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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과몰입러 노랑 Apr 28. 2022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관극 후기

수많은 가능성을 헤아린 후에야

수많은 가능성을 헤아린 후에야

작은 우연들이 만들어낸 현재가

얼마나 놀랍고 대단한 지 우리는 깨닫게 된다

-노랑의 한줄평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 (~22.05.01)

<어린 소녀가 북극에 가는 이야기>라고 딱 잘라 요약하기에는 그 어린 소녀가 너무나도 어리고, 나보다도 훨씬 용감하다. 특히 그 어린 소녀와 '누구와' 북극에 갔는가 생각하면 더더욱 딱 잘라 요약하기에 어려워진다.


연극 '눈을 뜻하는 수백 가지 단어들'은 1인극으로 아주 예쁘고 작은 무대에서 관객들이 모두 옹기종기 모여 소녀 '로리'의 여행을 함께 따라간다. 그녀는 J라기엔 충동적이고 P라기엔 계획적으로(tmi. 노랑은 MBTI 과몰입 중이다) 북극이라는 엄청난 여행지를 향해 출발한다. 계기는 아버지의 죽음. 탐험가를 꿈꾸었던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의 서재를 둘러보고, 아버지의 계획을 따르며, 자신의 생각을 더하여 떠나는 여행. 너무 따뜻하지도 너무 교훈적이지도 않은 충동적이고 자연스럽고 장난기가 묻어나는데 진지한, 그런 여행.


이 여행을 아주 크고 무성의하게 몇 등분을 한다면 몇 가지 키워드로 함축할 수 있을 것이다. 천장, 프리다, 그리고 어느 북극(누군가에겐 아마도 감자칩 키워드가 더해질 것이다).


우선 천장. 여행을 떠난 소녀에게 굳이 일어났어야 했을까 싶지만,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로리가 너무 귀엽고 담백해서 슬프기도 했다. 어떻게 생각하면 현실적인가 싶기도 하고 그래서 또 슬픈. 로리의 설렘과 귀여운 걱정과 자기검열, 그리고 현타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그 쓸쓸한 마음. 로리의 이야기를 듣는데 나도 어느 날의 천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로리의 말처럼 수천만 명의 여성들은 연결되어있을지도 모른다. 그 쓸쓸함에 나도 같이 연결된 탓일까. 그 뒤에 이어지는 로리와 프리다와의 만남이 더 귀중하게 느껴졌다. 베풀 줄 알고 헤아려줄 줄 알고 어른의 걱정을 해줄 수 있는 너무나 좋은 사람. 로리는 자신의 계획과 달라져 당황스럽고 속상했을 수 있지만 로리와 프리다 사이 어딘가에 있을 나로서는 프리다의 조언들은 너무 따뜻하고 감사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북극, 어느 북극. 로리는 결국 어떻게든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 아니, 오히려 목적 이상을 달성하게 된다. 


로리의 여행을 마음으로 함께 응원하며 따라왔다면 엔딩은 너무 아름답게 와닿는다. 특히 계획적인 성격이라는 핑계로 계획만 세우다가 행동하지 않는 일이 많은 나에게는 특히 그러했다. 누군가 보기엔 엉성한 계획이어도 로리는 행동했고, 아주 길고 외로웠겠지만 결국은 목적 이상을 달성해냈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진 뒤에 다시 과거부터 하나하나 헤아려보면 로리의 충동과 우연한 행동들이 어떻게 이어졌는지, 그리고 얼마나 대단한 결과를 이루었는지 마음이 벅차다. 방안에 틀어박혀 그 순간이 지나가길 기다렸던 로리였는데, 얼마나 기특하게 성장했는지.


우연들이 모여 만들어낸 로리의 현재. 그 여정을 함께 한 관객들도 아마 자신의 어느 과거부터 현재까지 헤아려봤으리라. 박수갈채 후 눈물과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화장실에 갔다가 누군가의 오열 소리를 들었다. 극장을 나선 후 머릿속으로는 다들 각자의 삶의 여행을 되돌아보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에게도 같은 극을 본 누군가에게도, 어느 힘든 날에는 로리의 용기가 문득 솟아나고 또 어느 좌절한 날에는 프리다의 조언이 문득 생각나길 바라본다.


"슬픔 때문에 뭔가를 결심하면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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