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에서 김민재를 만나도 인사는 예전처럼 했다. 교정을 걷다 동아리 선배와 마주치면 고개만 까딱했다. 지난 학기와 비슷하게 수업만 들으러 학교에 가는 일이 반복됐고 일주일에 한 번이긴 했어도 2달 정도 참여했던 동아리 모임이 사라지니 약간은 심심한 감이 있었다. 탈퇴 후 2주 정도 지났을 때 같은 동아리이었던 뚱뚱한 여자 동기에게 연락이 왔다. 강의실 사용 사유서 작성을 어떻게 하냐는 연락이었다.
- 찬준아 잘 지내? 너 동아리 나가곤
인사도 제대로 못한 거 같아서 이렇게
연락햇어!
- 어 잘 지내지
- 그렇구나 다행이다ㅎㅎ 혹시 동아리
관련해서 뭐 하나 물어봐도 괜찮아?
- 뭐?
- 강의실 사용 사유서를 작성해야 하는데
작성 양식을 내가 몰라서ㅠㅠ 너가 전에
작성햇엇자나? 그래서 좀 알려줄 수 있나
해가지구
- 그거 선배들이 알려주잖아
- 응..ㅎㅎ 근데 아직 시험기간이어서
끝나고 알려준다는데 바로 다음 주에
강의실 빌릴 일이 잇어ㅓ
- ㅋㅋ그래 양식서 사진 보내봐
표시해서 줄게
- 아냐아냐! 너 목욜에 사회관 수업잇지?
나도 그때 사회관 수업이어서 끝나고
내가 기다릴게
- 그래 그러자
- 고마워! 목요일에 봐^^
목요일 사회관 수업은 2학기 중간고사였다. 2시간 일찍 끝났지만, 덕분에 내가 기다려야 했고 1층에서 기다린다고 문자를 보냈다.
- 시험 때문에 일찍 끝났어 1층에 있을게
사유서 제출은 학부 사무실에서 해야 한다. 학부 사무실은 사회관 2층에 있다. 동기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 아니다 2층 학부 사무실 앞으로 와
정수기 옆 복도 의자에 앉아서 여자 동기를 기다렸다. 정수기 옆에 있으니 지난번 사무실 방문이 생각났다. 대충 작성한 바람에 두 번 쓰게 된 강의실 사용 사유서와 레몬맛 사탕, 그리고 금발 동남아 유학생.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을까 핸드폰으로 유튜브를 볼까 고민하다 책을 꺼냈지만, 정수기에서 물통에 물을 받는 사람을 보고 책을 덮었다. 금발의 동남아 유학생이었다.
옆 의자에 책을 내려놓고 그녀를 쳐다봤다. 정수기와 3미터도 안 되는 거리라 그런지 내가 쳐다보는 걸 의식한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말을 걸 생각은 없었다. 총 두 번 만났지만, 한 번은 사탕을 씹으며 지나친 게 다였고 나머지 한 번은 나만 알고 있는 만남이었으니깐. 그녀와 난 철저한 남이었다.
“저기 안녕하세요?”
그런데 그녀가 인사했다. 물통 안으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어 네 안녕하세요”
“실장님 기다려요?”
자취방 건물에서 봤을 때처럼 한국어 발음은 좋았다.
“실장이요?”
“실장님 아직 안 왔어요. 기다려야 됩니다”
“다른 사람 기다리고 있어요”
“누구요? 대리님은 있어요”
내가 사무실 사람을 기다리는 줄로 보였던 모양이다. “사무실에서 기다려요. 복도 시끄럽습니다”
시험이 끝나 떠드는 학생들의 소란스러움과 옆에 둔 책의 언벨런스가 그녀의 배려심을 자극한 것 같았다. 어차피 동기가 오면 사무실 안에서 사유서 작성법을 알려주는 것이 더 편하니 이왕 권유받은 김에 알겠다 하고 가방을 열어 책을 집어넣었다.
