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이라 하기에도 민망해서 없던 일로 생각하기로 맘먹었다. 인간에 대한 감정을 다시금 지워내고 민아를 만나기 전으로 회귀했다. 하지만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아쉬움이 큰 탓이었을까 이전까지 인간관계에 무관심했던 태도가 더욱 강해져 시니컬함으로 변했다. 원래도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같은 반 애들과의 대화는 더 줄었고, 성인이 되어 대학에 가서도 선배들이 나라 걱정을 하든, 후배들이 친한 척을 하든 상관하지 않았다. 드러나지만 않을 뿐 내가 공감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비판의식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간에게 무엇을 기대한 적이 없다. 기대한 적이 없으니 실망한 적도 없다. 고3 여름 방학 때 얻게 된 인간을 향한 꼬인 태도가 인생을 좀 더 편히 영위하게끔 만든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 3학년의 여름 방학은 학기 중과 똑같다. 등교하고 공부하며 졸다가 늦게까지 공부하고 더 늦게 학원에 간다. 방학이란 명칭이 왜 붙었는지 모를 어이없는 시간이다. 그나마 다른 거라면 실질적으로 대학을 준비하기 위해 관심 학과와 관련 대학을 알아보는 시간을 늘리는 것 정도가 되겠다. 이 시기 보통의 학생들은 학과를 알아보며 설레어하고, 대학을 알아보며 한숨 쉰다. 하지만 사회 평균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을 지향하는 것만이 목표인 소수의 수험생들에겐 설렘이란 감정은 무가치하다. 그런 소수의 수험생에 속했던 난 불문학과에 진학하고 싶었다. 알베르 까뮈가 그 이유였다. 하지만 절실한 것은 아니었기에 취업에 좋지 않을 것 같단 현실적인 이유를 더 중요히 여겼다. 덕분에 큰 고민 없이 다른 학과에 지원했다.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부모는 만족했고 내가 스무 살이 되어 대학이 있는 서울로 떠나자 떠나는 날에 맞춰 이혼했다. 거의 하나의 의식이었다. 사랑 없던 20년 세월을 청산이라도 하는 듯 말이다. 자취방에 짐 푸는 걸 도와준 다음, 자신들의 아들이 다닐 대학을 둘러본 뒤, 종로의 고급 한식당에서 함께 밥을 먹고 그 길로 법원에 가 이혼 서류를 작성했다고 한다. 20년간 살던 집은 남자가 가지기로 했다. 여자는 직장과 가까운 곳에 오피스텔을 구했다. 그래도 1년에 3번, 설과 추석과 내 생일마다 다시 잠깐 모인다. 이젠 늙은 남자의 재산이 되어버린 공간, 나의 미성년 시절 집이라 불렸던 곳에서 모인다. 다행히 이혼 전과 이혼 후가 크게 다를 게 없다. 모여서 밥을 먹을 때면 나에 대해 질문하고 생활을 궁금해한다. 이외에도 영화와 책에 대해, 음악에 관해 이야기한다. 내가 결혼을 한다면 신랑 부모석에 나란히 앉아줄 정도의 의리는 지키고 사는 것 같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부부의 대화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
보증금 천에 월세 팔십. 자취방은 대학 근처 원룸이다. 정문까지 걸어서 10분 거리니 가까운 편이다. 남자가 비용을 지불했고, 하는 중이다. 월세는 3년간 오르지 않았다. 여자는 매달 용돈을 80만 원씩 내게 보내준다. 자취방에 짐을 풀던 스무 살 2월, 여자는 홀로 지낼 나를 걱정했다. 반면 남자는 격려했다. 이젠 성인이니 콘돔 사용 잘하라는 말을 덧붙이며 필요한 게 있음 언제든지 연락하라 했다. 그들의 걱정과 격려가 모성애와 부성애로부터 나온 것인지, 이른 나이에 손주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에 하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남자의 말엔 웃음으로 답했고 여자에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말했다. 어차피 맞벌이 부부 밑에서 자란 외동은 혼자 있는 것에 익숙하다고 말을 이을까 했지만,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 같아 하지 않았다.
화장실이 따로 있는 9평 정도의 방이다. 스무 살이 혼자 살기엔 넓었고 스물두 살에게도 아직은 넓다. 자취방은 4층짜리 신축 건물 2층에 위치한다. 4층 건물이긴 하나 1층은 현관 바깥 벽면의 우편함들을 제외하면 5대의 차가 들어갈 주차장이 공간을 차지할 뿐이다. 주거 형태 건물을 지으려면 어느 정도의 주차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 하지만 비싼 값의 서울 땅을 황량한 주차장으로만 활용하는 건물주는 없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기거할 1층 대신 자동차로 채운 것이다. 90년대 이후 지어진 빌라나 오피스텔 종류의 건물들이 거의 이런 형태를 띤다. 한국형 가성비 건물이라 해도 손색없을 것이다. 그러나 대학교 근처 원룸은 당연하게 주 생활자가 대학생들일 것이고 일반 대학생 중 자차를 가진 사람은 적다. 대학생 이전에 국민으로서 국가의 법을 따라야겠지만, 깨끗한 도로 교통과 혼잡하지 않은 골목을 위해 학생 여섯 명은 더 살 수 있는 장소를 자동차 휴식처로 만든 건 안타까웠다.
