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마셔요?”
반쯤 열린 문 사이로 들어와 물었다.
“아뇨”
“나도 안 마셔요. 여기 앉아요 나”
그녀는 문을 닫고 의자에 앉았다. 우린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커피 좋은데 오늘은 안 마셔요. 잠 오래 자고 싶어서”
“전 싫어해요”
“왜?”
“카페인은 잠이 안 오게 하니까요”
“같은 건데 넌 싫어하고 난 좋아해요”
그녀는 표정이 다양했다. 밝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다른 좋아하는 마시는 거 뭐예요?”
그녀가 물었다.
“맛있는 거요?”
“응 마시는 거”
“Drinks 말하는 거죠?”
한국어 발음은 좋았지만, 외국인스러운 문법과 악센트를 주는 부분이 달라서 그런지 피부색, 머리색과 함께 그녀의 이국적인 분위기를 지우긴 어려웠다.
“네 그거요 마시는 거”
그녀가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술이요. Alcohol”
“엑! 난 안 좋아요. 취하면 이상해져”
“혼자 먹는 술은 저도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럼 안 좋아하는 건데!”
성격 좋아 보이는 그녀는 따지듯이 말했다. 8살 아이가 화내는 느낌이었다.
“다른 사람들 취하는 거 보는 게 재밌거든요”
“뭐가?”
“시끄러운 사람이 욕하는 걸 보는 거요. 또 남자들은 여자한테, 여자들은 남자한테 안겨 다음날 자기 무슨 일 없었냐고 연락하는 것도 웃기고, 슬픈 얘기도 아닌데 눈물 흘리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게 재밌어요.”
혹시나 그녀가 이해하기 힘들까 봐 평소 말하는 속도보다 천천히 말했다.
자리에 앉은 이후부터 내게 눈을 떼지 않던 그녀는 내 대답이 끝나자 잠깐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으음 이름이 뭐예요?”
“강찬준”
강을 말하고 찬준을 말할 때 1초를 뜸 들였다.
“그럼 찬준은 취하면 어때요?”
“다음 날 후회한 적은 없어요”
난 술버릇이라 할 만한 게 없다.
“후회 안 하는 거 부러워”
그녀는 싱긋 웃었다. 보조개가 또 보였다. “나는 후회 많아요”
“술 안 좋아한다면서요”
“안 좋아하는 거, 안 마시는 거랑 달라요.”
말소린 가벼웠지만, 소리에 담긴 공기는 묵직한 한숨이 되었다.
“햄버거, 피자 정크푸드 몸에 좋지 않아. 하지만 사람들 먹어요. 왜? 맛있어서. 근데 몸 안 좋은 거 다 알아요. 그래서 싫어해. 왜냐하면 건강한 몸 좋고 약한 몸 나쁘니깐. 그래서 계속 반복 반복해요”
그녀는 열정적으로 대답했고 반복이란 단어를 반복하며 책상 위에 두 팔을 올렸다. 난 의자 팔걸이에 오른팔을 올렸다. 체중을 등의 오른쪽에 실었다. 앉은 몸이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편했다.
“이거 상담이에요?”
“상담 아닌데? 나 학생입니다”
그녀의 눈이 동그래졌다.
“장소도 그렇고, 술 이야기에 건강한 몸을 이어 말하는 게 꼭 상담 같네요”
“오 아니! 그냥 말하는 거야!”
당황했는지 어이없었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찬준 어떤 말하는지 알아요. 정말로! 나도 웃겨요 그거. 사람 얼굴 빨개지고 말 못 하는 거 보면은”
그녀는 말하면서 취한 사람들 생각이라도 했는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진짜 웃겨서 웃는 것 같진 않았다.
“맞아. 벌겋게 변하는 얼굴 구경하는 거 재밌죠.
자기들만 정상인 줄 아는 취해서 돼지들 같아요. 아니면 온천 원숭이던가”
“그거 톨스토이?”
