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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Dec 01. 2018

신입은 아는 게 없어서 겁도 없다

어제 자로 오랜 시간 공을 들였던 한 권의 책이 드디어 출간되었다. 대표님과 편집장님이 때때로 '2018년 하반기 우리 출판사의 기대주'라고 말씀하곤 하셨던 책. 얼마나 공을 많이 들였는지, 나와 편집장님은 마감이 다가올수록 컨디션이 뚝뚝 떨어져서 서로 '몸은 괜찮은가' 묻는 것이 하루 안부 인사가 될 정도였다.

밤새 꿈까지 꿀 만큼 신경을 많이 쓴 탓에 이런저런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막상 예쁘게 나온 책을 보니 또 엄청난 뿌듯함이 하늘을 뚫을 기세로 차올랐다. 돌이켜 보면 힘든 점도 있었지만 그만큼 여러 가지를 배우지 않았나 싶다.


작가 미팅도 많이 따라갔던 이번 책. 왠지 놀러 가는 기분이라 신났었다.


나는 원고를 마감할 즈음에 표지에 실릴 문안도 작성해서 넘긴다. 책 앞날개에 들어갈 작가 소개, 뒷날개에 들어갈 문안, 그리고 뒤표지에 실릴 글이다. 그런데 이번엔 이 단계에서 조금 고전했다. 작가 소개 글과 뒤표지 글이 너무 '심심하고 재미없다'는 이유였다.

실장님의 피드백을 받고 모니터만 바라보며 이걸 또 어떻게 고쳐야 할지 한참을 고민했다. 막막하고 감이 잡히지 않아 몇 차례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내게 문득 실장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M이 맨 처음에 썼던 기획안이 좋았어. 그거 뭐였지? 여행 에세이 기획안이었는데..."


그 말에 잊고 있던 기획안 하나가 떠올랐다. 입사 이후 처음 썼던 기획안이라 내 눈에도 보이는 부족한 점이 많았고, 또 제대로 다듬어지지도 않은 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장님과 당시 있었던 대리님은 좋은 말을 많이 해주셨다. 신입이 쓸 수 있는 글이라고, 작가들이 보면서 매력을 느낄 만한 기획안이라고.


"아... 몽골 기획안이요?"

"아, 맞아 그거. 난 그때 썼던 표현들이 좋더라고. 다듬어지지 않아서 러프하기도 하지만 통통 튀는 맛이 있었는데. 이 책에는 그런 느낌이 더 어울려, 그런 글을 썼으면 좋겠어."


그런 글도 있었지. 덕분에 잊었던 기획안을 떠올린 나는 폴더 속에 묵혀놨던 첫 기획안 파일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읽어보는데...


'내가 이걸 기획안이랍시고 썼었다고?'


딱 이런 생각 때문에 입이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기획안이라고 해도 괜찮을지 모를 정도로 묘사와 비유의 행진이 가득했으니!

거의 딱딱한 문체로 사실에 기반한 이야기만 쓰는 지금의 기획안과는 180도 다른 글이었다. 말로는 와닿을 것 같지 않아 한 문단만 발췌해보기로 한다.



앞만 보고 달려왔다. '남들처럼 살기 위해' 목숨 걸고 달렸으나 이제는 '노오력'도 잘 통하지 않는다. 치열한 삶이 버겁고, 무얼 위해 그렇게 달려온 건가 회의감도 든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것도 싫어진 우리들, 이젠 성공에 대한 강박을 내려놓고 무의미한 것들에 눈을 돌릴 차례다. 이른바 무의미를 추구하는 무민세대(無+Mean). 그들을 위한 무자극, 무맥락, 무위휴식의 몽골 여행기! 이 책은 복잡하고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지고, 말 그대로 '무(無)'의 매력을 간직한 몽골로 떠나 보는 여행 에세이다. 도시라는 모눈종이에 갇혀 사는 젊은 세대에게, 스케치북 같은 몽골의 너른 자유를 만끽하게 해 주는 책이 되었으면 한다.



이게 기획안인지, 보도자료인지.

멋모르는 한 달짜리 신입이 쓴 기획안을 보며 조금 웃었다. 물론, 지금도 1년은커녕 반년이나 겨우 채운 신입이지만.


어쨌든 그땐 실장님, 대리님이 '기획안이 독특하다, 재밌다'라고 하셨을 때 '어디가 좋다는 거지? 뭐가 독특한 거지?'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확 알겠더라. 어떤 점을 칭찬하셨던 건지, 지금 쓰는 글과 무엇이 다른지.

아마 나도 모르는 새 많이 위축되고 기가 죽어 있었던 것 같다. 신입이니까 당연히 혼나는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씩 혼이 날 때마다 어쩔 수 없이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생기는 거니까.

그제야 비로소 내 마음에 두꺼운 껍데기가 생겼다는 걸 자각할 수 있었다. 그 사실에 조금 놀란 후에, 다시 한 꺼풀을 조심스레 벗겨냈다. 그리고 속되게 말해 '정신줄을 약간 놓은 채로'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한참을 고전했던 작가 소개 글과 뒤표지 글이었지만 '첫 기획안'을 읽고 나니 가닥이 잡혔다. 머지않아 글을 완성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실장님께 새 표지 글을 보냈다.


"훨씬 낫다."

"네?"
"지금 쓴 게 훨씬 나아, 잘 썼네. 고생했어."


명쾌한 OK 사인을 받은 후에야 마음에 쌓인 무게가 덜어지는 듯했다. 표지 글도 되었으니, 이제 정말 출간이 머지않았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체할 수 없이 입꼬리가 올라가 조금 뿌듯한 마음으로 답했다.


"아까 몽골 기획안 말씀하셔서 다시 읽어 보고 썼어요. 어떤 느낌인지 알겠더라고요."




이제는 예약판매를 시작했던 날부터 하루하루 순위권을 치고 올라가는 책을 보며 마치 '내 새끼 보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

때때로 그날처럼 또 기가 죽고 위축되는 순간이 오기도 하겠지만, 그럴 때마다 첫 기획안을 다시 읽어 볼 생각이다. 멋모르는 신입, 아는 게 없어서 겁도 없었던 '신입의 마음'을 잊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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