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베를린 6일의 기록
2016년 5월 12일부터 17일까지 독일 베를린 6일의 기록.
편지를 쓰는 일이란 무겁다. 판판한 곳에 편지지를 뉘일 곳을 찾아야 하고, 주변의 소음이나 사람들에 의해서 주의가 분산되지 않을 정도의 환경에 놓여있어야 하며, 글이 생각을 앞서가고 마는 실수를 방지하기 위해서 손이 시작하기 전에 머릿속으로 먼저 소리 내어 읽어보는 편이 좋다. 편지를 쓰는 대상과의 첫 만남부터 시작하기 쉬우며, 그렇지 않다 해도 대개 함께한 시간이, 우리가 함께 통과해낸 시간이 통째로 오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슬픔이나 쓸쓸함 같은 감정적 소모에 대해서도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한다. 이따금씩 이런 감정들은 순간의 마음 상태에 그치지 않고 영원할 수 없는 우리네들의 필연(Mortality)에 대한 상기로까지 이어져, 그래서 온 마음으로 짧거나 긴 너와의 시간을 맞선다는 것은 참으로 기진한 일임을 알기에, 나는 미적거리기 일쑤다. 그러니까 편지 쓰기를 미루는 것에 대해 '귀찮아서'라는 닳은 수식어와 함께 개인의 성격 탓으로 해버리기에는 어딘가 애달프다.
여행기라는 것이 편지와 성질은 달라도 닮은 구석이 있어서, 한 번 추억하기 시작하면 처음과 끝 그리고 사이의 유한하고도 무한한 시간이 달려든다. 사진을 한 장씩 정리하면서 단편적으로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시간들에 순서를 놓고, 그 날의 아침에 들이마신 찬 공기, 머리에 내리쬐던 햇빛의 온도, 눈 감으면 손에 닿을 듯한 그때와 그곳 그리고 너를 떠올리고 나면 따뜻하게 행복한 마음의 끝에 시리게 서글픈 마음이 찾아든다. 그래서 나는 여행의 시간은 덮어버리고 꺼내어 볼 엄두도 내지 않거나 추억하는 일을 중도에 포기해버리고 만다. 항상 1편으로 끝나는 나의 도쿄 여행기들처럼.
추억하지 않는다고 해서 시간이 모조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돈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을 뿐이며, 더 빨리 잊힐 뿐이다. 편지를 쓰는 일은, 그리고 여행기를 쓰는 일은 비록 우리를 시간의 비영속성에 좌절하게 만들지언정, 그 시간에 대한 우리 기억에 힘을 더해줄 것이다. 많은 시간이 흘러 그 순간들의 기억 자체는 사라지고 대신 그 순간을 추억하던 순간의 기억만 자리에 남는다고 할지라도, 곱씹어지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사라져버리는 일만큼은 면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지나간 시간을 마주하는 일을 포기해버리고 싶은 충동을 삭인다.
비 오는 날 그리고 아침 일찍이라는 베를린 동물원의 최상의 방문 조건을 어디에서인가 주워들은 적이 있어, 토요일 아침 개장 시간에 맞춰 서둘러서 동물원으로 향했다. 웰컴 카드로 할인받아 입장료는 €13 대신 €9.75 지불. 비 대신 우리는 늦 봄에 어울리지 않는 칼바람과 싸워가며 동물원 구경을 했다. 말없이 의젓한 짐승들이랑 텅 빈 같은 공간에서 밝아오는 해를 보며 함께 찬 아침을 견디니 오묘한 기분이 들었다. 베른 동물원에 비해서 동물들과 방문객들 사이의 경계가 훨씬 분명했는데, 다른 생김의 생명체 구경이 신기하기는 했으나 내 방문이 이들을 가두는데 기여한 것이니 몹쓸 짓을 하는 듯한 기분에 씁쓸함이 몰려왔다. 특히나 전체 건물이 울리도록 서럽게 표효하는 사자를 봤을 때는 죄책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는데, 이 생각도 곧 고양이를 20배로 확대해놓은 듯한 사자의 외관에 예의 고양잇과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그 야성에 경외감을 느끼면서 잊히긴 했다. (요새도 가끔 우리 고양이랑 누워서 눈을 마주치면 이때 느꼈던 유사함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흠칫 졸곤 한다.) 동물 구경도 구경이지만 카페테리아의 와플이 참 맛있었다. 커피는 참 달았고. 지금 떠올려보니 춥고 배고플 때는 뭐든지 맛있긴 하지.
팁, 구글 지도에서 동물원 같은 관광지 말고도 레스토랑, 카페 등의 이름을 검색하면 요일별 그리고 시간대별 방문자 정도를 피크 시간대에 비교해서 보여준다. 나처럼 사람이 북적이는 곳을 싫어하거나 오랫동안 줄을 서고 싶지 않은 이들이라면 미리 검색해서 피크 시간대를 피해갈 것을 추천.