“톨스토이?”
“책에 있어요. 취해서 돼지로 되는 거”
“잘 모르겠네요”
내가 아는 톨스토이에 돼지가 된 사람은 없었다. 왠지 진 느낌이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나를 낳아준 남자와 여자를 제외하곤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를 말하는 이는 내 주위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영문학과를 전공하는 동남아 여자 유학생이 그들을 말하고 나보다 깊이 알고 있단 사실은 다소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민족주의자들의 전유물이라 생각했던 피부색 밝기에 따른 차별, 어두운 피부색의 타 인종을 하대하는 경향이 나에게도 있단 것을 알게 되었던 때다.
“도스토예프스키 좋아한다고 했죠?”
“응”
“어떤 작품이요?”
“작큼?”
“작품. Which book do u like”
“아아 책! 음 한국어로 어떻게 번역됐는지 몰라요. 범죄와 벌? 나오는 사람은 로지온, 소냐, 카테리나”
“한국에선 죄와 벌이예요”
“제일 좋아해 죄와 벌”
“왜 제일 좋은..”
질문을 하려고 했지만, 내 말을 끊고 그녀가 먼저 말했다.
“반말해요. 그게 난 더 편해서”
그녀가 웃었다. 보조개가 보였다.
“네 그럴게요”
“한국어 높임말, 말이 더 길어져서 조금 어려워”
그녀는 책상에 올린 두 팔에 체중을 싣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가슴팍에 프린팅 된 남자 서퍼가 찌그러졌다.
“누나라고 하면 되나? 아님 선배?”
“누나가 좋아. 들을 때 더 부드러워”
“알았어”
“근데 안 해도 괜찮아” 그녀가 말했다. “나도 반말할게 찬준”
“어”
“응! 어떤 말할 거야?”
“뭐 말했었지”
반말 때문에 분위기가 좀 더 가벼워졌다.
“죄와 벌”
“죄와 벌이 왜 제일 좋은데?”
“어두워. 어두운데 밝아서 좋아”
스물두 살 여름을 보내는 중인 지금까지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3번 읽었다. 한 번은 초등학생 때 도서관에서, 또 한 번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넘어가는 겨울 방학 때 집에서, 마지막은 스테파니와 작별하고 나서 스물한 살 때였다. 초등학생 땐 재밌는 책이었다. 도끼로 할머니를 죽인다는 내용은 도덕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에게 재미없게 다가올 리 없었다. 갓 스물이 된 고등학교 겨울 방학 땐 살인 이전의 로지온에 나를 대입했다. 첫사랑의 아픔 덕에 시니컬함이 극도로 심할 때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리고 스테파니와 대화를 시작했던 스무 살의 가을도 아직은 내가 로지온일 때였다.
“어두운 건 알겠는데 밝다는 건 마지막을 말하는 거야? 내가 읽은 죄와 벌은 마지막을 빼면 밝은 부분 없어”
오른쪽으로 기댔던 몸을 왼쪽으로 한번 틀어서 허리를 돌리고 등받이 가운데에 편히 기댔다.
“장면이 아니야. 사람이 밝아. 소냐랑 카테리나”
그녀는 손가락을 차례로 폈다. 왼손 검지 중지였다.
“카테리나가 소냐 엄마 맞지? 계모?”
주인공을 제외한 인물의 이름까진 자세히 생각나지 않았다. 특히 러시아 문학에서의 인물 이름을 바로바로 떠올리긴 어려웠기에 내가 질문했다.
“계모?”
“Stepmother”
“응 새엄마. 제일 코미디야. 그리고 가장 착해”
“소냐가 밝다는 건 그러려니 하겠는데 새엄마는 아니지. 딸을 창녀로 만든 사람이 어떻게 착해.”
“창녀가 Prostitute 맞아?”
