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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Dec 18. 2023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메달을 딸 줄 알았다. 그러나 메달을 못 땄다. 12월 16일, 인천 선학경기장에서 개최한 동아펜싱대회에서 호제는 8강에서 떨어졌다.






동아펜싱대회는 여느 대회와 다르게 유치부, 학년별로 진행했다. 1학년은 1학년끼리. 같은 학년끼리만 시합하는 규칙이었다. 유치부, 학년별 칼길이도 딱 지정했다. 아주 공정한 규정이었다.


1학년 펜싱활동의 마지막 정점을 찍고, 마무리할 수 있는 기회라고 호제는 생각했다. 심지어 같은 지점에 잘하는 친구가 출전하지 않아 메달 획득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나도 호제에게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메달을 당연히 딸 줄 알았다.


1학년 남자 에페에는 총 10명이 출전했다. 예선전 경기에서 이기면 화정 선생님께 달려가 안기는 세리머니를 하기로 약속했다. 호제는 예선전에는 화정 선생님과, 결승전에는 요셉 원장님과 시합에 가기로 했다. 이미 호제는 당연히 결승을 갈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그랬다. 예선전 경기를 보고,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제도, 나도 오만한 태도였다. 모든 경기가 끝난 뒤에야 알았다. 자만이자, 교만이자 오만이었음을.


* 자만: 자신이나 자신과 관련 있는 것을 스스로 자랑하며 뽐냄.
* 교만: 잘난 체하며 뽐내고 건방짐.
* 오만: 태도나 행동이 건방지거나 거만함. 또는 그 태도나 행동.




예선전 경기가 시작했다. 첫 경기는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3:4로 패했다. 분함이 반대편 관중석에서도 보였다. 눈과 몸에서는 긴장, 분함이 섞인 레이저가 뿜어져 나왔다.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경기에서는 다양한 기법으로 4:1, 4:0, 4:1의 승리를 거뒀다. 어깨도 찌르고, 몸통도 찌르고, 달려가 찌르기도 하고. 시합이 빠르게 끝났다. 예선전 2등으로 8강에 진출했다.


예선전 7등을 기록한 선수와 8강에서 만났다. 경기가 시작했다. 호제가 공격을 시도해 첫 득점을 따냈다. 1:0. 또 달려가더니 동시타 불이 켜졌다. 2:1. 또 공격하러 가더니 호제가 찔렸다. 2:2.


호제는 반복해서 앞서 가서 공격을 했다. 동시타. 동시타. 동시타. 동시타가 이어졌다.


이 모습을 함께 지켜본 요셉 원장님은 “아이고, 호제가 공격만 너무하네요.“라고 말했다. 말하기 무섭게 호제는 또다시 공격을 하러 앞으로 나갔다. 또다시 똑같은 자세로 팔을 뻗었다.


그렇게 경기 시작부터 매번 먼저 공격하러 가서, 똑같은 자세로 9:9 동시타를 만들었다. 이제 마지막 1점을 가져가는 자가 승자다. 마지막도 똑같은 자세로 또다시 앞으로 돌진했다. 호제가 팔을 펴는 도중, 상대편 선수는 별 움직임 없이 팔을 먼저 폈다. 호제의 뚜슈. 호제가 찔렸다. 9:10. 호제는 졌다.


10번을 내리 똑같은 자세로 앞으로 나가 찌르고 찔렸다.




경기가 끝난 뒤, 호제는 울었다. 경기장을 떠나지 않고 화정 선생님 품에 안겨 수 분을 울었다. 약속했던 포옹의 세리머니는 패배 포옹으로 바뀌었다. 상의 경기복도 하나 벗고 피스트를 바라봤다. 지금껏 나갔던 대회 중 가장 오래 경기장 피스트를 바라보다 관중석으로 올라왔다. 9:9라 적힌 점수판을 보고, 호제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관중석으로 복귀한 호제는 나를 보자 얼굴이 일그러지며, 두 팔로 내 허리를 꼭 감았다. 얼굴을 내 배에 파묻고 울었다. 나는 호제 등을 토닥이며, “정말 잘했어. 엄마는 호제 자랑스러워.”라고 말했다.


울어서 눈은 금세 퉁퉁 부어올랐다. 속상함과 분함, 슬픔에 입은 뾰로통하게 툭 튀어나왔다. 옷을 갈아입고, 요셉 원장님과 화정 선생님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안녕히 계세요.”라고 호제는 말했다. 요셉 원장님은 호제에게 이리 와보라고 말한 뒤, 다리에 앉히고 이런저런 얘기를 해주셨다.


