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순간
정말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늘 상상 이상이다. 내 생각보다 훨씬 만족스러운 상태. 행복에 대한 상상이 초라할 정도로 작은 일에 행복해지기도 한다. 내가 아는 것이 사실은 내게는 행복하다고 느낄 만한 조건이 아닐 때도 있고, 행복이라고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는 순간도 있다. '아! 행복해!' 이 한 마디가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은 예기치 못한 상황에 상상하지 못했던 모습으로 구현된다. 그리고 예상했던 것보다 더 행복할 때는 새로운 모양의 행복을 배우게 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 또 불현듯 생길지 모르니 뭐든 기꺼이 하고 이왕 할 거 즐겁게 하자고 생각하며 살자고 생각했다.
지난 주말, 나는 새로운 모양의 행복을 누리고 왔다. 밥 차려주는 예쁜 친구 덕분에.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인 이 친구는 함께 지내면 배울 점도 많고 좋은 점을 다 갖춘 친구다. 한마디로, '보기 드문 여자'다. 이렇게 예쁘게 생겼는데 마음씨까지 고운 여자를 찾기 힘들다는 의미다. 이 친구는 살림을 정말 잘한다. 작고 동그란 칫솔꽂이에 립밤을 꽂아 잃어버릴 일을 없게 했고, 화장대 거울에는 한 땀 한 땀 조명을 붙여, 여느 샵 못지않게 얼굴을 환하게 비출 수 있도록 만들었다. 무엇보다 요리를 정말 잘한다. 맛있는 밥을 잘 차려주는 친구다.
이날도 퇴근하고 부리나케 친구 집으로 갔더니 친구는 귀여운 핑크 잠옷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를 하고 있었다. 메뉴는 미역국, 닭볶음탕, 두부조림, 그리고 토마토달걀볶음. 우리가 온다고 미역국에는 한우까지 넣었다고 했다. 일주일의 피로가 다 풀리는 맛이었다. 맛있어서 행복한 것도 있었지만, 친구의 마음과 정성이 더해진 밥을 함께 먹어서 더 행복했다. 이 친구는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자취를 시작해서 그런지 스스로 살림하는 법을 잘 터득한 것 같았다. 이날은 국을 끓일 때 양파를 통으로 넣으면 비린내나 잡내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살림은 이렇게 어깨 너머로 배우고 늙는 일이구나. 아주 오래전 우연히 엄마와 외할머니의 대화를 듣다가 김칫물이 든 도마를 햇볕에 말리면 김칫빛이 빠진다는 것을 배운 적이 있다. 나는 일광욕하는 도마를 보면서 혼자 생각했다. 피가 물보다 진해도 물은 피를 지우고 볕은 김칫국을 지운다는 것을. 그건 마치 살면 살아진다는 드라마 대사 같은 것이다. 살림은 이렇게 물로 지우고 볕으로 지우는 일이구나. 볕을 쬐는 도마를 볼 때면 그날 우리 엄마와 엄마의 엄마가 나눈 대화가 생각났던 것처럼, 이제 국에 양파를 통으로 넣을 때면 친구와 보낸 그날 저녁이 생각나겠지.
이 친구의 이런 성숙함은 아마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책임감을 배운 데서 나왔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다 적지 못할 각자의 사연이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를 이별동기라고 부르는 비슷한 어려움을 함께 겪었다. 삶이 우리를 짓누를 때 우리가 서로의 위로가 될 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인생이 가볍지 않다는 걸 알게 되어서. 가볍지 않은 인생을 웃으며 살아갔던 그때의 우리가 그저 기특하고 대견할 뿐이다.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면 아주 예-전에 함께 상상했던 미래와 너무 다른 지금을 살고 있다. 상상 못한 일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신박한 이야기가 전개되는 것이 인생이었다.
예기치 못한 일을 맞닥뜨리는 것. 그리고 그 일을 책임지며 살아가는 것. 이런 점에서 이 친구는 나보다 언니인 것 같기도 하고 선배인 것 같기도 하다. 근데, 나보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지는 말아. 내가 널 다 이해할 수 있게. 지금처럼 곁에서 오래 함께 걸어가자, 천국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