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제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로 살아가기
2023년이 시작했을 무렵의 토요일 주말 오후, 호제와 동네 한 바퀴 나들이를 끝내고 집으로 향했다. 호제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문이 열리자 호제가 나에게 질문했다.
“엄마!”
“응?”
“포항 할아버지는 집에 혼자 들어가?
할머니가 나한테 오면?“
“그렇지.”
나의 본가는 포항에 있다. 외가, 친가 할아버지, 할머니를 살고 계신 지역명을 붙여 부르고 있다.
“집에 들어가면 아무도 없겠네? 혼자겠네? 좀 그렇겠다.”
“응. 말랑 할머니가 여기 오면, 집에 할아버지 혼자 계시지. 혼자 밥 챙겨 먹고, 혼자 청소하고, 빨래하고. 우리 감사한 마음을 가지자!“
초등학교 1학년 어린이, 호제는 아가 같을 때는 한 없이 아가아가한데, 이럴 땐 또 한 없이 어른 같다.
이런 순간을 마주할 때면, 나이로써의 어린이와 어른의 구분보다 보이지 않는 이면을, 나와 연결된 타인을 얼마나 떠올릴 수 있느냐에 따라 사람다움이 결정되는 건 아닐까 싶다.
2023년 봄의 호제는 ‘말랑 할머니의 인생 시간’을 생각하기도 했다. 말랑 할머니가 하루 일찍 포항으로 간 날이었다. 내가 호제의 등하원을 맡은 날이기도 하다.
마지막 학원 하원을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호제가 갑자기 질문을 했다.
“엄마!”
“응?”
“말랑 할머니는 자기 인생 시간을 나한테 지금 주고 있는 거야? 할머니 하루 시간 중 아침 점심 저녁을 다 나한테?“
“그렇지. 다른 걸 할 수 있음에도 호제를 봐주러 와주시지. 너무 고맙게도 할머니는 호제를 봐줄 수 있어서 너무 고마운 시간이라고 말씀해 주셔. 하지만 힘들 때도 너무 많으실 거야.“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눈동자로 호제는 나를 쳐다봤다.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한 사람의 삶에는 다른 누군가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다. 한 아이의 성장에도, 한 어른의 성장에도 나 홀로 쌓는 시간은 없다.
2023년 12월이 끝나갈 무렵, 호제는 말랑 할머니에게 천 원을 툭 건넸다.
“할머니!!!! 내가 할머니한테 천 원 줄게.”
“왜?”
“1년 동안 호제 잘 봐줘서…..고마워서.“
호제가 집안 일하고 번 용돈 주머니에서 천 원을 말랑 할머니에게 건넸다. 용돈 주머니 속 돈은 말랑 할머니가 집안일을 할 때, 옆에서 소소하게 거든 호제에게 말랑 할머니가 노동의 대가로 준 천 원들이었다.
용돈 주머니는 호제가 이면지를 접어 만들어 레고 다이어리에 붙여놓은 것이다. 옆면에는 자기가 한 일과 금액이 적혀있다. 일종의 장부, 통장인 셈이다.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천 원을 꺼내 말랑 할머니에게 줬다는 건, 아주 획기적인 일이었다. 그만큼 말랑 할머니는 호제가 건넨 천 원의 가치를 알고 있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천 원을 말랑 할머니는 (말랑 할머니의 표현을 빌리면) 고이 따로 모셔두었다.
호제의 외할머니, 외할아버지로 살아가는 일상. 고되기도 할 테지만, 말랑 할머니와 포항 할아버지는 결국 나와 Y, 호제, 세 가족이 가족으로서 안정감을 느끼며 살았으면 하는, 언어로는 도무지 표현되지 않는 넓디넓고 깊은 마음으로 오늘도 각자의 자리에서 시간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