다. 아침에 호제가 예언하고 다짐했던 목표를 달성했다. 같은 팀 친구의 첫 메달 획득이 이뤄졌다.






개인전에서는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던 기운이 단체전에서는 아주 또렷이 드러났다. 예사롭지 않은 몇몇 팀들이 보였다. 기세등등하다는 표현이 절로 떠올랐다. 호제팀은 세상 진지, 귀염뽀짝, 신남 에너지의 대방출이었다.


한 팀의 에너지가 아주 인상적이었다. 팀의 모든 선수가 각종 대회에서 메달을 석권했다고 한다. 경기장을 걸어가는 모습도, 몸을 푸는 모습도, 경기 시작 전 소리 지르며 마스크를 쓸 때도, 득점을 하고 주먹을 불끈 쥘 때도, 실점을 하고 소리를 지를 때도 차분한 무게감이 있되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감이 느껴졌다. 어린 학생이라고 할지라도 마음가짐, 쌓아왔던 시간이 뿜어져 나오는 건 막을 수 없다.


날카로운 살벌함은 아니지만, 진지하게 임하며 해내고야 말겠다는 묵직한 자세가 팀 선수 모두에게서 보였다. 오히려 날카로웠으면 날카로움을 자극해 심리전이라도 가능해 보였을 텐데, 자극을 느낄만한 마음의 융모는 이미 훈련으로 모두 깎고 와서 어떤 자극도 무던히 넘어갈 것 같았다.


이제 고작 12년을 살았을 텐데, 대단한 기운이었다. 촘촘히 쌓아왔을 시간, 마음고생했을 시간, 자신은 물론 주변의 노력도 감히 짐작해 봤다. 무엇보다 혼자가 아닌 함께가 되니 에너지가 배가 되었을 테다. 서로 경쟁자이자 응원자로 함께 성장하고 있는 모습에 초면이지만, 응원하고 싶어졌다.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파이팅!


아침부터 끝날 때까지 체육관 곳곳에서 파이팅이 울려 퍼졌다. 피스트 위에서, 관중석에서. 살면서 이렇게 많은 파이팅을 외쳐봤나 싶을 정도였다.


온 기운을 모아 나가는 동료 선수에게 실어주는 일. 나를 믿고, 너를 믿고, 우리를 믿는 일. 함께 공동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일.


협력이 중요하다지만, 개인 경쟁이 만연한 사회에서 이 날만큼은 ”우리“와 ”함께“가 가득했다.


내가 부족하면 동료가 메워주고, 동료가 부족하면 내가 메워주고 서로를 격려해 주는 경험들. 서로 부둥켜안고 위로하고, 축하를 나누며 느꼈을 피부의 촉감과 마음의 촉감.


살면서 서로 부둥켜안는 순간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래서 더 소중한 이 날의 경험. 내가 속한 우리와 내가 속하지 않은 우리 모두를 존중하는 마음.


“우리”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웠던 날. 이 날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힘이 되길 바란다. 호제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말했다.


“우리가 해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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