경기가 남은 같은 지점 선수들에게 힘이 쭉 빠진 “안녕”을 건네며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호제는 길이 아닌 눈 덮인 곳을 마구 걸어갔다. 나무를 사이에 두고, 나를 발견하지 못했다. 나를 잃어버린 줄 알고, 뒤돌아 뛰어가다 나를 발견했다. 그러고는 짜증 섞인 말투로 ”엄마!!“를 외쳤다.


말랑 할머니와 외할아버지가 있는 쪽으로 향했다. 말랑 할머니 품에 안겨 또 한 번 위로를 받았다. 호제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차 안에 타자 호제는 조용히 해달라며, 대화금지령을 내렸다.






차이나타운으로 가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호제는 난 안 먹을 거라고, 이번에 정말 먹을 수가 없다고 외친다. 차이나타운에 도착해서 호제는 못 이기는 척 옷을 챙겨 입고 내렸다.


<연경>이라는 중국음식점으로 갔다. 잠깐의 웨이팅을 한 뒤, 4층으로 이동했다. 호제는 외쳤다.


“나는 탕수육!”


호제의 외침에 한시름 놓았다. 그러고는 “나 방학 때 펜싱 100번 갈 거야. 1000번 갈거야.”를 말한다. 그러다 진 게 생각났는지 시무룩해졌다가,  탕수육을 아주 맛있게 혼자 거의 다 먹었다.


말랑 할머니, 외할아버지는 “호제 덕분에 인천 차이나타운도 오고,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네.”라고 말했다. 식사를 하고 나오자, 호제는 차가운 칼바람을 맞으며 펜싱 스텝을 밟으며 이동했다.






차 안에서 호제와 나는 잠들었다. 우리가 자고 있는 동안 외할아버지와 말랑 할머니는 눈길과의 사투를 벌였다. 내가 먼저 깼다. 호제 외할아버지, 그러니까 나의 아빠가 말했다.


“이번 경기를 보니, 호제가 혼자 다가가서 찔리더구먼. 다른 전략도 쓰고, 다른 기법도 해야 하는 거 아닌가. 누군가가 얘기해줘야 하지 않을까.“


나는 말했다.

“응, 이번에 호제가 마음이 조급했어. 긴장도 했지만. 다급했어. 그리고 그건 요셉 원장님과 화정 선생님이 아까 말씀해 주셨어. 레슨 받을 때 여러 기법도 배우고. 마음 쓰는 거, 호제가 연습해야지. 스스로 극복해야지.”


갑자기 호제 목소리가 들렸다.

“할아버지, 나 다 들었거든!”


호제 외할아버지이자 나의 아빠는 미소 지었다. 웃으며 내가 말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아빠가 말해줬네. 다른 사람이 말해줄 필요가 없네.”






내가 이어 말했다.

“세상에는 당연한 게 없는 것 같아. 당연함을 바랐던 게 아니었을까 돌아보게 돼. 세상에는 그런 게 없는 데 말야.”


이어서 말랑 할머니가 이번 경기를 보며 많은 걸 배웠다며, 명언을 쏟아냈다.

“그래. 당연한 건 아무것도 없어. 당연히 메달 딴다는 마음은 버리고 임해야 해. ‘나는 당연히’라는 건 없어.


‘이긴다’와 ‘할 수 있다’는 다른 거야. 이길 거야! 가 아니라 집중해서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씩 하나씩 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거지. 매 순간 집중을 해야 해.


그리고 당연하다는 건 나를 챙기는 게 아니야. 나에게 당연히 오는 건 없어. 노력을 해야지.“


나는 맞장구쳤다.

”상대방 선수에 대한 예의도 아닌 것 같아.“


엄마는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야. 살아보니 그렇더라. 자만인 거지. 나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건 없어.”




정말 이 세상에 당연한 건 없다. 한 땀 한 땀 쌓는 노력과 정성만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좋은 결과가 오면 감사한 일인 거고. 아니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그저 나아갈 뿐.


호제는 이걸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나 방학 때 1000번 갈 거야! 1000번! 을 계속 외쳐댄다. 백 번에서 천 번으로 늘었다. 천 번, 꼭 가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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