“어”
“그건 소냐가 선택한 거야. 그리고 소냐한텐 로지온이 있어”
그녀는 로지온을 이야기하며 손가락으로 책상 위를 살짝 두드렸다. “착한 거 맞아. 화내고 짜증 나도 아이들이랑 남편이랑 같이 살잖아. 또 옛날에 돈 많았어 카테리나. 그래서 더 힘들었을 거야. 자기 아이들하고 소냐랑 남편이랑 힘들게 사는 거. 그리고 남편 죽고 나서 장례식 좋은 걸로 화려하게 했어”
그녀는 차근차근 말했고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었다.
“세묜의 장례식을 화려하게 한 이유는 카테리나가 다른 사람들에게 원래 자기는 상류층, 돈 많은 High Class 사람이란 걸 과시하고 싶어서야. 살아있을 땐 욕하고 못살게 했으면서 막상 죽으니깐 다른 사람들한테 세묜은 너무 좋은 남편이었다,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이유도 자기가 더 불쌍해 보이려고 그러는 거지. 이런 걸 보면 자식은 물론이고 남편도 사랑하지도 않았던 거 같아. 그러니깐 카테리나는 착한 사람은 아냐”
천천히 말했지만, 어려울 수도 있다 생각해서 좀 더 쉬운 말로 다시 한번 더 설명했다. 두 번의 설명 이후 그녀는 내가 말한 것들을 곱씹어 보는 것 같았다.
“찬준은 같이 하는 사랑이 가능해?”
그리고 사랑에 관해 나에게 질문했다.
“사랑엔 종류가 많잖아. 어떤 사랑?”
“무슨 종류?”
“부모와 자식, 남편과 부인, 친구들끼리의 사랑 이런 거”
“전부”
부모와 자식을 이야기하는 순간 어떤 의미의 질문인지 이해한 것 같았다. ‘아~’하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다. 표정이 다양한 만큼 그녀가 느끼는 순간순간의 감정이 잘 전달되었다.
“불가능한 거 같아”
“왜?”
“내가 몰라서”
“왜 몰라?”
“알 필요 없다 생각해서”
그녀와 비슷한 자세를 취했다. 양팔을 책상 위에 올리고 오른손 위에 왼손을 뒀다. “다른 사람들은 사랑이 필요할 거야. 아마 거의 다 그런 거 같아. 그런데 난 친구가 없고 아직 누구를 제대로 좋아하거나 사귄 적이 없는 데도 부족하다고 느낀 적이 없어. 그래서 사랑이 필요하다는 말을 잘 모르겠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 같아”
“슬프진 않아?”
“뭐가?”
“사랑 안 하단 거”
“오히려 좋은 거 같은데. 감정 소모할 일 별로 없잖아”
고등학교 3학년 때가 생각났지만, 무시했다.
“찬준의 가족은 안사랑해?”
“부모는 날 사랑해. 근데 내가 사랑하진 않아. 그냥 키워주고 달마다 용돈 줘서 고마운 정도”
“그럼 찬준은 혼자 하는 사랑도 안 해봤어?”
이번엔 신기하단 표정이었다.
“뭐 비슷한 건 해봤어. 근데 짜증만 나더라”
다시 고등학교 3학년 때, 여름방학 때가 생각났다.
“그때 어땠어?”
“혼자 누구 좋아할 때?”
“응”
“그냥 짜증만 났다니까?”
“그럼 다시 안 좋아하게 된 거 오래 걸렸어?”
“짜증이 많이 나서 맘은 금방 식었지”
“사는 건 똑같았어? 힘들어서 아프고 그랬어?”
“그럴 이유 없잖아”
1년 전 고등학생 때를 생각하니 우스웠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웃겨 찬준”
그녀는 활짝 웃는 표정을 보였다. 보조개가 보였고 피부색과 대비된 치아가 일반 한국인들보다 하얗고 가지런했다.