소시지 위에 칠리소스를 듬뿍 올리고 감자튀김과 곁들여져 나오는 커리부어스트는 베를린 여행의 시작부터 끝까지 우리의 관심사였는데, 비가 오건 바람이 불건 배가 고프건 고프지 않건 우리는 언제나 커리 부어스트를 먹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가려던 카페의 웨이팅이 너무 길거나 갑자기 날씨가 추워지거나 혹은 그냥 이제 어디 갈까?라고 물을 때에도 여행 동반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커리부어스트를 외쳐대곤 했다.) 동물원 구경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 들어가면서 눈여겨봤던 Zoologischer Garten역 광장의 커리부어스트를 먹었다. (입구와 출구가 달라 크게 동물원을 한 바퀴 돈 것은 함정.) 늘 먹던 껍질 있는 소시지 (밋 담, Mit Darm) 대신 껍질이 없는 소시지(오네 담, Ohne Darm)로 먹어서 그런지 기대보다는 맛이 덜했다. (우리가 갔던 곳 중 최고의 커리부어스트 맛집은 알렉산더 플라자 주변의 커리61로, 다음 연재에서 기꺼이 상세하게 설명할 예정.)
그리고는 바로 옆의 티어가르텐에서 토요일마다 여는 골동품 시장을 향했다. 바로 옆이라지만 워낙 동물원은 물론 티어가르텐 자체도 매우 커서 전철로 이동해야 했다. 접시부터 옷, 장신구, 가정용품, 타자기, 등 한 데 분류할 수도 없는 온갖 골동품들이 죄다 모여있다. 정말 마음에 드는 목걸이 펜던트를 발견해서 가격을 물으니 '금일 지도 모르니까, 20유로야.'라고 상인은 불확실한 표정으로 대답해주었다. 당황해서 '아니 그럼 너도 지금 금인지 아닌지 모르는데 20유로나 받겠다고?'라고 묻자 다시 한 번 곤란한 표정으로 금일지 모른다는 가능성을 내게 전해주며 15유로까지는 깎아주겠다고 했다. 나를 논리에서 아득한 이 흥정에서 구해내 준 여행 동반인이 없었다면 금일지 아닐지 모르는 가능성을 비싼 비용으로 구매할 뻔했다. 물욕이 별로 없는 나지만 이런 골동품들을 보면 물건이기 이전에 내가 살지 않은 과거의 시간이 형태를 지닌 어떤 물체가 돼서 떡 하니 놓인 것 같아 정신이 혼미해지곤 한다.
베를린이 젊은 예술가의 도시라는 한 꺼풀 아래 여러 차례 비극을 겪은 독일이라는 나라의 수도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는 때가 있는데, 철거되지 않은 베를린 장벽들을 지나칠 때가 바로 그런 때다. 위 사진은 베를린에 장벽이 남아 있는 네 곳 중 하나인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으로, 밖에서는 흉하게 속내를 드러낸 철근 콘크리트의 장벽을 보다가 (박물관) 안에서는 나치즘이 어떻게 세력을 형성하고 테러를 행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존재만으로 죽어야 했던 유대인들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정말 참담하고 무력해지는 일이었다.
테러의 토포그래피 박물관은 체크포인트 찰리의 근방에 있다. 베를린은 분단 후 프랑스, 영국, 미국 세 국가에 의해 신탁통치를 받게 되었고 이들 국가가 통치하는 구역의 국경마다 검문소가 설치되었는데, 세 검문소는 북쪽부터 순서대로 프랑스는 알파(A), 영국은 브라보(B), 미국은 찰리(C)로 불렸다. 미국 관할 구역의 검문소 체크포인트 찰리는 통일 후 철거된 것을 복원한 것이다. 체크포인트 찰리의 바로 건너편에는 베를린이 장벽으로 동/서로 나뉘게 된 역사와 관련한 야외 전시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벽돌과 철조망이 전부였던 국경이 10차선의 거대한 국경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목숨을 걸어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동-서 베를린 간 탈출 시도가 있었던 것은 외교관, 군인 등 동-서 베를린 간 통행이 가능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탈출은 지인으로부터 조달받은 미군의 군복으로 위장하는 것부터 시작해, 통행증이 있는 사람의 자동차 트렁크, 심지어 조수석 바닥에 숨는 것까지 여러 형태로 시도되었고, 물론 과정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도 있다.
무거운 마음을 뒤로하고 오늘의 마무리를 위해 향한 곳은 집에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버거마이스터. 자세한 정보는 여행자로그2 아래 크로이츠베르크 베이커리/레스토랑 리스트 참고.
▼ 베를린 여행자로그1
https://brunch.co.kr/@yejinchoi/4
▼ 베를린 여행자로그2
https://brunch.co.kr/@yejinchoi/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