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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함성인 Jul 09. 2023

우울한 행복

Time Lapse - 3

 시끄러웠던 학과 MT와 학부 학생회에서 주최하는 선 · 후배 간의 쓸데없는 만남의 장, 입학 후 두 달 정도 붙어 다닌 학과 동기들과 14번의 술자리, 자취방에서 흘려보낸 스무 살 여름방학을 끝낸 뒤 2학기 때부턴 좀 변해보고자 했다. 인생에 딱히 도움 될 것 같지 않은 과동기들이 있는 집단엔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선배들을 선택했다. 나이가 다르다는 이유로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고, 자기 후배랍시고 챙겨주려는 인간들과 같이 있으면 여러모로 괜찮은 생활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들어간 것이 학부 주임교수가 담당으로 있는 창업동아리. 학과 소속 동아리에다 흔히 말하는 인싸가 없는 동아리여선가 인원은 11명으로 많진 않았다. 1학년은 성격 밝은 뚱뚱한 여자애 한 명뿐이었다. 매주 1회, 월요일 오후 5시 교수 연구실에 모여 스타트업과 벤처 기업, 주식과 관련한 내용에 관해 토론하고 교수가 운영하는 작은 회사에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긁어모았다. 학기 중반 무렵 핀테크를 주제로 대학생 경제학 공모전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금상까지 받았을 정도로 열심히 참여했고 실속 있는 동아리였다. 상을 받은 후부턴 과동기들도 관심을 가졌다. 같은 강의를 듣는 애가 너희 동아리에 어떻게 들어갈 수 있냐고 말을 건 게 시작이었다.


"찬준아 너희 동아리 신입부원 모집 안 해?"
 6번째 술자리에서 감성주점 바닥에 토를 했던 병신이었다.
"학기 초에만 모집하는 걸로 알아"
"아 진짜? 그럼 혹시 또 모집하는지 거기 선배한테 물어봐주라"
"나 선배들이랑 별로 안 친한데"
 거짓말이 아니었다. 월요일 오후 5시부터 7시, 공모전 이후 회식을 제외하곤 선배들과 따로 만난 적은 없었으니깐. 동아리 학습 주제 관련한 연락은 종종 왔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지진 않았기에 나와 친하다 볼 순 없었다.
"그래도 물어봐 줄 수 있어? 나 거기 2학년 형이랑 수업도 같이 들어서 친해"
"친하면 너가 물어보지 그러냐?"
 강의에서 얼굴 몇 번 보는 걸로 충분한 동기였다. 월요일 오후 5시마다 정기적으로 보고 싶진 않았다. 실제로도 본인이 친하다면 본인이 물어보는 게 맞다 생각했다. 내 말에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곤,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 끼우고 있던 펜을 빙빙 돌리며 알겠다는 말과 함께 대화는 끊어졌다.
 그다음 동아리 모임 때 신입부원을 다시 뽑자는 의견이 나왔다. 동아리 인원의 대부분이 3학년, 4학년이니 미리 신입부원을 받지 않으면 다음 학기엔 동아리 운영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게 이유였다. 2학년 형이 낸 의견이었고 2학년 형과 사귀는 3학년 누나가 좋은 의견이라고 맞장구쳤다. 3학년 누나는 동아리 대표였다.

 그렇게 해서 동아리 홍보가 다시 시작됐다. 나는 학과 게시판에 광고 대자보를 붙였다. 공모전 금상 수상이라는 문장을 적어 넣어서인지 생각보다 많은 수의 사람이 지원했다. 학기 초 나와 뚱뚱한 여자 동기가 지원했을 땐 바로 가입 가능했지만, 이젠 면접을 봐서 사람을 골라야 했다. 1학년 새내기는 나이가 어려 사람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선배들의 배려로 나와 동기 여학생은 신입 부원 면접에 참여할 필요가 없었다. 4학년 선배들 또한 취업 준비로 바쁘기에 면접에 참여하지 않았다. 면접은 비어있는 강의실을 쓰기로 했다. 담당 교수가 동아리 면접 시간에 자기 연구실에서 다른 교수들과의 볼일이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강의실 사용 사유서를 작성하고 학부 사무실에 제출하는 것은 안목 없는 1학년생인 내가 맡았다. 대충 휘갈겨 적은 뒤에 학부 사무실로 갔다. 지문 자국이 그득한 유리문을 당겨 열었다. 사무실엔 업무를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1학년 당시엔 전부 직원이라 생각했지만, 막상 대학 교직원들보다 근로장학생이 태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2학년이 되어서였다.