“카테리나가 착한 거처럼 찬준도 비슷해”
그녀는 오른손으로 턱을 괴었다. “카테리나는 사랑은 별로 없어. 옛날엔 있을 수 있는데 다른 사람 아이인 소냐랑 같이 살고 남편도 일 안 하고 돈 없어지면서 사랑은 없어졌어. 자기 아기들 키우는 것도 그냥 키운 거야. 그런데 똑같은 상황이면 다른 사람들 화나서 도망가. 나도 그럴 거 같아. 하지만 카테리나 안 그랬어. 그건 찬준처럼 짜증 나도 그냥 산 거야. 찬준 혼자 누구 좋아했을 때 짜증 났고 금방 다시 안 좋아했다고 했어. 근데 똑같이 살았대매? 유지한 거! 그거랑 같은 거야” ‘같은 거야’를 말할 때 왼손으로 허공에 자그마한 원을 그렸다. 턱을 괸 오른손은 그대로였다.
“사랑은 상관없어. 힘들어도 안 도망가고 그냥 하는 거 어려운 건데 카테리나는 자기 죽을 때까지 똑같이 살았어. 그리고 그거가 진짜 착한 거야”
‘사랑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황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지켜내는 것이 착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그녀의 주장은 이러했다. 맞는 말인 것 같았다. 내가 사랑을 모르는 건 이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착할 수도 없다 생각했고 그렇기에 착함의 가치에 얽매이지 말고 살리라 다짐했었다. 그런 와중 그녀가 제시한 의견은 상당히 새로웠다. 하지만 난 카테리나처럼 자식이 있는 것도, 재정이 궁핍하지도 않았고 19세기 러시아에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비슷할 수 있지만, 한국에서 학생으로 살며 대학 및 고등학생 생활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과는 큰 차이라 생각했다.
“착한 거랑 꾸준한 거랑 헷갈리는 거 아냐?”
그녀의 말이 끝나고 살짝 생각한 뒤에 내가 물었다. 그녀는 보조개가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소냐가 Prostitute 되니까 카테리나가 미안해했어. 소냐가 그렇게라도 돈 벌어야 가족 같이 살 수 있단 거 안 거야. 미안해한 거가 조금 사랑 있다는 거일 수 있어. 근데 사랑이 더 많았으면 소냐 Prostitute 안 됐을 거야. 사랑보다 사는 게 더 중요했고 힘낸 거야 카테리나는. 그리고 Prostitute 되는 건 결국 소냐가 결정했잖아. 찬준도 누굴 좋아했을 때 힘쓴 거 있을 거야. 그래야 사는 거랑 느끼는 거가 똑같이 유지되니깐”
고등학교 3학년 야간 자율학습 시간에 핸드폰을 압수당했던 적이 떠올랐다. 연락 확인을 위해 핸드폰을 계속 확인했던 시절이 있었다. 기다리는 연락이 오지 않아 짜증 났고, 짜증을 해소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번 딸쳤던 적도 생각났다. 좋아하는 마음보다 짜증이 더 커짐을 느낀 때부터 슬슬 좋아함을 내려놓았다. 좋아하지 않기 위해서 딸을 치고, 좋아했던 사람을 병신취급 걸레취급 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믿기 위한 하나의 장치였으며 사는 것과 느끼는 것을 동일하게 유지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그녀의 말이 맞다는 증거였다.
“근데 찬준”
과거를 생각하고 있던 무표정의 나와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던 궁금한 표정의 그녀가 눈을 맞췄다.
“어 왜”
“내 이름 안 물어봐?”
“물어봐야 돼?”
“어? 그건 아닌데..”
그녀는 턱을 괸 손을 풀고 아까와 같이 양팔을 책상 위에 겹쳐 올렸다. 그러곤 큭큭 웃었다. “신기해”
“뭐가?”
“찬준!”
고개를 내 쪽으로 까딱했다.
“나?”
“응 나 찬준 같은 사람 만나고 싶었어”
“나 같은 사람이라”
고개를 숙여 책상을 쳐다봤다. 책상을 덮은 유리판에 희미한 흠집들이 많았다.
