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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Nov 25. 2018

파란 하늘을 파랗게 보는 것



직업 특성상 온종일 컴퓨터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것이 일상이다. 기획안을 쓰기 위해 작가를 찾아다닐 때도 있고, 출근부터 퇴근까지 줄창 원고만 들여다볼 때도 있고, 보도자료나 상세페이지 따위를 만들기 위해 디자인툴과 씨름을 할 때도 있다. 나는 원래 평소에도 컴퓨터나 핸드폰은 많이 하는 편이었지만, 하루에 여덟 시간 내외를 줄곧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건 또 다른 일이었다. 하루 내내 놀 때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던 몸뚱이가 일 좀 하고 나면 여기저기 쑤시던 것처럼.

개중에서도 피로를 가장 자주 느낀 건 눈이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는 오후 너다섯 시쯤이 되면 하얀 모니터가 태양 빛이라도 되는 양 시리게 느껴졌다. 그럴 때면 잠시 눈을 꼭 감고 생리적으로 찔끔 나오는 눈물을 눈동자에 펴 바르듯이 이리저리 굴리곤 했다.

'이러다 나이 들면 시력 마이너스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을 무렵, 멍하니 웹서핑을 하다가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에 대한 글을 읽었다. 불행히도 지금 쓰고 있는 안경은 컴퓨터 모니터보단 전공 도서를 더 많이 보고 있었던 대학생 때 맞춘 것이라 그런 기능이 없었던 것이다.


결국 두어 달이 지난 후, 없는 돈을 끌어모아 안경을 새로 맞췄다. '블루라이트 차단 기능'이 들어간, 검은 테의 안경으로. 블루라이트 차단 안경은 일반 안경 렌즈보다 노란빛이 많이 돈다는 말을 듣고 아무리 관찰해 봐도 노란빛은커녕 여타 안경과 뭐가 다른지도 알 수 없었다. 그땐 사기당한 거 아닌가, 이거 맞춘다고 차이가 있긴 한가, 별별 생각을 다 했던 것 같다. 그래도 다행히 그 뒤로는 눈이 시리거나 따가웠던 적이 없다. '노란빛'에 대한 진실은 여전히 미궁에 남은 채였지만.




그 뒤 머지않아 다가온 추석 연휴를 틈타 나홀로 대만 여행을 떠났다. 9월 말의 대만은 잠깐만 걸어도 땀이 뻘뻘 날 정도로 푹푹 찌는 날씨를 자랑했다. 하지만 뚜벅이 여행자인 나는 별수 없이 먼 길을 손부채질 하나에 의존하며 걸을 수밖에.

그렇게 맞은 3박 4일의 여행의 마지막 날. 출국 시간을 기다리며 숙소 근처 공원을 걷던 중이었다. 더위에 지쳐 벤치에 풀썩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순간. 그늘에 앉아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문득 안경에 묻은 손자국이 거슬렸다.

잠시 한숨을 돌리고 안경을 닦기 위해 벗어들었는데, 이게 웬걸? 그때까진 파란 줄도 몰랐던 하늘이 눈이 시리도록 새파랗게 보이는 것 아닌가. 내 방과 사무실에서는 그저 '어디가 노랗다는 건지 모를 렌즈'였는데, 해가 쨍쨍하게 내리쬐는 바깥에서 보니 말 그대로 '누런색' 그 자체였다.

실내에서는 티가 나지 않았던 게 밖에 좀 나왔다고 이렇게 노랄 수가. 약간의 충격에 휩싸인 채 티 없이 맑고 청명한 하늘을 맨눈으로 한참 바라봤다. 그러다가 다시 안경을 쓰니 새삼 하늘이 꾸물꾸물하게 보였다. 여행을 다닌 4일, 그리고 그전에 보냈던 기나긴 나날은 그저 눈에 익어서 몰랐을 뿐.


3박 4일의 여행 끝에 처음 안경을 벗고 본 파란 하늘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알고 지내는 것과 모르고 지내는 것은 큰 차이가 있다. '안경이 노랗다'는 사실을 몰랐을 땐 하늘이 희뿌연 줄도 모르고 있었지만, 이젠 안경을 쓰고 보는 하늘과 맨눈으로 보는 하늘에 차이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말이다. 써놓고 보니 조금 우습고 사소한 비유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편집자가 되고 참 많은 걸 배웠지만 어쩌면 내가 잃은 것들도 꽤 있지 않나 싶었다. 작게는 이런 '파란 하늘'부터, 크게는 몇 번 혼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위축되어 조심스러워진 태도까지. (이 부분은 조금 나중에 쓰기로.)



그러니 내가 잃은 것들을 잘 알고 있자.

필요할 땐 언제든 다시 꺼내어 쓸 수 있도록, 파란 하늘이 보고 싶은 순간에는 안경을 벗을 수 있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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