 케이블 드라마에 나오는 90년대 은행 창구처럼 생긴 학부 사무실은 단풍에 물든 교정의 모습과는 대비되었다. 눅눅한 공기에 싸구려 커피 믹스 냄새, 생기 없는 근로장학생들의 얼굴뿐이었다. 시끄러운 야외보단 나았지만, 오래 있진 않아 강의실 사용 사유서를 얼른 제출했다. 담당 업무를 보는 면도 자국이 있는 남자가 말했다.
“진리관 208호 맞으시죠?”
“203호인데요”
“이거 글씨를 너무 날려 적어서 알아보기 어렵거든요? 이 부분만 좀 수정해 주세요.”
 2분 만에 휘갈겨 적은 사유서엔 나의 괜한 귀찮음과 짜증이 대신 적혀있었으니 못 알아볼만했다. 한 부분만 수정해 달라 했지만, 혹시 다른 부분도 못 알아보고 다시 또 수정하라고 할까 봐 그냥 전체를 다시 작성했다. 재작성한 사유서를 제출한 뒤 창구 위에 놓은 썬키스트 레몬맛 사탕을 하나 집어 들었다.
“다됐어요.”
“가면 되나요?”
“네”
 면도 자국이 있는 남자는 피곤해 보였다.
“안녕히 계세요”
 사탕 봉지를 까면서 인사했다. 그리고 사무실 안쪽 문이 열렸다. 문에서 나오는 것은 야외의 단풍과도 어울리지 않고 학부 사무실의 축 처진 분위기와도 어울리지도 않는, 샛노란 금발 머리의 유학생이었다.



 지난 학기 때 자취방 4층에서 본 여자였다. 머리는 가슴 부분을 덮었고 여전히 푸석푸석해 보였다. 동남아인 특유의 어두운 피부색이 금발의 머리색을 부각했다. 손에는 플라스틱 물병을 들고 있었고 얇은 회색 니트와 달라붙는 검은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건기와 우기밖에 존재하지 않는 더운 지역에서 온 사람이 털옷을 입고 있단 사실이 우스웠다.
 사무실 유리문 옆에 있는 청록색 쓰레기통에다 사탕 봉지를 버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동남아 유학생이 커피잔을 들고 따라 나왔다. 입안에서 레몬 맛 사탕을 굴리며 따라 나온 유학생을 슬쩍 쳐다봤다. 유학생도 나를 흘끔 쳐다봤다. 지난번 건물주 남편과의 대담에서 봤을 땐 구석진 곳에 있어 잘 보이지 않았는데 형광등이 밝게 켜져 있는 곳에서 보니 피부는 태닝 한 것과 같은 생기 있는 구릿빛이었다. 할리우드 여배우처럼 금발이 잘 어울렸다. 왼쪽 어금니로 사탕을 깨물었다. “까드득” 소리가 조용한 복도를 순간 조용하지 않게 만들었다. 복도 중간에 있는 정수기에서 물병을 채우고 있던 유학생이 날 바라봤다. 코는 낮았고 키도 작았다. 슬림한 쪽에 가까운 평균 체형이었다. 어두운 피부 탓에 몇 살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다만 피부색과 금발 때문인지 90년대의 머라이어 캐리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이목구비가 뚜렷하진 않았지만, 덕분에 낮은 코가 넓적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래도 미인은 아니었다.