“특이하단 말 들어?”
“글쎄, 누군가랑 말을 해본 적이 많이 없는걸”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맞네. 아까 친구 없다고 했다”
“슬프고 그러진 않아”
“내 이름은 스테파니야. 한국에선 긴 이름이라며? 그래서 여기 사람들 날 파니라고 불러”
“나도 파니라고 부르면 되나?”
“편한 대로 해”
그녀는 보조개가 참 잘 어울렸다. 입술과 가까운 그녀의 보조개는 미소를 지을 때마다 보였고 눈을 쳐다보는 게 괜히 부끄러울 때면 시선을 두기에도 좋았다.
“내가 특이해 보여?”
내가 말했다.
“응 엄청”
“왜?”
“얼굴에 변화가 없어”
“그건 알아”
“내 이름도 안 물어보고 날 신경 안 써”
“어.. 혹시 그래서 화난 거?”
당황했다. 기분 나쁘게 한 건가 싶었다.
“오우 절대 아니지. 나는 좋아 오히려! 원래 다들 나 보면 어디서 왔고 뭐 하고 몇 살이고 물어보거든.” 그녀는 즐겁게 재잘거렸다. “근데 찬준은 안 그랬어”
“그런가. 몰랐어”
“편하다 해야 하나? 그래서 좋아”
“나도 죄와 벌 이야기 이렇게 길게 누구랑 한 적 처음이야.”
“좋다는 거지?”
그녀는 웃었다.
“물론”
나도 웃었다.
“궁금한 거 없어?”
그녀는 책상 위에 올린 두 손으로 책상을 타닥타닥 두드렸다.
“으음 어디서 왔어?”
“뭐야 신기한 거 물어볼 줄 알았는데 재미없어”
재미없다고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었다. 눈매가 장난기 있는 아이의 눈과 같았다. “필리핀에서 왔어”
“보라카이 가본 적 있어”
어릴 적 부모의 친구들과 함께 가는 가족 동반 여행이었다. 야자수 열매가 신기했던 기억만 남아있다.
“언제 왔어?”
“기억은 잘 안나. 아마 유치원 때?”
“완전 아기일 때 여행은 안 좋은 거 같아. 기억도 안 나고 위험할 수도 있어서”
그녀는 책상을 두드리던 걸 멈추고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그래도 눈은 웃고 있었다.
“필리핀은 보라카이랑 마닐라, 세부 정도만 알아”
“다 놀기 좋은 데야. 난 마닐라에서 왔어. 필리핀 수도”
“그럼 대학생인거지?”
“응 대학생이야. 한국엔 교환학생으로 왔어”
“누나 부자구나?”
스테파니라고 할까 파니라고 할까 생각하다 왠지 낯간지러워서 이름 없이 누나란 호칭으로 질문만 했다.
“뭐라는 거야. 부자는 아니야”
보조개가 사라졌다. 미소를 거둔 그녀의 얼굴은 처음 봤을 때와 똑같았지만, 이미 웃는 얼굴이 익숙해진 나로선 뭔가 이질감이 드는 얼굴이라 생각했다. “근데 나 부자같이 보여?” 그녀가 질문했다.
“그랬으면 좋겠어?”
예민할 수도 있는 질문인 거 같아 되물었다.
“음 조금? 한국 사람들 필리핀 사람이라고 하면 안 좋게 보는 것 같기도 해서. 부자처럼 보이는 게 좋을 수도 있겠다”
대답을 듣곤 멈칫했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부자처럼은 안 보여. 고등학생처럼은 보여”
“뭐야 진짜”
그녀가 입을 벌리고 웃었다. 진심으로 웃는 것 같았다. 몸을 살짝 뒤로 젖혔다 앞으로 했다. “왜 왜?”
“머리카락만 빼고 보면 스타일이 한국 고등학생이랑 비슷해”
“좋은 거야?”
