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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활여행자 Jun 19. 2016

베를린 여행자로그5

독일 베를린 6일의 기록

베를린 거리를 걷다가 우연찮게 아래를 내려다보면 무수한 고리의 눈동자들이 당신을 올려다보고 있다. 마치 길이 만들어질 때부터 아스팔트에 한 성분으로 섞여있던 것처럼, 하지만 불규칙한 패턴으로, 그리고 이곳저곳에 흩어진 모양새로. 고리의 출처에 대해서 많은 연산이 머릿속에서 이루어지나 제자리를 맴도는 동안, 고리랑 비슷한 정도의 수로 널려 있는 병뚜껑이 시야에 들어오니 생각은 이내 멈춘다. 벽에 붙은 빨간색의 음료 반입 금지 스티커가 무색하게 지하철 안에서 버젓이 맥주병을 부딪히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금요일 해가 저물어갈 때면 생수병처럼 맥주병을 손에 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는 나라. 깊은 맛의 질 좋은 맥주를 싼 가격으로 어디서든 쉽게 구할 수 있는 나라. 맥주의 거품까지 정교하게 새겨 넣어 자석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맥주 소비량 세계 3위라는 독일 여행 6일 차에 고리의 모양새로 병뚜껑이 연상되지 않은 건 아이러니다.



크로이츠베르크의 숙소에 짐을 내려놓자마자 너에게 말했지, 체크아웃하면서 시간이 얼마나 빠른지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을 우리가 벌써 상상이 간다고. 이렇다 할 반전 없이 베를린의 시간은 빨리도 갔고, 짐을 싸며 시간의 덧없음에 허무함을 느끼는 머릿속의 상상이 현실이 된 것은 머지않은 일이었다.


만나면 헤어지기 마련이라는 옛말은 진부하기 짝이 없지만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는 수가 없다. 출국장 한 게이트로 모습을 감추는 너를 뒤로 하고 낯선 얼굴들을 지나치며 울음을 삼켰다. 누구라도 다가와 어깨를 토닥이면 눈물이 곧바로 떨어질 것 같은 심정이었지만 다가가 어깨 내밀 이 없고 마음 알아줄 이 없는 베를린이라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너와 함께 추적추적 내리던 비를 맞으며 가로지르던 알렉산더 광장으로 홀로 향했다. 중국인지 한국인지 국적에 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던 기타리스트가 저만치 멀리서 연주하는 소리가 들린다. 관객이 적게나마 앞에서 서성이던 그때와 다르게 혼자 앉아있는 청승맞은 지금의 모양새가 어쩐지 위안이 된다. 


쓸쓸함이 지나치니 온몸의 힘이 서글픈 기분의 상태를 유지하는데 소모돼버려서, 걷고는 있지만 왠지 얼굴만 떠다니는 느낌이다. 베른으로 향하는 기차 출발까지 남은 시간은 약 여덟 시간. 무중력에서 부유하는 기분으로 어설프게 돌아다니지만 떠다니는 얼굴의 느낌은 피할 수가 없다. 그리고 머리를 스친 건 너와 함께 봐 두었던 베를린 자연사 박물관. 비를 뿌려대는 날씨도 피하고 시간도 적당히 때울 수 있을 것 같아 결국은 베를린 여행의 마지막 방문지가 되어 버린 자연사 박물관을 향했다. 



자연사 박물관에서 지구의 단층 같은, 땅을 이루는 돌의 종류 같은 것에 대해 설명을 눈으로만 읽고 있자니 영어로 된 설명을 읽고 이해하느라 언제나 기진맥진이 되었던, 숙소에 돌아가서 자세히 검색해보자더니 정작 핸드폰을 켜고선 얼마 지나지 않아 잠이 들었던 네가 떠오른다. 그럼에도 그때의 선택에 후회는 없다- 쓴 약을 꿀떡 삼키지 않으면 입에서 쓴 맛이 오래 맴도는 것밖에는 되지 않으니까. 가늠도 가지 않게 넓고 아득한, 지금 이 순간에도 무한하게 확장하기를 멈추지 않는 우주에 관한 전시장은 어두컴컴한 실내와 다소 조잡한 모형들에도 경이로웠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든 다를 바 없이 조악한 동영상에도, 날개도 달리고 꼬리도 있는 공룡의 괴기한 생김은, 그리고 그런 생명체가 한 때 같은 공기를 마셨다는 사실은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처럼 신기했다. 


박물관을 나올 때, 기념품 상점 직원에게 웃어 보일 만큼 나는 쓸쓸함에 여유가 생겼다. 우주는 무한하게 확장하고 있고, 몇 천만년 전에 지구에는 공룡이 살았으며, 우리의 시간은 유효하고, 우리는 그 시간을 되돌릴 수도, 함께 통과하는 상대를 소유할 수 없다.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는 수가 없지. 세 시간의 박물관 구경으로 나는 쓴 약을 목구멍으로 삼켜 넣었다. 



여행의 끝에 찾아드는 보편적 서글픔과는 다르게 필요 이상으로 쓸쓸한 기분은, 그래-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포함해 24년이라는 시간 동안 삶의 반경에 가장 큰 교집합이 언제나 있었던 네게, 우리가 함께 통과해온 시절에 안녕을 고하는 것 같아서다. 예전처럼 청소를 누가 하네, 설거지를 누가 하네 다투는 일은 아마 우리의 남은 삶에서 영영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베른에서 '여행자도 아닌 생활자도 아닌 무언의 시간을 유영하는 존재'로 살아갈 테고, 너는 서울의 밤하늘을 밝히는 생활자로 매일을 살겠지. 우리가 야식으로 치킨을 시켜먹던 많은 밤들은, 그리고 하루에 이만 사천보만큼 부지런히도 걸었던 베를린의 시간은, 모두에게 오늘이 가면 내일이 오는 것처럼 어제가 될 테다. 그리고 원래 그 자리에서 항상 있었던 것처럼, 어쩌다 발견하지 않고서는 들여다볼 기회가 없을지 몰라도, 우연히 들어온 시야에서 바로 형체를 분간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내가 밟고 지나가는 땅의 일부가 되겠지. 베를린 길바닥의 병뚜껑처럼.



마침내 손 내밀어 주는 사람을 만나게 되었을 때, 머무는 시선들을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나는 플랫폼에서 한참을 목놓아 울었다. 생각하면 마음 한편이 아파오는 안녕이지만, 세상 슬픔 다 짊어진 듯 흘러넘치는 그때의 노트를 들여다보니 담담하게 써 내려간 오늘의 내가 생경하다. ('무너져내리는' 심정이었다니.) 내일은 오늘보다 덜 쓸 테고, 많은 내일들 후에는 아마 알아보기도 힘든 만큼 혀 끝에 조금 남아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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