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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예지 Feb 23. 2024

엄마, 항복해


어랏! 사진첩에 내가 모르는 영상이 있다. 난 찍은 적이 없는데 누가 찍은 걸까. 영상을 눌렀다.

흰색 메모지에 연필로 무언가를 적는 호제 손이 나온다. 종이와 연필이 만나며 스스슥 소리를 냈다. 내가 그릇 정리하는 소리도 같이 들린다. 스스슥, 달그락 달그락.  


적고 있는 내용은 이거였다.

"엄마 항복해 안이면 창문에다 붙ㅇ.."

(아들아, 맞춤법 좀...)


얼씨구. 후반부로 가자 “아~씨! 진짜!”라는 육성이 흘러나온다. 왼손에는 촬영하는 스마트폰을 쥐고, 오른손으로 글씨를 쓰다 보니 맘대로 잘 안 써졌나 보다.





사건의 발단은 숫자 50개 쓰기였다. 겨울방학 아침 루틴이 있다. 밥을 먹고 해야 할 것들을 하고, 8시 45분에 집에서 나가 펜싱장으로 향한다.


이 날 해야 할 것들이 평소보다 빨리 끝났다. 나는 해야 할 것 중 마지막인 숫자 50개 쓰기를 마무리하자고 했고, 호제는 안 할 거라고 했다. 평소 말랑 할머니와 할 때면 시간이 있어도 숫자 쓰기는 자주 남겨놓곤 했다.


생각하는 문제도 아니고, 집중하면 3분 이내로 할 수 있는 단순작업이기에 더욱더 미루지 않길 바랐다. 미루는 습관보다 마무리하는 습관이 들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나는 이미 숫자 쓰기 전부터 심기가 불편했다. 식탁에 앉아 할 것들을 하는데, 이 날 한 문제 끝날 때마다 거실로 가서 비닐 공을 찼다. 들썩이는 호제 엉덩이에 화가 났다. ‘그래, 나도 집중력이, 주의력이 떨어질 때가 있지. 그럴 수 있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5분 타이머를 돌리기를 반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제 엉덩이가 유난히 들썩거렸다.


마지막에 남은 숫자 쓰기를 하지 않겠다고 호제가 선언했다. 그래도 해야 할 건 해야 한다고 말했다. 육아하다 보면 이런 순간이 매우 곤혹스럽다. 일관성 있게 원칙을 갖추되 유연성을 가지라는 조언을 생각하면, 지금 순간은 유연성을 가져야 할 때인가, 일관성을 갖춰야 할 때인가.






나랑 아침을 보내는 날만큼은 내가 더욱 단호하게 밀고 나가야겠다 싶었다.


"시간이 충분해. 해야 할 건 마무리하고 가는 거야. 할 수 있을 때 해야 하는 거야."

"싫어. 나 안 할 거야."


비닐 공을 뻥뻥 차면서 얘기한다. 이강인이 한 순두부 챌린지라며 깐족거린다. '어때, 나 잘하지'의 에너지를 뿜으며.






‘해라 - 안 할 거다’의 반복. 이때 되면 그렇게 외웠던 아이에게 예쁘게 말하는 문장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여러 번의 실랑이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나와 호제와의 문제가 된 듯했다. 그래서 난 원칙만 얘기하고 빠지기로 했다.

"나는 나의 숙제를 할게. 호제는 호제 숙제를 하고, 나갈 준비를 한 뒤, 현관 앞에서 8시 45분에 만나자." 라고 얘기했다.


"안 할 거야! 난 안 해! 엄마, 포기해!"라고 외친다.

"호제야, 이건 내가 포기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호제의 일이야. 호제 인생이야. 내 숙제가 아니라 호제 숙제야. 숫자 쓰기를 하면 누구한테 쌓여? 나한테 쌓여? 엄마 숙제가 없어지는 게 아니야. 호제한테 쌓이고, 호제께 되는 거잖아. 자기껀 자기가 마무리하고 가는 거야. 안 그러면 갈 수 없어.“


거실 매트에 대자로 뻗었다가, 침대방으로 갔다가, 비닐공을 차다가를 반복했다.

나는 다시 얘기했다.


“해야 할 것을 하고,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거야.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어. 숫자 쓰기를 끝내야 오늘 아침 펜싱수업을 갈 수 있어. 나는 내 숙제를 할 테니, 호제는 호제 숙제를 해.”


설거지를 하러 뒷베란다로 이동했다.






이상하다. 더 이상 비닐공을 차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뒷베란다 문 사이로 슬쩍 보니 식탁 의자에 앉아서 무언가를 적는 호제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 이제 마무리 하나보구나. 휴...’라고 생각하던 참에 호제가 싱크대 상부판에 쪽지를 올려두고 나갔다.


휘갈겨도 이렇게 휘갈길까 싶은 글씨체로 적은

“그만해라 함복해”.