2년이 지난 지금이야 별 감흥 없지만, 스무 살 적엔 1층을 지날 때마다 건물을 받치고 있는 가운데의 기둥이 두드러지게 보였다. 신축 건물이어선가 다른 건물들의 기둥보다 튼튼해 보였고 하늘을 떠받치는 아틀라스의 모습이 그려졌다. -뭐든 처음이란 명분이 주는 효과는 굉장하다- 각진 사각형 기둥을 감싼 연한 회색 대리석이 유독 선명하고 매끈하다. 의미 없이 빛나는 대리석 표면은 유리 현관문에 반사된 햇빛 때문에 더 반짝인다. 대게 오전 11시에서 오후 1시 사이에 제일 반짝인다.
밤에는 반짝임이 번쩍임으로 변한다. 현관 입구의 움직임 감지 센서에 의해 누군가 나가거나 들어올 때 켜지는 천장의 자동 센서등 빛이 매우 밝아서이다. 밝은 빛에 익숙해지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늦은 밤 자취방으로 들어갈 때면 현관 앞에서 고개를 숙인 채 비밀번호를 누른다. 투명한 유리문에 비친 고개 숙인 날 보고 있자면 포토라인에 선 범죄자의 생김새와 유사해 보인다. 명멸하는 간격만 다를 뿐 번쩍이는 센서등 빛도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쉬와 비슷하다. 가끔 불이 켜지는 타이밍을 놓쳐 고개를 제때 숙이지 못하기도 하는데, 그럴 땐 눈을 비비며 건물주에게 센서등 밝기를 낮추거나 좀 약한 걸로 바꾸라고 말하자 다짐한다. 하지만 다짐해도 그 순간뿐, 늦은 밤이기도 하고 늦은 만큼 피곤하기에 바로 씻고 자버린다. 일어나선 예민하게 따질 일이 전혀 아니라 생각한다. 3년 동안 같은 곳에 살면서 유일하게 익숙해지지 않는 것이 고작 현관문이란 사실은 스스로에게 우습게 다가온다. 아직도 익숙해지지 않은 이런 현관의 비밀번호는 *1225. 예수 생일이다.
현관 비밀번호도 그렇고 부활절 시즌마다 삶은 달걀을 챙겨주는 걸로 봐선 건물주가 교회나 성당에 다니는 것 같았다. 난 종교가 없지만, 이런 게 종교의 좋은 영향이라 생각한다, 니체는 종교를, 정확히는 기독교를 노예의 종교라 지칭했어도 결국 내가 겪은 기독교인이 내게 유익을 베풀었기 때문에 종교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진 않는다. 아무래도 내가 삶은 달걀을 생각보다 맛있게 먹었나 보다. 1학년 5월, 처음 달걀을 받은 뒤부터 1층에 주차장에 있는 걸 별로 상관하지 않게 된 걸 봐선, 니체를 읽은 뒤의 어중간한 감상보다 타인의 어색한 친절이 생각을 바꾸는 데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요즘 20대의 특성을 아는 건지 건물주가 쑥스러움이 많은 건지, 직접 마주하고 달걀을 주진 않는다. 그냥 자취방 손잡이에 ‘부활 축하’라고 적힌 띠를 두른 달걀이 몇 개 담긴 봉지를 걸어둔다. 세입자 전체에게 주는 것인지라 부활절 시즌만 되면 각 층 호실 문손잡이에 하얀 봉지가 걸려있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각각의 층에는 6개 호실이 있다. 4층에만 3개가 있는데 건물주가 남편과 함께 사는 곳이 있고, 나머지 두 호실 중 하나에 외국인 유학생들이 모여 산다. 다른 세입자들과 잘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외국인 유학생들이 살고 있단 것을 알게 된 사정은 이렇다.
어느 날 수업이 끝나고 돌아왔는데 위층에서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궁금한 마음에 소리를 따라 걸어 올라갔다. 3층은 아니었다. 4층이었다. 오후 5시였고 하늘은 밝았다. 건물주의 남편이 세입자 두 명과 싸우고 있었다. 402호라 적힌 복도 안쪽 호실 문 앞에 두 명의 세입자가 있었고 건물주 남편은 그들을 바라보며 내가 서 있는 계단 쪽을 등지고 있었다. 세입자들의 키나 덩치가 상대적으로 작아 화를 내는 쪽이 그들이었음에도 건물주의 남편이 괴롭히는 모양새였다. 계단 옆 벽에 가만히 기대어 들키지 않을 정도로만 고개를 내밀고 무슨 일인가 조용히 보았다. 순간 후각이 반응했다. 음식 냄새가 났고 카레 냄새 같은, 좀 더 시큼한 향이 강했다. 맡기에 썩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런 음식은 하지 말아 달라니까요.”
“왜 안뙤는 겁니까. 요리가 하는께!”