“누나가 어려 보이는 걸 좋아하면 좋은 거겠지?”
“그런데 찬준, 누나라고 하지 마 나한테”
다시 보조개가 보였다. 그녀는 웃음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웃음이 사람 간의 장벽을 허문다는 말은 맞는 말이었다. 스테파니의 보조개를 자꾸 보니 이 사람이 낯선 사람이라는 거부감은 허물어졌고, 미소 짓는 얼굴을 마주하고 길게 대화하다 보니 스테파니가 편해졌기 때문이다.
“아깐 누나라고 하는 게 좋다며?”
“이름으로 불러. 그거가 더 좋아”
“알았어”
“또또 궁금한 거 말해봐”
“파니라고 부르는 게 낫다고 했지?”
“응 근데 찬준 편한 대로”
그녀는 팔소매를 매만졌다.
“궁금한 거 생각 좀 할게”
편해지긴 했지만, 궁금한 건 별로 없었다.
“그럼 내가 물어볼래”
그녀가 말했다.
“나 머리카락 어때?”
나와 관련된 건 아니었다.
“잘 어울려”
“그래? 이상해 보이진 않아?”
“머릿결이 좋아 보이진 않아”
금발이 어울렸지만, 탈색을 많이 해서 그런지 푸석푸석해 보였다.
“맞아. 나 스타일 바꿀 거야”
그녀는 자신의 금빛 긴 머리카락을 오른손으로 쓰다듬었다.
“뭘로?”
“비밀. 나중에 봐”
장난기 있는 시선이 자신의 머리카락에서 내 눈으로 향했다,
“아 나 궁금한 거 있어”
내가 말했다.
“말해줘! 뭐야?”
“필리핀이면 영어권 국가고 보니까 누나도.. 아니 파니도 영어 잘할 거 같은데 왜 영어로 대화 안 해? 대화하다 어려우면 상대방한테 말하면 되잖아”
한국어 발음이 좋다고 해도 스테파니는 한국에 온 필리핀 유학생이라 영어가 더 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와 대화할 때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내가 영어로 짤막히 해석해 주기도 했고, 나 또한 영어로 의사소통함에 있어 거부감은 없으니 배려하는 마음으로 질문했다.
“맞아. 근데 영어 안 쓸 거야”
“왜?”
장난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난 의아했다.
“그냥”
“뭐야”
“나 한국에서 영어로 말하고 싶진 않아”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새로운 사람은 새로운 말을 하고 새로운 데에서 새롭게 배워. 한국에 공부하러 왔는데 편한 말로 살고 싶지는 않아. 한국말로 배우고 싶어 많이. 그래서 말 공부하고 처음 한국 왔을 땐 일부러 말도 걸고 살았어”
신기했다. 멋있기도 했다. 뭐가 되어도 되겠단 사람이란 말의 필리핀식 표현을 몰라서 말해주진 못했지만, 대단하다고 했다.
“그냥 한 거야. 대단한 거 아니야”
쑥스러웠는지 대답하며 날 쳐다보지 않았다. 책상 위에 올려둔 내 가방을 건드렸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의 시간이 잠시 이어졌다.
“그래서 아까 나한테 말 걸었던 거구나”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내 가방을 쳐다보며 질문했다.
“그건 아니야. 요샌 말 안 걸어 별로. 찬준한텐 말 걸고 싶었어. 옆에 책이 있어서 더” 내 가방끈을 만지작거렸다.
“한국 와서 읽은 책은 한글로 번역된 책인가?”
“절반 절반? 긴 책은 영어로 봤어”
“어떤 책들?”
“수업 책 영어 많고, 읽고 싶은 책 한국어로 읽고 있어”
“진짜 대단하네. 쉽지 않을 텐데 멋있다”
“에헤”
칭찬에 어색한 건지 가방끈 만지작거리던 손을 몸 쪽으로 가져왔고 양팔을 책상 밑으로 내렸다.
