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함성인 Aug 09. 2023

우울한 행복

교차되는 감정 - 1

 일주일이 지났고 목요일 6시에 사회관 2층 복도 의자에 앉아있었다. 가방 없는 빈손에 넉넉한 청바지, 흰색 긴팔 면티 소매를 걷어입었다. 왼손에 찬 메탈 세이코를 만지며 사무실 유리문을 쳐다보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10분이 지났고 그 사이 넥타이를 맨 사무실 직원들이 퇴근했다. 18분이 지났고 근로장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나이가 있어 보이는 중년 여자 한 명이 퇴근했다. 6시 25분이 되자 그녀가 나왔다. 혼자는 아니었다. 남자 둘과 같이 나왔고 남자 중 한 명이 사무실 유리문을 잠갔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그녀가 나를 봤고 놀라는 눈치였다.

“찬준?! 우리 보기로 했었어 오늘..!

 질문인지 인사인지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어 오늘 보자고 했잖아”
“어떡해.. 나 잊어버렸어”

 민망했는지 오른손으로 아랫배와 골반 사이를 계속 쓰다듬었다.
“책을?”

 내가 물었다.
“아니! 약속을. 책 집에 있어”

 그녀는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지난주가 생각났다. 허리 부근을 쓰다듬던 오른손으로 손사래를 쳤다.
“좀 읽었어?”
“응 조금”
“오늘 다른 약속이 있는 거지?”

 책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응..”

 목소리가 상당히 작았다. 미안한 모양이었다.
“그럼 다음에 봐”
“응?”
“다음 주에 보자고”

 옆에 있던 남자 둘과 눈이 마주쳤고 나와 그들은 고개를 살짝 숙여 무언의 인사를 나눴다.
“다음 주에도 약속 있어?”

 스테파니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아니! 없어!”

 그녀가 말했다. 목소리가 조금만 더 컸으면 소리 지르는 줄로 알았을 거다.
“그럼 똑같이 6시에 여기서 봐”
“고마워 찬준”

 그녀는 방실방실 웃었다. 보조개가 아주 잘 보였다.
“어 잘 가”

 시계를 찬 왼손으로 그녀에게 인사했다. 그녀도 왼손으로 인사했다. 난 바로 자취방으로 돌아갔다.


 대학생이 되고 가장 좋은 점 중 하나는 시간표를 본인이 짤 수 있다는 점이다. 단점일 때도 있겠지만, 어쨌든 공강을 만들 수 있다는 점은 좋은 점이다. 그래서 나의 금요일은 공강이다. 덕분에 주말을 더 길게 쓰는 기분이다. 스테파니와의 약속을 미룬 목요일 저녁, 자취방에 돌아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영화 한 편을 보았다.

 남자와 여자와 개가 한 마리 나오는 영화였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했고 여자는 개와 남자를 구분하지 못했다. 개는 생각이 없었다. 개의 중성화 수술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에서 여자는 남자를 때렸다. 그 순간 남자는 개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했다. 개가 먹는 사료에 코코아 파우더를 섞었다. 개는 남자의 품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묽은 변을 눴다. 회사에서 돌아온 여자는 울고 있는 남자와 죽어있는 개를 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품에서 개를 빼앗았다. 남자는 여자를 때렸다. 여자도 남자를 때렸다. 여자는 개와 남자를 구분하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 흐느끼며 키스했다. 6분 간의 키스 후 둘은 화장실로 개의 사체를 들고 갔다. 남자는 옷을 벗었다. 그는 개의 변이 묻은 흰색 아디다스 티셔츠를 세면대에서 빨았다. 그는 나체였다. 여자는 욕조 안에서 개의 털을 남자의 면도기로 밀었다. 깨끗이 제모된 개의 사체를 나체의 남자가 쓰레기봉투에 담았다. 다음날 여자는 쓰레기봉투를 회사로 가져가 회사 뒤편 쓰레기장에 버렸다. 남자는 그날 저녁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준비했다. 여자는 퇴근 후 고양이를 한 마리 샀다.

 대사가 별로 없는 영화였다. 베를린 국제영화제 은곰상을 받은 영화라 그래서 기대했던 영화였다. 둘의 신혼여행지는 일본이었다. 오키나와를 가고 싶어 했던 남자가 오사카에 가고 싶어 했던 여자를 설득하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었다. 이때부터 영화에 대한 기대를 접었다. 개가 나오지 않으니 영화는 지루했다. 신혼여행에 데려간 고양이를 잃어버린 순간부턴 잠이 오기 시작했다. 여자가 남자의 수염을 밀어주는 장면은 흥미로웠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내용엔 관심을 두지 않았고 침대에 누워 소리만 듣다 잠이 들었다.




 목요일 저녁과 비슷한 주말을 보내고 평소와 다름없는 평일을 보내니 어느새 스테파니를 만나기로 한 목요일이었다. 지난주에 입었던 넉넉한 청바지에 얇은 갈색 니트를 입었다. 지난번처럼 사회관 2층 복도 의자에 앉아서 기다렸다. 넥타이를 맨 직원들은 6시 13분에 나왔고 바로 뒤이어 스테파니가 사무실 유리문을 열고 나왔다. 그녀는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고 있었다. 자기 키에 맞는 사이즈였다.

“찬준! 왔어!”
 앉아있던 나와 눈이 마주치고 내 쪽으로 뛰어오며 그녀는 말했다. “보고 싶었지?”





작가의 이전글 우울한 행복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