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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Feb 21. 2023

하루키가 청춘 작가인 이유

상실 = 성숙

 청춘 문학이라는 용어로 많은 소설을 통칭하는 건 청춘을 너무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것 같다.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이 청춘을 준비하는 문학이라면 하루키의 문학은 청춘을 마무리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어릴 적 읽은 ‘해변의 카프카’와 젊었을 적 읽은 ‘노르웨이의 숲’은 청춘과 공허를 가장 잘 나타낸다 생각한다. 그러나 이미 너무나도 많은 글이 청춘에 대해 해설했기에 이에 대해선 필자의 연필을 내려두겠다. 다만 공허에 초점을 맞춰, 인간의 인생이란 결국 살아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죽이는 것이라는 말 정도 얹도록 하겠다.



 자식의 독립, 배우자와의 사별, 흥미 없는 외출, 더 이상 춥지 않은 겨울과 같은 세상의 여러 이유가 인간의 공허를 팽창시킨다. 다행히 이와 같은 것들을 청춘의 나이에 온전히 겪기엔 세상도 안쓰러웠는지 잠시 유예하여 준다. 공허는 청춘으로 채워진 삶의 상실로부터 시작되고 그 끝은 없다. 반면 상실을 경험한 인간은 고통받으며 자신을 죽이고 다시 탄생할 뿐이다. 아니 정확히는 탄생될 뿐이다. 스스로 태어날 순 없다. 미래의 불안을 모체 삼고, 과거의 추억을 탯줄 삼아 공허를 부정하며 탄생된다. 재탄생된 인간은 상실을 느끼는 한 다시 죽고 다시 태어나고를 반복한다. 함축적으로 반복되는 상실의 삶에서 공허를 이길 방법은 바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간의 성숙이다. 성숙의 정의가 여럿 있지만 필자가 주장하는 성숙이란 허무하지 않은 공허다. 그러나 공허함을 허무로 이끌지 성숙으로 이끌지는 개인에게 달렸음을 명심해야 한다.




 하루키의 작품들, 비판도 많고 인기도 많다. 그중 ‘노르웨이의 숲’과 ‘해변의 카프카’는 고전으로 기억될 것이다. 하루키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한국에선 ‘노르웨이 숲’보단 ‘상실의 시대’로 기억되길 원한다. 상실이라.. 애증의 단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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