“아까 우리 만나기 전, 찬준 읽던 책은 뭐야?”
“그거 찰스 부코스키라고 미국 작가 책이야”
“몰라. 근데 부코스키? 러시아 사람 같아”
“미국인이긴 해”
“미국, 찬준은 미국 가본 적 있어?”
“아니 미국은 안 가봤어”
“좋아해?”
“뭐를 미국을?”
“응”
“싫어하진 않아.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을 정말 좋아하고 마크 트웨인이랑 아서 밀러를 좋아하거든”
오른손 엄지로 구레나룻을 긁적였다. 그녀는 다시 팔을 책상 위로 올려 몸을 앞으로 기댔다. 남자 서퍼가 다시 찌그러졌다. “좋아하지 않는 것도 있어. 호머 심슨, 스티브 잡스, 햄버거 같은 건 안 좋아해”
“장난치는 거야?”
그녀는 활짝 웃었고 나는 미소만 지었다.
“호머 심슨은 왜 안 좋아해! 혹시 노란색 얼굴이어서 그런 거야?”
큭큭거리며 웃고 있는 그녀였다.
“어 뭐 비슷해? 노란색 대머리여서 싫어하거든”
유치원 시절 처음 본 심슨 패밀리의 호머 심슨은 썩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지금에야 웃기게 생각하는 장면이지만, 당시 봤던 심슨 패밀리의 첫 장면이 옷을 벗고 춤을 추는 호머 심슨이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도넛은 좋아하지?”
“물론. 대신 커피는 잘 안 마셔”
“흐음 혹시 카페인이 잠 못 자게 해서?”
그녀는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오른손을 턱에 갖다 댔다.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톰과 제리의 제리가 생각났다.
“잘 아네?”
살짝 웃으며 의자에 등을 기댔고 양손으로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그녀와 이야기하는 게 재밌었다.
“학교 앞에 맛있는 도넛 하는 데 있어. 가자 나중에 거기”
그녀가 오른손을 턱에서 떼고 보조개가 잘 보이게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그러자. 도넛 좋지”
“찬준 나 책 빌려줄래?” 오른손 검지로 내 가방을 가리켰다.
“읽을래?”
상담실 바깥 바로 앞에서 누군가 재채기를 했다. 그녀는 몸을 잠시 틀어 상담실 방문 쪽으로 시선을 줬다가 다시 날 쳐다봤다.
“응 읽고 싶어”
그녀는 오른손을 책상 위에 올리고 고개를 세 번 크게 끄덕였다.
“언제 줄 건데?”
난 가방으로 손을 뻗었다.
“길면 오래 빌리는데...!”
갑자기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이거 시집이어서 금방 읽을 거야”
가방 지퍼를 열었다. 지이익. 간만에 사람 목소리가 아닌 다른 무언가의 소리가 방 안을 채웠다.
“좋아! 다음 주에 줄래!”
그녀는 다행이라는 듯이 책상에 기댔던 몸을 의자 등받이에 기대었다. 풀썩하는 소리가 났다.
“목요일 6시 여기 앞에서 만나자!”
의자에 기댔던 몸을 다시 휙 하고 책상 쪽으로 기댔다. 양손은 어느새 나를 향해 뻗어 있었고 시선 또한 가방을 열어 부코스키의 시집을 꺼낸 나를 향해 있었다.
“고마워 나 이거 읽고 이야기하고 싶어”
“조금 선정적일 수도 있어”
가방의 지퍼를 잠그며 내가 말했다.
“선정적일?”
“자극적이란 말인데”
작가의 얼굴이 흐릿하게 인쇄된 회색깔 표지의 시집을 건네며 말했다. “Provocative야 이 책”
“아하” 그녀는 책을 건네받고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 더 흥미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런 거 좋아해 찬준?”