 동아리에 신입부원들이 들어오고부터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11명이었던 동아리는 스무 명이 넘었고 신입부원들은 전부 1학년, 그중 남학생은 2명이었다. 내게 동아리에 관해 물어본 남자 동기도 2명 중 한 명이었다. 담당 교수는 인원이 늘었다며 좋아했고 전체 회식을 제안했다. 교수가 회식비를 지불하진 않았다. 학교에서 주는 동아리 지원금으로 삼겹살집을 갔다. 냉동 삼겹살만 주는 무한리필 집이었지만, 목살과 껍데기도 같이 나와 다양하게 먹을 순 있었다. 교수 없이 2차로 술집엘 갔다. 삼겹살집 바로 옆 어우동이라는 주점이었다. 동아리 대표 3학년 누나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테이블 위의 초록색 소주병들은 점점 비워졌다. 같은 수업을 듣는 그 남자 동기는 오뎅탕과 소주 2병을 위장에 들이부었고 지난번 감성주점 바닥에다 토를 한 이야기를 자꾸 떠들어댔다. 3학년 4학년 선배들은 새로 들어온 1학년 여학생들과 가까이 붙어 앉아있었다. 남자 동기가 3번째 소주병뚜껑을 돌리려 하자 동아리 대표 누나의 남자 친구이자 그 녀석이 자기와 친하다고 했던 2학년 형이 말렸다.
“야 그만 마셔. 그러다 또 토한다 인마”
“뭐래 형 나 아직 취하지도 않았어”
 발음이 부정확했다.
“야야!”
 2학년 형이 말렸음에도 취해서 기분이 좋았던 건지 소주병을 까면서 병을 손에 쥔 채 팔을 두어 바퀴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가스버너 위의 오뎅탕을 엎었다.
“시발 그만하랬지!”
 2학년 형이 화를 냈다.
“병신새끼야 뭐 하냐 진짜! 형 괜찮으세요?”
 또 다른 1학년 남학생이 말했다.
“개 짜증 나네 찬준아 일단 알바 좀 불러라”
 2학년 형 옆에 앉은 동아리 대표 누나가 눈썹을 찡그리며 말했다. 난 알바생을 불렀고 알바생은 걸레를 가지고 와 테이블 위에 흘린 식은 오뎅과 파 쪼가리를 닦았다. 오뎅탕 냄비를 가져갔고 가스버너도 가져갔다. 다친 사람은 없었다. 그 병신 앞자리 앉은 여자애 두 명에게 오뎅 국물 냄새가 진동할 뿐이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러나 취한 사람의 판단은 그렇지 않았던 것 같다.
"야 국물 하나 더 시키자"
 김민재의 발음은 부정확했다.
"선배, 얘 집에 보내죠"
 1학년 남학생이 대표 누나에게 말했다.
"됐어 냅두자 이러다가 말겠지"
 대표 누나의 남자친구인 2학년 형이 대신 말했다.
"뭘 냅둬야 앞에 애들 국물 다 튀기고 표정 안 좋은 거 안 보여? 빨리 집에 보내"
 대표 누나가 쏘아붙였다.
"누나 왜 그래 나 잘 마실 수 있는데"
 김민재는 팔과 고개를 흔들거렸고 만약 흐물거리며 움직이는 낙지가 인간의 말을 한다면 이런 느낌이겠니 생각했다.
"시끄러 집에 가. 너 민재 자취방 어딘지 알지?"
"아뇨 어딘지 몰라요"
 1학년 남자 동기는 말했다.
"찬준이는 알아?"
"위치만 대충 알아요"
 불행히도 난 알고 있었다.
"그럼 좀 데려다주고 와라"
"예"
 병신 하나 때문에 귀찮은 일이 생겼다. 시끄러운 술자리를 즐기는 건 아니었지만 좋아하지도 않는 놈을 위해 왔다 갔다 하는 건 더 별로였다.
"야 일어나"
 김민재의 팔을 잡고 일으켜 세우려 했다.
"이제 나 멀쩡함. 아깐 그냥 실수한 거야"
 팔을 휘적이며 내 손을 뿌리쳤다.
"가자고 선배들이 너 나가래잖아"
"아까 선웅이 형이 냅두라고도 했다. 나 괜찮다고"
 다시 팔을 잡았던 내 손을 다시 뿌리쳤다. 팔 돌리는 게 술버릇인 것 같았다.
"나와"
 팔을 좀 세게 움켜줬다.
"꺼지라고 새끼야"
"그냥 일어나"
 무미건조한 말투로 내가 말했다.
"씨발놈아!"
 자기 옆에 앉은 1학년 여자 동기의 몸을 칠 정도로 팔을 크게 휘둘렀다. 가라앉은 분위기는 괜찮아지긴커녕 험악해졌다.

