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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balloon Nov 09. 2016

느린 여행, 골목길을 걷다

막다른 듯하지만 다시 이어지고, 소소한 풍경들이 반기는 골목길 여행

마음을 열고 다가가면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여행이 있다. 낡은 집, 오래된 마을길이지만 닳지 않은 마음이 있는 골목길 여행이다. 하나둘 사라져가는 작은 골목에서 만나는 풍경은 마치 옛 친구를 만나러 가듯 편안하고 정겹다. 막다른 듯하지만 다시 이어지고, 숨가쁘게 가파른 길이지만 어딘가에 몸 기댈 곳이 있는 길. 골목 마디마디에 채워진 삶의 소소한 풍경들이 반기는, 느릿느릿 걷기 좋은 골목길을 소개한다.


진골목

느릿느릿 시간이 멈춘 골목

얼핏 대구시의 풍경은 콘크리트 빌딩 숲으로 이루어진 여느 대도시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큰길 안쪽으로 들여다보면 실핏줄처럼 번져 있는 촘촘한 골목길이 드러난다. 특히 대구에는 어제와 오늘을 잇는 골목들이 많다. 대구 진골목은 경상도에서 ‘길다’를 ‘질다’로 발음하면서 생긴 이름이다. 언뜻 보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골목이지만 이 길의 역사는 족히 100년을 넘는다. 진골목에 들어서면 크고 넓은 동성로와는 달리 좁고 기다란 골목이 구불구불하게 이어진다. 진골목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은 ‘정소아과의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2층집. 현존하는 대구 최고(最古)의 양옥 건물로 일제강점기 근대 주거문화를 엿볼 수 있고, 아담한 정원과 소나무가 일품이다. 더불어 진골목에는 1920년대 근대 건축물과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 한옥 형태가 지금까지 보존돼 당시 대구 모습을 잘 보여준다. 그밖에 근대 다방의 명맥을 이어가는 미도다방과 육개장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얻은 진골목식당, 30년 역사의 보리밥집 등은 지난 시간을 곱씹기 좋은 풍경과 맛을 전한다.


북성로

피난 예술가들의 위안처가 되었던 뒷골목

지금이야 대구 시내라고 하면 당연히 ‘동성로’를 떠올리지만 1970년대만 해도 대구 최고의 번화가는 ‘북성로’였다. 지금의 골목은 낡고 퇴락했지만 당시엔 대구에서 전기가 처음 들어온 최대 번화가였고, 거리엔 경북 최초의 백화점을 비롯해 각종 상가와 다방, 주점이 즐비했다. 또 북성로는 1950년 피란 예술이 꽃피었던 곳이다. 아직도 골목 곳곳에는 한국전쟁 당시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창작과 사색의 공간이 되어줬던 찻집과 음악감상실 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은박지에 그림을 그린 것으로 유명한 천재화가 이중섭이 자주 들렀다는 백록다방의 흔적도 볼 수 있다. 세월이 흘러 흔적만 남은 이곳에서 여전히 문을 열고 옛 시절을 기억하게 하는 곳도 있다. 클래식 음악감상실 ‘녹향’이다. 1946년 문을 연 녹향은 대구에서 처음 생긴 클래식 음악감상실이다. 세월의 무게를 이고 앉은 낡은 풍경 속에는 지난 60여 년 동안 이곳을 다녀간 수많은 예술가와 음악 동호인들의 추억이 녹아 있다. 카페 문화에 밀려 인적이 뜸해진 지 오래지만 LP레코드와 턴테이블을 기억하는 세대에게는 여전히 소중한 공간이 되고 있다.


송림동

영화 <차이나타운>이 촬영된 오래된 골목길

인천광역시 동구 송림동은 1883년, 개항으로 인천의 인구가 늘면서 만들어진 마을이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살 곳을 찾아 점점 더 높은 곳으로 향했고, 하나둘 소나무가 많은 송림동 언덕에 둥지를 틀었다. 동네가 만들어질 당시 빈 땅에 산의 모양대로 집을 지어 남의 집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갈 수 있는 가옥이 많았다고 한다. 좁고 긴 골목들이 생의 줄기가 되어 나무처럼 우거진 마을은 여전히 묘하고도 독특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이런 분위기 때문인지 영화 <차이나타운> 속 어린 김고은에게 엄마가 새로운 세계의 룰을 일러주는 장면이 바로 이 마을에서 촬영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송림동의 좁은 골목길이 아름다운 것은 느릿느릿 걷다 만나는 자연스러운 시간의 풍경 때문이다. 미처 세월이 빠져나오지 못한 것처럼 골목 곳곳에 시간이 멈춰있다. 과거 ‘높아서 슬픈 동네’라 불렸던 마을, 또 곧 사라질지도 모를 송림동의 좁은 골목길에서는 지난 유년 시절의 기억을 마주할 수 있다.


