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복학에 아직 풀리지 않은 긴장감을 가지고 앞 좌석에 앉아 수업을 기다리던 나. '문학치료'라는 생소한 교양 과목에 또 부푼 기대를 안으며 말이다.
문학 교수가 앞문을 열고 들어온다. 멀끔한 청년, 겸임교수다. 박사 학위까지 손에 쥐고 있는 그는 발음도 좋았다. 당연한 거겠지만.
그의 수업은 무척 재미있었다. 한 단편 소설을 던져주고 심오한 질문을 던진다. 거기에 답을 적어서 제출해야 했다. 예를 들어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를 수업한 날에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진짜지만 가짜인 것, 가짜지만 진짜인 것은?"이라는 질문이, 김금희 작가의 《너무 한낮의 연애》 수업에는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차이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던져졌다.
그 수업은 호불호가 강했다. 문학을 사랑하고 감수성이 깊은 자들은 그 수업을 기다렸고, 아직 사랑까지는 아닌 그들은 "뭔 개소리야?"를 외쳤다. 나는 한 장이면 충분할 것을 두 장, 세 장까지 적어내며 스테이플러를 찍어 제출했다.
교수는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기준에 마음이 들면 그 독후감에 자신의 이름을 남겼다. 잘 쓰고 못 쓴 글은 이 세상에 없다. 그도 문학을 깊게 파고 연구원으로까지 활동하는 자이니 알 것이다.
그의 기준은 모르겠지만 나의 독후감에 그의 흔적이 없었던 적은 없다.
그는 "커피 한 잔 해요"로 호감을 알렸다. 그 호감이 솔직히 싫지가 않았고, 나도 그의 호수에 손 끝을 잠깐 담가보았다. 하지만 우린 사적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가까이 다가가 본 것은 수업 쉬는 시간 무언가 물으러 갔을 때, 그때가 가장 가까웠다.
그는 문학교수답게 마지막 인사도 아름다웠다.
꼭 우리의 영혼이 교류되었 던 짧은 이 순간들이 다 모순이라는 듯, 그의 마지막 선물은 귀한 책갈피가 끼워진 양귀자의 《모순》을 건네주고 떠났다.
그가 이제 궁금하지가 않다. 오히려 그의 박사양반의 글이 궁금할 뿐이다.
배운 사람의 문장은 호흡부터 다르다. 비움을 안다. 흐름을 안다. 단조롭지만 묵직하다. 나는 그래서 문학을 전공한 사람을 보면 존경심을 표한다.
그렇게 2학기가 끝나고 이제 그를 마주칠 일이 없다. 서로가 건넨 "커피 한 잔 해요"에는 '언젠가는'이 생략되어 있었던 거다.
호수에 손을 잠시 담가보았던 손에 남은 물기를 쓱 쓱 옷에 닦으며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차이를 깨닫는다.
그를 보기 전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없었음을,
그를 본 후 동경의 대상이 있었다가 사라졌음을,
호감이 아니라 '아주 없음'이었 던 꿈도 못 꿔본 강단에 선 나의 모습.
그리고 이제 존재하지만 사라져 버린 동경의 대상은 '있지 않음'으로 남은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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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문학을 가르친다.
그 나지막한 목소리를 흉내 내본다.
치아교정을 3년 동안 한 나지만 발음이 줄줄 새며,
목소리 톤도 높아 어렵다.
그렇게 흉내 내는 내 모습으로 전환하며
나의 가슴앓이는 이제 여기서 막을 내린다.
당신에게
'아주 없음'과 '있지 않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