“존나 니 전부터 왜 계속 빡치게 하냐”
 내가 전에 기분 나쁘게 대한 적이 있나 빠르게 곱씹었다. 없었다.
“뭔 말이야”

 내가 되물었다.
“쟤 취했네. 집 보내자”
 1학년 여학생에게 추근덕거리던 안경 낀 4학년 남자 선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김민재가 앉은자리로 왔다. 그도 취했는지 비틀거렸다.
“넌 새끼야 진짜 존나 좆같아”
 김민재가 계속 말했다. 나는 계속 궁금했다. 내가 언제 얘를 화나게 한 적이 있는지 김민재의 얼굴을 쳐다보며 기억을 되짚었다. 술 때문인지 화 때문인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찬준아, 잠깐 나와라”
 이름은 김선웅, 김민재랑 친한 2학년 형이 날 주점 밖으로 불렀다. 4학년 선배가 김민재를 일으키고 먼저 밖으로 나갔다. 다른 3학년 형 한 명도 같이 나갔다,

“민재 쟤 취하면 좀 이상해”
 선배들을 따라 자취방으로 가는 김민재의 뒷모습을 쳐다봤다. 2학년 김선웅이 담배를 꺼냈다.
“제가 실수한 게 있나 보죠”
“애가 좀 감성적이어서 뒤끝이 지려”
 말보로 레드였다. 한 개비를 권했다.
“아뇨 안 펴요”
“너 민재 싫어해?”
“딱히 그렇진 않아요”
“그래? 싫어해도 상관은 없어”
 술 냄새 섞인 담배 연기가 김선웅의 입에서 뿜어져 나왔다.
“전에 수업 때 애 쪽팔리게 한 적 있대매”
 근처 다른 술집의 소음 때문에 거리가 더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런 적 없는데요”
 몇 초 정도 생각하는 척했다. 아무래도 수업 중 동아리 신입부원 관련해서 내게 물어봤던 걸 말하는 것 같았다.
“진짜 없어? 니가 은근히 꼽줬다는데?”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지”
 오른손 검지와 중지 사이 끼워놨던 담배를 다시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빨았다. “나는 진짜 괜찮은데 다른 사람들이 좀 불편한가 보더라”

 자고로 ‘나는 괜찮은데’, ‘나는 잘 모르겠는데’로 시작되는 모든 말들은 자기가 제일 불편하고 가장 신경 쓴다는 뜻이다. “어떤 거요?”
“그냥 너 말투나 태도 이런 게 좀 거슬리나 봐”
 맞은편 술집에서 여자 둘이 나왔다. 김선웅은 그쪽을 쳐다봤다. “민재도 그렇고 다른 선배들도 그게 좋게 보이지는 않는가 봐”
“예의가 없어 보이나요?”
“그런 거 같던데, 니 안 좋은 얘기 많이 들리더라. 틱틱대는 게 예의 없어 보이는 거지. 그리고 딴 사람 생각 안 하고 너 할 일만 하는 것도 좀 그런 거 같고”
 길 건너 여자 둘은 전자담배를 꺼냈다. 스키니진의 한 명은 쭈그려 앉았다.
“주의하겠습니다”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으니까 사람 대하는 거 어려운 거 아는데 그냥 시발 적당히 눈치 보면서 하면 돼”
 눈은 여자 둘을 쳐다보면서 담배를 끼운 손으로 내게 어깨동무를 했다. 스물한 살의 김선웅의 팔은 얇았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솔직히 좆같았다. 내 어깨에 두른 담배 냄새나는 팔 때문에 더 짜증 났다.

