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오후였다. 진행 내내 다소 우여곡절이 많았던 에세이가 드디어 인쇄를 마친 날. 인쇄를 마친 책은 서점에 배포되기 전 사무실로 한 묶음이 배송된다. 차곡차곡 쌓인 책 한 묶음을 받고 나면 내가 해야 할 일은 책에 이상이 없는지 한 번 훑어보는 것. 대략 한 달에 한 번꼴로 이 인쇄본을 받는데, 대부분은 별문제 없이 지나가곤 한다.
오늘의 글은 그 에세이의 인쇄본을 받은 순간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대표님이 책 묶음에서 한 권을 빼내어 전해주시며 이상 없는지 확인을 부탁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자리에 앉아 분홍빛으로 유난히 예쁘게 뽑힌 표지를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책장을 넘겼다. 사진도 깨지는 것 없이 잘 들어갔고, 텍스트로 그렇고...
큼직한 것들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는데, 마지막 2~30페이지가량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응? 190, 191, 192, 193, 206, 207, 198, 194...
순간 뒷목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페이지 넘버링이 뒤섞인 것이다. 행여 피로한 눈이 착오를 일으킨 건 아닌가 해서 몇 번이고 페이지 넘버링을 확인했다. 초짜 편집자가 맞닥뜨린 최초의 인쇄 사고였다.
혹시 내가 사고 친 건 아니겠지, 분명 인쇄용 PDF 확인할 때 페이지도 확인했던 것 같은데. 폴더에 따로 저장해 두었던 인쇄용 PDF를 떨리는 손으로 켰다. 문제의 페이지로 스크롤을 내리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심장이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192, 193, 194, 195...
천만다행으로 PDF에는 문제가 없었다. 적어도 내 실수로 벌어진 사고는 아니라는 뜻이었다. 처음 오류를 발견하고 PDF는 정상이라는 걸 확인하기까지 겨우 2, 3분가량의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아, 내 실수였으면 진짜 혀 깨물고 죽었을 거야.' 물론 PDF가 정상이라고 해서 사고가 아니게 되는 건 아니었지만, 아직 초짜에 새가슴 신입인 내가 책임지기엔 너무 무서운 일이었으니까.
쭈뼛쭈뼛 자리에서 일어나 대표님께 말씀을 드렸다.
"대표님, 페이지 넘버링이 섞였어요."
"응??"
놀란 대표님과 나. 오류가 난 페이지를 보여 드리고, 대표님과 나란히 서서 30권의 견본을 하나하나 확인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모든 책에서 오류가 생긴 것은 아닌 듯했다. 팔락팔락 종이를 넘긴 지 한참, 걸러진 문제의 책을 모아 보니 총 6권이었다. 1/5의 확률...
30권 중 대표님이 딱 한 권 골라서 전해주신 책, 어쩜 그게 1/5의 확률에 당첨된 책이었는지. 나머지 문제없는 24권의 책 중 한 권만을 확인했다면 수습도 훨씬 늦어졌을 테다.
대표님이 인쇄소에 전화를 거시는 것을 들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긴장이 풀린 채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혹시 나 때문에...?' 하는 생각에 콩알만 해졌던 간이 조금씩 제 크기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가수들은 녹음할 때 귀신을 보면 대박이 난다고 하던데, 이 책도 대박이 나려고 이런 사고를 겪은 게 아닐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런 일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날이야 인쇄소 단계에서 사고가 난 거라지만, 내가 제대로 확인을 안 해서 사고가 난 거였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다음 책도 몇 번이고 확인해야지. 아무리 내 책임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런 사고는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아.
문득 그날 일을 떠올리니 또 한 권의 마감이 코앞이다.
이번에도 무사히, 문제없이 끝마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