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방인'의 해설집이라고도 불리는 '시지프 신화'. 작품에서 거세게 대두되는 것은 부조리의 관한 내용이다. 부조리, 단어만 봤을 때는 좋은 느낌이 들지 않는다.그리고 사실 그게 맞다.
원래시지프 신화란 것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시지프(시시포스, 시지프스라고도 부른다)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다.시지프는 신들을 농락한 죄로 지옥에서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된 인간이다. 그가 받는벌은산정상에 무거운 바위를 올려놓아야 하는 것이다. 신들을 농락한 것치곤 생각보다 가벼워 보인다. 허나 바위를 굴려 정상에 도착하면 바위는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다.하산하여한번 더 바위를 정상에 올려다 놓아도 또다시 굴러 떨어진다. 행위의 반복이다. 무거운 바위에 짓눌리면서도 일을 수행해야 하는 고통과, 정상에 올려두면 끝나리라 믿는 희망 고문의 끝없는 반복이기에 영원한 형벌인 것이다.
베첼리오 티치아노 - 시시포스
까뮈가 부조리를 설명함에 있어시지프의 이야기를 대주제로 잡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필자보다 나은 해석과 설명을 보여준 선견자들이 이미 너무 많기 때문이다. 다만 필자가 '이방인'을 이야기할 때 신에게 감사를 느꼈다고 한 표현이, 까뮈의 '시지프 신화'를 통해 표현한다면 좀 더 직접적인 설명이 될 것 같다는 개인적 감상 정도는 나눌 수 있다.
인생이란 끊임없는 부조리의 연속이다. 마치 시지프의 형벌과 같이.
인간은 그런 부조리 속에서 도망치려 하고 회피함을 통해 안락을 찾으려 하나 어떠한 방법일지라도 부조리를 이겨냈다고 할 순 없다. 이러한 부조리에서 죽음은 부조리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다. 스스로의 죽음, 자살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살은 인생이 무가치하다고 인정해 버리는 것의 동의어이다.
필자는 부조리한 인생에 대한 회의와 염세적 사고가 신을 부정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이로 인해 -이전 포스팅에서도 말했다시피- 홀로 느끼는 죄의식이 컸다.하지만 부조리를 인정하고 그에 대한 저항이 있다면 부조리의 존재는 오히려 긍정을 느낄 수 있는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를 경험했다.
정리하자면 인간은 부조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해방되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자살이 있지만 그것은 인간으로서의 가치는 전무함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렇기에 우선 부조리를 인정하자. 그리고 끝까지 저항해야 한다. 저항의 방법은 어렵지 않다. 어떠한 결과를 추앙하는 게 아닌 삶에 순응하여 감사를 표하는 것, 즉 반대편으로 굴러 떨어진 바위를 향해 걸어가며 가벼워진 몸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감사를 느낄 수 있는 것! 바로 이것이 부조리한 삶을 향한 반항이자 저항, 올바른 인간의 태도이다.
알베르 까뮈 Albert Camus
'시지프 신화'를 읽고 글을 쓰며 생각나는 인물이 하나 있다.
바로 돈키호테.
햄릿형 인간, 돈키호테형 인간이 있다고 투르게네프는 말했다.고민하는 인간과 행동하는 인간의 대표성을 띠는 표현이지만, 햄릿이라 해서 행동하지 않았던 건 아니고돈키호테라 해서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어찌 됐든 이런 걸 다 제쳐두고라도 돈키호테의 삶의 태도, 이상을 추구하는 모습이 뭔가 모르게 '시지프 신화'에서의 까뮈의 철학관과 겹쳐 보였다.쿤데라의 '불멸'에서도 생각났던 돈키호테였지만, '시지프 신화'에서도 어렴풋이 떠오르니 왠지 정겹다. 그리고 동시에 부럽다. 이상을 추구하고 삶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