“저 먼저 가볼게요”
 김선웅의 팔을 걷어냈고 그 길로 자취방에 돌아갔다. 걸어가며 뒤돌아본 김선웅의 표정엔 당황과 어이없음이 묻어 있었고 그게 내가 창업동아리 소속으로 본 그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이전까진 나에 관한 좋지 않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 생각했고 그걸 내가 알게 되어도 무신경하게 넘길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막상 나에 관한 험담을 직접 듣게 되니 그럴 수 있지란 생각 하나로 감정을 무시할 순 없었다. 그래도 여기까진 이해한다. 기분 한번 나쁘고 끝날 수 있으니깐. 기분이 좋지 않음을 넘어 아주 좆같았던 이유는 자기는 아니란 태도로 넘기는 김선웅 같은 놈의 태도 때문이다.
 선배라는 족속은 자신을 좋아하는 티를 내는 살가운 후배를 원한다. 선후배 관계를 넘어 어딜 가든 웬만한 인간들은 전부 비슷할 것이다. 난 가식을 싫어한다. 말이 별로 없을 뿐이고 개인적인 친분을 쌓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동아리 선배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동기들과도 마찬가지였다. 그냥저냥 걷다 인사하는 정도의 친분만 유지하는 것이 좋았다. 내 방식대로 편히 행동한 이러한 모습이 일반적인 대학생들의 눈에는 아니꼬워 보였나 보다. 의미 없는 연락을 이어가고 먹기 싫은 점심을 함께 먹는 게 정상인 인간들에겐 내가 불편했던 것이다. 그렇게 당사자인 내가 빠진 그들만의 대화에서 ‘찬준이는 걔는 왜 그러냐’ 하는 말부터 ‘사회성이 좀 별로인 거 같아’, ‘애가 눈치가 없네’로 이어지며, 내가 본인을 쪽팔리게 했다고 생각하는 김민재의 불만 섞인 하소연은 화룡점정. 나는 선배들에게 살갑지 않은 찬준이에서 사회성 없는 이기적인 새끼가 된 것이다.
 험담이든 미담이든 간에 남 이야기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이야기는 당사자의 귀에 들리지 않게 함이 예의다. 예의 챙기는 건 어려운 게 아니다. 호기심을 줄이고 말을 아끼면 된다. ‘강찬준은 사회성 없는 이기적인 새끼’란 주관적 결론을 도출해 낸 사람 중 핵심 인물이었을 김민재와 동아리 대표 누나는 적어도 내게 티를 내진 않았다. 그런데 김민재의 친한 형이자 대표 누나의 남자친구인 선배 김선웅은 티를 냈다. 술 마시면 병신 되는 김민재의 지랄이 시발점이었다곤 해도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다. 내 말투나 태도가 거슬린다는 말을 무슨 다른 이들의 대언자 마냥 전하고 막상 자기는 괜찮다며 쿨한 척하는 김선웅의 모습은 역겨웠다. 진짜 자기가 괜찮았으면 내게 말을 전하진 않았을 거다.



