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청량함보다 청춘의 나약함에 집중한 작가. 연민과 혐오, 그 사이 인물이 누구인지,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던진다. 던져진 의문의 궤적 따라 쓰인 그의 퇴폐적 글쓰기. '인간 실격'이라는 책으로 너무나 잘 알려진 작가이나 다른 작품들 또한 빛이 나며 빛을 향해가는 나방과 같이 필자 또한 그의 책을 탐독하게 된다. 말 그대로 빛이 난다. 정확히는 바랜 빛. 오래된 종이에 반사된 바래진 누런 빛깔의 빛이다. 섬나라 눅눅한 다다미 방의 냄새가 베인 듯한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은 음울하다. 민음사 역시 그와 잘 어울리는 에곤 쉴레의 그림을 표지로 사용했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은 부끄러움을 불러일으킨다. 유명한 첫 문장으로 알려진 그의 소설 '인간 실격'의 본론 첫 문장만 봐도 느껴진다.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저는 인간의 삶이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허나 다자이 오사무의 부끄러움의 이유가 거울에 비친 나를 바라봄에서 오는 것과 다를 게 없음을 깨닫는 순간 허탈함이란 감정 또한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어둡다. 자의식이 잠식된 기분과 함께 침울한 마음으로 읽게 되는 다자이 오사무의 책들은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워 어둠에 숨는 사춘기 소년소녀의 모습을 띤다. 이러한 인상을 주는 작가의 소설들은 장 · 단편 가리지 않고 재밌다. 마치 명절날 모인 친척들이 싸우는 걸 보는 것과 같은 재미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허탈한 재미, 뒤틀린 유흥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익살스러움 또한 가미되었다. 단편집 '만년'이 대표적이다. '만년' 중 특히 「로마네스크」가 그러하고, 「원숭이 섬」도 그렇다. 그런데 '만년' 중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의 느낌은 뭔가 모르게 김승옥이 떠올랐다. 왜 그럴까?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한국 작가가 김승옥이고 다자이 오사무 역시 상당히 좋아하지만, 느낌이 비슷한 이유는 아직 잘 모르겠다.
이토 준지의 만화로 재탄생한 '인간 실격'을 어머니와 함께 갔던 만화카페에서 읽은 적이 있는데 이토 준지스럽게 기괴하고 적나라했다. 그래도 만약 '인간 실격'이나 '사양', '만년' 등의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에 관심이 간다면 만화나 드라마보단 소설을 먼저 읽을 것을 추천한다. 모든 리메이크작은 원작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기에 더욱이 추천한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인간 실격' 뒤표지의 소개 글에 이런 글귀가 있다. '청춘의 한 시기에 통과 의례처럼 거쳐야 하는 일본 데카당스 문학의 대표작' 청춘과 데카당스, 때려야 땔 수 없는 단어이지 않은가! 보들레르, 랭보, 오스카 와일드. 이름만 나열해도 웅장이 가슴해지는 이들로부터 시작된 탐미주의와 상징주의 등의 사조가 다자이 오사무에게까지 이어진 듯싶다.
청춘, 현실의 암담함과 미래의 불안이 가장 클 시기. 그러한 시기의 인간의 진심을 위대한 문학으로 표현한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하며, 필자 역시 청춘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현재라는 시간에게 고개 숙이지 않겠다 다짐한다.
일본 문학 중 하루키를 제외하고 가장 많이 읽은 작가다. 음울하다고만 계속 말한 거 같은데 사람이 어떻게 항상 우울하기만 하겠는가? 청춘이 언제나 불안하기만 하겠는가?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유머러스하기도 하고 시적이기도 하다. '달려라 메로스', '만년' 중 「어복기」를 읽어보면 막 음울하고 퇴폐적인 느낌만 가득한 게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물의 이름이란 그게 어울리는 이름이라면 굳이 묻지 않더라도 절로 알게 되는 법이다. 나는 내 피부로 들었다. 멍하니 물상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그 물상의 언어가 내 피부를 간지럽힌다. 예를 들면, 엉겅퀴. 나쁜 이름은 아무런 반응도 없다. 여러 번 들어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던 이름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
다자이 오사무 '만년' 중 「완구」에 있는 문장이다. 강렬히 기억되는 문장이며 번역가님께서도 자꾸 생각나는 문장이라고 하셨다. 괜스레 동질감을 느낀다. ‘직소’라는 단편을 꼭 한번 읽어보기를 권하며 다시 한번 소설 속에 숨은 오사무를 만나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