“무슨 책입니까?”
흐르는 물소리가 끊겼고 그녀는 플라스틱 물통의 뚜껑을 돌려 잠갔다. 정수기에서 몸을 틀었고 양팔로 물통을 감싸 안았다. 물통은 2리터 정도 되어 보였고 포터 트럭 색깔의 칙칙한 푸른색이었다. 그녀의 작은 몸통 3분의 1을 가렸다.
“찰스 부코스키 책이에요”
“재밌어요?”
“네”
확실히 그의 작품은 재밌다. 영화적이고 컬트적이다. 그의 글을 읽을 때면 타란티노의 유머가 섞인 데이빗 핀처의 섹스 장면을 보는 기분이다.
“난 잘 몰라요 그 작가”
“몰라도 상관은 없죠”
난 가방을 어깨에 걸쳤다.
“난 도스토예프스키 좋아요” 그녀는 한 명의 러시아 작가를 이야기했다. 문학을 알 거라 생각 못 한 인간의 입에서 도스토예프스키란 단어가 나온 것이었다.
“책 읽는 거 좋아해요?”
“나 영문학과예요 책 좋아합니다”
물통을 들고 살짝 웃는 그녀의 얼굴에 보조개가 생겼다. 볼이 아닌 입꼬리 근처였다. “몇 학년에요?”
“1학년이요” 나는 가방을 멘 채로 어정쩡히 서 있었다.
“이십 살?”
“네”
“난 이십삼 살에요”
“그렇게 보이진 않는데”
“나이 많아 보입니까?”
오른손으로 플라스틱 물통을 받치고 왼손으로 자기 얼굴을 만졌다.
“더 어리게 봤어요”
키도 작았고 진청색 스키니진에 맨투맨을 입고 있었다. 맨투맨은 흰색, 서핑하는 남자가 프린팅 되어 있었고 주로 여고생들이 입을 법한 옷이어서 스무 살이었던 나와 동갑으로 봤다.
“몇 살로?”
“스물 정도?”
서핑하는 남자는 가을 날씨와 어울리지 않았다. “우선 사무실로 들어가죠”
“아 네! 들어가면 방에 앉아요”
학부 사무실은 조용했다. 복도의 어수선한 분위기가 유리문 하나를 두고 차단되었다. 사무실에 만연한 싸구려 커피 믹스 냄새는 일하는 사람들의 기운을 가라앉히고 있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말에 높낮이가 없어 내게 묻는 말이란 걸 인지하는 데 몇 초가 더 소요됐다.
“누굴 좀 기다리려고요”
“실장님 삼십 분은 되어야 오세요”
안내 창구에 앉아 마우스로 반복적인 클릭 소리를 내는 여자였다. 학생처럼 보였다.
“그건 아니고 어떤 학생을 기다리는데요”
“업무 보러 오신 거 아니세요?”
“그 친구 오면 강의실 사용 사유서 제출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저기 안쪽 방에서 기다려도 되나요?”
“네에 상담실에 계세요 그럼”
안쪽 방이란 건 상담실이었다. 두꺼운 유리판이 덮인 오래된 큰 나무 책상이 있었고, 원형의 책상은 방문 쪽에서 바라봤을 때 11시 방향 모서리가 검게 그을려 있었다. 내 자취방 평수 정도인 상담실은 상담실이라 하기엔 좀 넓었지만, 의자는 푹신했다. 가방을 책상 3시 방향에 올려두고 방문을 바라보는 쪽 의자에 앉아 도스토예프스키를 좋아하는 스물셋 그녀를 기다렸다.
“파니 언니 시험 몇 개 남았어?”
“나 한 개 남았어”
“완전 부러워. 나는 아직도 세 개나 남았는데”
“아니야 우리 다 힘내면 돼!”
문을 닫지 않고 의자에 앉았던지라 상담실 바깥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의 목소리였고 그녀의 이름은 파니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