“싫어하진 않아”
“찬준은 사람이 조용해”
책에 관한 흥미만큼이나 나에 대한 흥미도 상당해 보였다. 책을 책상에 내려두고 나를 쳐다봤다. “전부 비슷하게 좋아하는 거 같아. 완전 싫어하는 건 없어?”
“완전 싫어하는 거라”
고래를 살짝 들어 방문 위의 허공을 응시했다. 흰색의 벽지는 약간 노란빛이 돌았다.
“왠지 없을 거 같아”
그녀가 말했다.
“아냐 있는 거 같은데”
고개를 내리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뭐?”
“기분 나쁘게 하는 거는 완전 싫지”
“찬준 기분 나쁘게 하는 거 뭐야?”
“엄청 시끄러운 거랑 더운 날씨랑 내가 모르는 내 이야기하는 거...”
과거를 생각하며 기분 나빴던 적을 곱씹고 있었다. 김민재를 생각하다 김선웅이 생각났고 동아리 생각이 났다. 오늘 보기로 했던 뚱뚱한 여자 동기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바로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험을 치느라 핸드폰 알림을 무음으로 해뒀던 걸 생각 못했다.
- 찬준아 나도 시험이라 일찍 끝낫어! 지금 2층으로 갈게
- 사무실 앞인데 어디야?
- 찬준아???ㅁ?
마지막 문자가 7분 전이었다. 거기다 전화가 2통이 와 있었다. 바로 전화를 걸었다. 받지 않았다.
- 선미야 어디야?
- 연락 방금 봤어 미안
문자를 보냈다.
“왜 그래?”
내게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해 보였다.
“기다리던 친구가 연락했었어”
문자를 확인하며 시선은 핸드폰에 두고 그녀의 말에 대답했다.
“찬준은 실장님 기다리는 거잖아?”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했다. 뭔가 착각하는 것 같았다.
“아냐. 약속 있어서 기다리는 거였어”
핸드폰 알림 소리를 최대로 키우고 주머니에 다시 집어넣었다. 앉은 채로 가방을 멨다. 혹시 사무실 밖에 있을까 하는 맘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도 같이 일어났다.
“몰랐어.. 난 찬준 실장님 기다리는 줄 알았어”
자기가 미안해했다. 당황하는 모습이 뭔가 귀여워 보였다.
“괜찮으니깐 그냥 앉아있어”
난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싫어 나도 나갈래”
그녀가 상담실 문을 열었다. 문을 여니 사무실 사람들이 두런두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고 커피 냄새가 풍겼다.
“일해야지?”
상담실 문을 닫고 그녀에게 물었다.
“응 맞아”
앉아있느라 잊고 있었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그녀는 키가 작았다. 내 목에서 가슴에 닿는 신장이었고 가까운 곳에 서 있는 그녀의 정수리가 보였다. 탈색한 금발 머리카락의 뿌리 색깔은 검은색이었다.
“다음 주에 만나 그럼”
“으응 찬준 잘 가”
왼손에 시집을 든 그녀는 오른손을 들어 내게 인사했다. 몇몇 사무실 사람들이 쳐다봤고 그녀는 살짝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유리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주위를 둘러봤지만, 복도 끝에서 대화하는 보헤미안 스타일의 남자 한 명과 짧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을 제외하곤 아무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봤지만, 현재 시각만이 표시됐고 연락은 없었다. 시간은 오후 3시 17분이었다.
목요일 하루종일 여자 동기에게 연락은 없었다. 저녁 먹을 때쯤 전화를 해봤지만, 받지 않았다. 언젠간 연락을 주겠거니 생각했고 그날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연락이 온 건 다음 날 오후였다. 바로 집을 가야 했어서 연락 안 되는 나를 기다릴 수 없었다고 한다. 강의실 사용 사유서는 사진 찍어 보낼 테니 문자로 제출 양식을 설명해 달라했다. 작성해야 되는 부분들에 관해 설명해 줬고 고맙다는 말과 함께 편의점 쿠폰을 보내줬다. 5000원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