목소리가 더 큰 쪽은 세입자 쪽이었다. 여자였고 피부색이 밝은 편이어서 어색한 발음이 아니었으면 코가 넓적한 한국인으로 생각할 뻔했다.
“냄새가 심하잖아요. 한국에선 이런 음식 안 해 먹습니다.”
짜증 섞인 목소리였지만 화내는 상대를 대하는 그의 말투엔 정중함이 있었다.
“냄새 안납니따. 자꾸 말을 하지 마라요!”
“냄새가 난다니까요. 하 참”
그는 짧게 한숨 쉬었다.
“창문 열고 요리 행는떼요”
비슷하게 생긴 다른 여자가 말했다. 키가 많이 작았다.
“그렇게 하면 냄새가 밖으로 더 퍼져요. 그래서 저번에 민원이 들어온 거구요. 봐요. 전부터 말하는 게 똑같잖아요. 그냥 평범한 음식을 먹으라고요.”
“미눤 뭔지 몰라요.”
키 작은 여자가 목소리 큰 여자를 쳐다봤다.
“그냥 꺼짓말. 이 사람”
목소리 큰 여자가 그에게 삿대질하며 다시 언성을 높였다.
“어우 진짜 씨. 내가 뭐 어려운 부탁 했어? 그냥 냄새 안나는 음식만 먹으라고 했잖아! 짜증나게.. 뭐 거짓말? 지금 장난해요??”
정중한 태도를 유지하던 그도 소리를 질렀다. 삿대질이 기분 나빴던 모양이다. “계속 찾아와서 말했으면 좀 알아먹어라. 피해 좀 그만 주라고!”
402호 문이 열리고 또 다른 여자가 나왔다. 어두운 피부에 머리색이 선명한 금발이었고 남자의 큰 소리에 놀란 눈치였다.
“미안합니다. 앞으로 안합니다. 안 화내요.”
금발 여자는 문 앞에 있던 여자 둘을 402호로 밀어 넣으며 그에게 말했다. 발음이 아주 좋았다. 한국에 온 지 꽤 된 듯싶었다.
“땅에나 뤠이씨스트!”
목소리 큰 여자가 문 닫으며 소리쳤다.
“저 사람은 언제 갑니까?! 이제 갈 때 된 거 아녜요?”
그 짧은 시간에 삿대질을 배웠는지, 그 또한 방금 문을 닫고 들어간 여자들 쪽을 향해 삿대질했다.
“저 사람 다음에 갑니다. 다음 계절에”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려는지 한국어 발음이 좋은 여자는 손을 휘적거리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끄덕일 때마다 푸석푸석한 금색 머리칼이 한 움큼씩 402호 문에 닿으며 맥없는 소리를 냈다. “미안합니다. 이제 갑니다. 삼 달 지나고 돌아갑니다.”
“유학생 셰어 하우스 하자고 할 때 말렸어야 했어. 진짜로 씨.”
그는 건물주인 아내가 옆에 있었다면 혼잣말이 아니었을 혼잣말을 했다.
“아후..” 그가 오른손으로 붉어진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한숨 쉬었다. “제가 좀 화가 났었네요... 미안합니다.”
“예 미안합니다. 다음 오는 애들한테는 잘 말합니다. 미안합니다.”
여자는 연신 미안하다 했다.
“제발 좀 부탁합시다. 이상한 냄새 안 나게 해 줘요. 다른 음식 해 먹으면 되잖아요. 평범한 거 그냥 평범한 거.”
떨떠름한 표정의 그는 소리 질렀던 아까의 자신이 민망했는지 말끝을 흐렸다. 그는 401호로 들어갔고 금발의 여자는 402호로 돌아갔다. 4층 복도가 조용해진 걸 눈으로 확인한 나도 뒤를 돌아 계단을 내려갔다. 방에 돌아와 네이버에 ‘땅에나’를 검색했다. 누가 봐도 욕이었지만 검색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영어로 음차 하여 구글에 검색해 봐도 마찬가지였다.
대학의 규모가 작지 않고, 해외 대학과 결연 맺은 것도 있어 유학생 및 교환학생이 있단 건 알았다. 하지만 교양수업 때 만난 외국인 학생은 전부 백인이었던지라 동남아 유학생들도 있는 줄은 몰랐다. 자취방 4층의 소동 덕에 유학생 셰어 하우스가 있단 것과 동남아 유학생들도 있단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외여행을 간 적은 있어도 유학 경험은 없으니 유학생의 심정이 어떤지도, 어떨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타국에서 유학 생활 중이며, 4층의 소동과 비슷한 일이 생기는 상황을 생각해 봤다. 싸울 일은 아닌 거 같았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내게 김치 냄새가 나니까 그걸 먹지 말고 냄새나는 다른 한국 음식도 해 먹지 말라 말하는 현지인을 마주한다면 화가 날 것 같긴 했다. 그리고 그따위 말을 화내며 내뱉는 현지인이라면 그 사람을 인종차별주의자로 몰고 가서라도 싸우고 싶을 것 같았다. 목소리 컸던 4층 유학생의 맘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