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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May 27. 2023

인생이여 만세

현실주의자

 짙은 눈썹에 중성적인 얼굴, 초현실주의 화풍의 자화상 때문에 처음엔 남자로 오해했다. 미술업에 종사하는 친구의 작업실에 들렀던 이십 대 초반, 벽에 걸린 그녀의 자화상 모작을 보고 처음 알게 된 그녀의 이름은 프리다 칼로. 그녀의 첫인상은 그녀의 작품들만큼이나 강렬했다.


 인간은 자극적인 것을 탐하고 우선 생각하기에 피로 낭자한 그녀의 작품들을 마주했을 때 프랜시스 베이컨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덕분에 무조건 초현실주의 화가일 줄 알았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 스스론 초현실주의 화가로 인정되는 걸 거부했다. 자신의 작품이 상상이 아닌 그녀의 비통한 삶이 그대로 드러난 사실주의적 묘사의 일부라는 뜻이었다. 소아마비와 십 대 후반의 큰 교통사고로 인해 평생을 하반신마비로 살았고 스무 번이 넘는 수술과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 세계는 어둡고 암울해 보인다. 적나라하게 그린 여성의 몸을 보고 에로틱한 느낌보다 강렬한 이미지를 받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성은 -대체로 자신을 모델로 삼은 것 같은- 나체로 등장할지라도 선정적이지 않다. 다만 가슴 아파 보일 뿐이다.



 육체적인 고통과 함께 프리다 칼로는 그녀의 사랑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다. 당시 멕시코의 국민화가라도 해도 과언이 아닌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와 스무 살 이상의 나이 차이가 났지만, 둘 다 예술가여서 그런지 둘의 사랑은 징하게도 이어졌다. 하지만 디에고의 바람기로 인해 프리다는 육체적인 고통만큼 심리적인 고통 속에 살았다. 디에고와의 두 번의 결혼을 통해 육체적인 고통과 심리적인 고통 모두를 자기 작품에 담아낸 프리다는 그렇게 인류에게 있어 가장 위대한 여성 화가가 되었다.



 수 세기 전 인물인 젠틸레스키와 함께 현재 페미니즘의 대표 여성 화가로 기억되는 프리다 칼로는 혁명가이기도 했다. 고통스러운 삶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비판하고 새로워지고자 하는 그녀의 특성으로 인해 힘들었던 그녀의 인생을 조금 더 굴곡지게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 그녀가 미친 영향을 말하는 것보단 그녀가 겪었던 아픔들에 집중하자면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에디트 피아프의 ‘Non, Je Ne Regrette Rien’처럼 프리다 역시 그녀의 인생 말미에, 그것도 그녀의 유작인 ‘Viva La Vida’로써 아픔 많았던 본인의 인생을 예술로써 승화하고 감사로 마무리했다고 생각한다.


 모두에게 고통이 있고 아픔과 회한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우린 인생이라 부른다. 희로애락을 담은 인생을 향해 우리가 외칠 가장 바람직한 말은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작품명인 듯싶다. 인생이여 만세!


프리다 칼로 - 인생이여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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