 자취방에 들어와 핸드폰으로 너바나의 Smells Like Teen Spirit을 들었다. 나쁜 기분을 더 나쁘게 만들기 좋은 곡이었다. 의자에 앉아 2번 반복해서 들었다. 이번엔 귀에다 이어폰을 꽂고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볼륨 15였다. 평소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을 때면 볼륨 6을 넘기지 않지만, 가끔 감정에 휩쓸리고 싶을 땐 11 이상으로 키운다. 너바나 Nevermind의 트랙 리스트를 순서대로 들으며 적당한 분노를 키웠다. Lithium이 흘러나오자, 형광등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양말도 벗지 않고 옷도 갈아입지 않았지만 편안했다.
 새벽인데도 동아리 선배들에게 많은 연락이 왔다. 동아리 일 관련해서가 아닌 괜찮냐는 문자 메시지들이었다. 김선웅이 자신의 어깨동무를 제끼고 가버린 버릇없는 후배 이야기를 했을 테니 걱정을 핑계로 지들 호기심에 한 연락일 것이다. 전화가 오기도 했다. 4학년 남자 선배 한 명, 동아리 대표 누나, 뚱뚱한 여자 동기가 전화를 걸었다. 전부 씹었다. 즐거웠다. Something in the Way를 들으며 볼륨을 5로 줄였다. 귀가 좀 먹먹해진 것 같았고 바깥은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이었다.


 자고 일어났더니 오전 10시였다. 화요일은 다행히 오전 수업이 없다. 이어폰은 오른쪽 귀에만 꽂혀있었다. Breed가 나오고 있었고 핸드폰 배터리는 9퍼센트였다. 뜨거운 국물을 먹고 싶었다. 핸드폰을 충전기에 꽂아두고 귀를 후비며 라면을 끓였다. 먼저 냄비에 물을 받아 팔팔 끓였다. 끓는 물에 후레이크를 넣었다. 일 분 정도 지나고 고깃국 비스름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가 좋아 난 항상 후레이크를 먼저 는다. 냄새를 맡은 후 스프를 넣었다. 스프 가루가 끓는 물에 투하될 때 거품이 한순간 솟구치고 다시 가라앉는 걸 지켜봤다. 면을 넣었다. 면을 넣고는 몇 분 정도 기다려야 했다. 노트북으로 노래를 틀었다. 유튜브를 클릭하니 홈 화면에 에이브릴 라빈과 글렌 굴드가 떴다. 전날 밤 너바나에 이어 락을 들으면 머리가 아플 것 같아 글렌 굴드를 클릭했다. 15초짜리 에너지 드링크 광고 영상이 지나가고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곡이 재생되었다. 글렌 굴드의 바흐 평균율 클라비어 2집이었고 골드베르크 변주곡 다음으로 좋아하는 바흐의 피아노곡이다. 침대에 걸터앉아 노트북에서 나오는 선율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잘 안 됐다. 라면 냄새가 선율을 휘감았다. 몇 분 듣다가 냄비 받침대를 자취방 책상에 깔고 라면 냄비를 가져와 의자에 앉았다. 혼자 살기에 넓은 원룸은 그렇게 글렌 굴드의 음악과 계란도 풀지 않은 라면 냄새로 점점 채워졌다. 물을 살짝 많이 받아 밥을 말아먹을까도 했지만, 간만에 먹는 아침이어선지 충분히 배불렀다. 싱크대에 냄비와 수저를 담가놓고 32퍼센트로 충전된 핸드폰을 들여다봤다. 새벽에 온 연락들이 화면에 남아있었다. 김민재의 문자도 와있었다.

 - 찬준아 미안하다ㅠ 어제 너무 취해서

내가 실수했어.. 선웅이형이랑 세희한테

이야ㅑ기 들었는데 너도 화날만했겠더라

지난번에 애들이랑 같이술먹을 때도

나 토하고 별 지랄다해서 짜증났을텐데

이번엔 니한테 화까지 내서 미안ㄴ해

진짜로ㅠㅜㅜ

 답장하지 않았다. 김민재의 사과 문자 외엔 괜찮냐는 선배들의 문자와 일어나면 연락하라는 친하지 않은 동기의 연락, 김선웅의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전부 답장하지 않았다. 동아리 대표 누나에게만

 - 저 탈퇴하겠습니다

라는 문자만 한 통 보냈다. 선배들의 문자를 씹어선지 동아리 탈퇴는 순조로이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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