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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Nov 04. 2018

편집자는 오늘도 '잡캐'가 되어 간다.



오늘은 뜬금없는 게임 이야기로 시작을 해볼까 한다.


중학교 시절, 영혼을 팔아 치울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게임이 있었다. 여타 게임들처럼 하나의 직업을 정해서 전직을 하는 식의 게임은 아니었고, 플레이어가 어떤 방향으로 스킬을 올리느냐에 따라 직업이 정해지는 식이었다. 보통 플레이어들은 자신이 원하는 하나의 루트를 정하고 스킬을 올렸다. 누군가는 마검사를 목표로 하여 전사이면서 마법을 구사하기도 했고, 오직 활만 쏘는 데에 전념하기도 했다. 하지만 게임을 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외길을 고수하긴 힘들었다. 하나의 직업군에 전문성을 갖게 되기보단 이런저런 스킬로 발만 넓어지는, 소위 말하는 '잡캐'가 되는 게 보편적인 흐름이었다.


나 역시 그 '잡캐' 중 하나였다. 마법사로 시작했던 내 캐릭터가 어느 순간 완드가 아닌 메이스를 든 채 여기저기 설치고 있었으니. (무기에 추가할 수 있는 정령이 있었는데, 개중에 둔기의 정령이 가장 잘생겼기 때문이었다...) 또 평화로운 마을에서는 무기를 내려놓고 만돌린을 연주하며 요리를 하거나 옷을 만들었다. 마법사부터 둔기를 들고 다니는 전사, 음유시인과 요리사 등등. 어딜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잡캐였던 것이다.




편집자가 된 이후로 종종 오래전 접었던 그 게임이 떠오르곤 한다. 편집자는 '잡캐'여야 한다는 것을 느낀 이후로 더욱더 그렇다.


가장 먼저 배운 것은 인디자인이었다. 내가 다니는 출판사는 아주 소규모여서 따로 상주하는 디자이너가 없다. 물론 북디자인의 경우는 외주 디자이너분께 맡기지만, 서점 사이트에 올라가는 상세 페이지나 SNS에 홍보할 이미지까지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니 고스란히 편집자의 업무가 된다. 고작 포토샵 브러쉬나 끼적일 줄 알았던 나는 출판사 입사 한 달 후 '내일배움카드'를 만들어 인디자인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좋은 편집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기도 했고, 내가 할 줄 아는 것이 늘어난다는 즐거움이 있기도 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퇴근 이후 버스를 타고 수업을 들으러 가서 늦은 밤에 끝나는 일정이었지만 나름대로 재미도 있고 보람도 있었다. 수업 내용은 북디자인을 배우는 쪽이었기 때문에 그때 배운 것을 많이 활용하진 않지만, 인디자인에 완전히 문외한이었을 때보단 툴을 사용하는 게 조금 익숙해졌다.


또 최근에는 프랑스 자수책 작업을 마쳤다. 외서 번역본이었기 때문에 내가 카피를 작성하거나 하는 일은 많지 않았지만, 자수를 계속 접하다 보니 슬슬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자수나 한 번 해볼까.'

손재주는 없는 편이지만 바느질은 좋아했다. 지난 올림픽 때 산 수호랑 인형에게 옷을 만들어 주기도 했으니. 그렇게 자수책 마감을 넘긴 날 퇴근길, 약간은 충동적으로 핫트랙스에 들러 프랑스 자수 키트를 샀다. 또 하나의 취미가 늘어난 셈이었다.


마지막. 솔직히 말하자면 브런치도 비슷한 경로로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아무래도 기획안을 작성하려면 여러 플랫폼을 들여다봐야 하지 않나. 그간은 말로만 들었던 브런치를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한 게 그런 계기였다. 매일같이 브런치를 보고, 부지런히 글을 쓰는 수많은 사람을 보며 어떤 자극을 받고, 잘 풀려서 출간 작가가 되는 이용자들을 보고 있으려니 또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나도 브런치에 글을 올리다 보면 언젠가 작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어느 주말. 아주 짧은 고민 끝에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노트북을 챙겨 카페로 향했다. 시험 기간이라고 북적이는 대학생들 사이에 자리잡은 지 세 시간, 작가의 서랍에 올릴 글 세 편과 신청서 작성을 마쳤다. 이후 사흘의 시간을 기다린 끝에 브런치 작가 합격 메일을 받았다.




고로 느낀 바이다. 편집자는 '잡캐'여야 한다.

이 글에 쓴 것 외에도 TV 프로그램, 인터넷 유행, 영화, 음악 등 트렌드를 실시간으로 파악해야 하고, SNS도 최소 두어 가지는 운영할 줄 알아야 한다. 소규모 출판사라면 디자인툴을 기본 기능 정도는 만질 줄 아는 게 편하다. 외서 기획을 한다면 외국어도 당연히 해야 할 것이고, 실용서를 다룬다면 그 분야에 대해서도 기본 지식이 있어야 한다.

뭐 세상 어느 분야가 그렇게 않겠냐마는, 편집자가 되어 보니 이 직업도 참 '잡캐' 같아야 한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넓고 얕은 잡캐가 되어간다.




글을 쓸 때는 주말에 집 앞 카페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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