이때 “엄마 항복해 안이면 창문에다 붙ㅇ..“도 함께 적었나 보다.


ㅁ으로 보이는 ㅇ을 적어둔 쪽지였다. 속이 더 타올랐다. 결투 신청인가. 말리지 말자, 말리지 말자를 되뇌었다. 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내 마음속에서는 활화산이 터졌지만 말이다.




설거지를 끝내고 나왔다. 시계는 8시 40분을 가리켰다. 몇 번의 실랑이 끝에 호제가 “아, 증말!”이라고 하면서 8시 45분에 바닥에 엎드려 숫자를 써 내려갔다. 50 단위의 숫자를 모든 쓴 채 노트와 연필을 들고, 식탁에 휙 하고 거세게 내려놓았다.

"화날 수 있지만, 화난다고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야."

시계는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엄마 때문이야'가 온 집안을 가득 메웠다.

"엄마 때문에 늦었잖아!“


나는 차분히 단호하게 말했다.

"나 때문이 아니야. 스스로 때문이지. 내가 안 한 게 아니라 호제가 스스로 안 한 거야. 이건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호제 일을 본인이 안 한 거야. 안 하겠다고 하는 시간에 했으면 이미 끝내고, 놀고, 여유롭게 갔을 거야.

난 나갈 준비 끝냈으니까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마음이 급해진 호제는 울먹이며 짜증을 내며, 재빠르게 옷을 갈아입느라 분주했다. 고양이 세수와 양치인지 이에 치약 갖다대기인지 분간이 안 되는 양치를 한 뒤, 현관으로 나왔다.

여전히 나를 보고 성질을 부렸다.

"엄마 때문에 늦었잖아!!!!!!!!"

난 다시 반복했다.

"본인이 본인 시간을 어떻게 썼나 생각해 봐. 숫자 쓰기는 나의 일이 아니야. 호제한테 쌓이는 일이지."




밖으로 나갔다. 빠르게 걸었다.

"결국 해낸 호제, 축하해! 대견하다! 엄마도 하기 싫은 일 많아. 누워만 있고 싶을 때도 있고, 출근하기 싫을 때도 있고."

"그럼 가지 마. 출근 안 하면 되지."

"그럼 약속을 어기는 거야. 신뢰가 깨지는 거지. 그럴 땐 그냥 하는 거야."

마침 2월 원비 결제 날이었다.

"호제야, 본인이 할 걸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만 하려고 하면, 펜싱 다니는 걸 지원해 줄 수 없어. 하고 싶은 걸 하기 위해 하기 싫은 것도 해내는 힘을, 습관을 길러야 해. 우선순위가 있어. 앞으로 잘 해낼 수 있지? 오늘 수업하면서 한 번 생각해 봐. 그리고 얘기해 줘. 호제가 마음을 먹으면 엄마는 이따 펜싱 2월 수업을 결제할 거야. 결정하지 않았으면, 엄마는 이따 결제할 수 없어."

"2월에도 펜싱 할 거야?"

"응."

"그럼 약속할 거지?"

"흥!!!!"이라 말하며 고개를 휙 돌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대신 전속력으로 달렸다. 나도 같이 달렸다. 결국 8시 57분 세이프!





ᅠᅠ

펜싱수업이 끝날 때즈음 다시 가니, 아주 평온하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호제가 수업을 마치고 나온다. 온탕과 냉탕을 순식간에 오고 가는 호제. 여전히 낯설다. 엄마와 하기로 한 약속을 할 거냐는 물음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펜싱 2월 수업료를 결제했다.ᅠ

원장님이 호제가 오늘 칼 들고 팔이 아플 법도 한데 아프다는 소리 없이, 힘들다는 소리 없이 잘 끝냈다고 말씀 주셨다. 심지어 영상을 보니, 집중력 최강이었다.

안 할 거라고, 항복하라고 메시지를 적던 호제는 단 1그램도 보이지 않았다. 오늘 아침에 실랑이한 이야기를 원장님께 전했다. 참고 견디는 힘을 길러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도 함께 건넸다.






세상살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보다 하기 싫은 걸 해야 하는 게 훠어어어어얼씬 많다.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려 해도 하기 싫은 순간들을 쌓아야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다. 무엇보다 해야 할 것을 피하면 나중에 제곱근, 세제곱근이 되어 제대로 된 복리 효과를 가지고 나에게 부메랑처럼 돌아온다. 그래서 ‘그냥 하는 거야’를 호제가 익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뭐, 나도 마찬가지다.

아침에 결국 마무리하고 가서, 온전히 노는 시간을 충분히 확보한 하루. 펜싱에서 힘들어도 참고 했던 경험을 기억하며 할 거 집중해서 빡!!! 해보자.


그리고 호제야,

엄마는 항복 안 할 거야. 항복의 문제가 아니니까.

메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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