배다리 헌책방골목

책의 향기에 취하는, 책 읽기도 좋을 길

인천시 금곡동에 위치한 배다리 헌책방골목에는 오래된 책 냄새와 함께 낡든 집, 정겨운 골목의 풍경이 공존한다. 헌책방골목이 있는 마을은 인천의 대표적인 구도심으로 ‘작은 배들이 드나드는 다리가 있었다’고 하여 ‘배다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서 짐작되듯 과거엔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한다. 이 마을은 근대 개항장인 제물포에 이주한 일본인과 중국인에게 밀려난 조선인들이 거주한 마을이자 해방 이후 밀려든 서민들의 터전이었다. 이곳에 헌책방이 들어선 것은 1960년대. 당시 헌책방골목은 먹고 살기 힘든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주머니 걱정을 덜어준 곳이었다. 한때는 40여 개의 책방이 들어서 서울 청계천, 부산 보수동과 함께 전국 3대 헌책방 거리로 불리기도 했다. 과거의 영화는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곳을 지키는 다섯 곳의 책방은 옛 시절의 풍경을 품고 있다. 책 내음 따라 낡고 오래된 책방의 서고에 들어서면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여행을 온 듯 지난 추억이 마음을 파고든다. 낡은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잊고 있던 지난 시절의 감성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배다리 마을엔 헌책방골목 외에도 재래시장, 전통공예상가, 벽화마을, 인천 최초의 공립학교 등 근대의 건축물들, 갤러리·사진관·공작소 등의 문화공간이 있어 한나절 시간여행을 즐기기에도 좋다.


보수동 책방골목

옛날 책방의 풍경을 만나다

우리나라 최대의 항구도시인 부산의 광복동 거리는 부산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이다. 하지만 광복동 거리를 조금만 벗어나면 아주 특별한 골목길을 만나게 된다. 바로 보수동 책방골목이다. 200m에 달하는 좁고 긴 이 골목엔 50여 개의 크고 작은 헌책방이 줄지어 있다. 서점마다 귀한 고서적부터 아동 서적은 물론 철학과 문학, 사진집, 잡지에 이르기까지 누군가의 손때 묻은 책들이 빼곡하다. 이곳 책방 골목의 역사는 70년에 달한다. 광복 직후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책들과 생계를 위해 팔았던 피난민들의 책이 난전에 쌓였고, 그렇게 헌책들이 길게 늘어선 골목이 생겨난 것이다. 아픈 시절을 견뎌온 골목인 만큼 서점 곳곳에 쌓인 책들은 모두 나름의 사연을 품은 듯 보인다. 가난하고 배고팠던 시절 책 한 권은 꿈을 만들고 바깥세상과 만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였을 것이다. 그래서 보수동 책방골목은 단순한 책방골목이 아닌 하나의 ‘시대’이자 ‘역사’라 말할 수 있다. 헌책을 구하려는 사람과 유년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여전히 이어지는 보수동 책방골목은 깨끗하고 새것만을 찾는 요즘 우리에게 낡고 오래된 것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한다.


막걸리골목

마시면 네 번 취한다는 전주 막걸리골목

천 년의 역사를 이어온 전주엔 유독 골목길이 많다. 최근 전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골목은 막걸리골목. 대부분의 전주 막걸리집들은 식당처럼 소박한 분위기를 풍긴다. 허름한 간판과 좁은 식당에 잠시 실망할 수도 있지만 상다리가 휘어질 만큼 차려지는 푸짐한 안주에 금세 미소가 지어진다. 막걸리골목 중에서도 우체국 골목에 늘어선 삼천동 막걸리골목이 가장 규모가 크다. 막걸리 한 주전자를 비울 때마다 매번 다른 안주가 푸짐하게 올라오는데, 호주머니가 가벼운 서민들에게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서신동 막걸리골목에선 기본 안주로 삼계탕과 족발, 김치전, 생선구이가 나온다. 한옥마을 인근에서 전주식 막걸리집을 보고 싶다면 경원동 막걸리골목이 적합하다. 전주에서 막걸리를 마시면 네 번 취한다고 한다. 막걸리의 흥에 한 번 빠지고, 안주에 이어 맛과 값에 취한다는 것. 전주 막걸리집에서 나누는 것은 술만이 아니란다. 맛있는 먹거리를 나누고, 품은 생각을 나누고, 고달픈 일상에 짐을 나누는 곳이라고. 가을밤 막걸리 한잔에 마음을 나눈 후 전주의 골목골목을 사부작사부작 걸어보자.


다시 그리기길

김광석을 추억하며 걷는 길

대구 대봉동의 한 시장골목에 들어서면 낯익은 얼굴의 동상을 만날 수 있다. 1996년,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가수 김광석이 그 주인공이다. 대봉동은 김광석이 살았던 동네다. 이를 테마로 2010년 방천시장 인근 낡은 담장에 김광석의 삶과 음악을 테마로 벽화가 그려지면서 후미진 시장 뒷골목이었던 이곳은 대구 시내의 새로운 명소로 떠올랐다. 350m에 이르는 골목에는 김광석과 그의 음악을 추억하는 40여 점의 벽화와 조형물이 가득하다. 포장마차에서 국수 말아주는 김광석,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김광석, 노래하는 김광석의 모습과 노랫말로 채워진 길목은 노래하는 음유시인 이었던 그를 추억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골목이다.


감천마을

산줄기에 그려진 물결 같은 마을길

부산에도 작은 마을과 골목길의 풍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표적인 곳이 감천마을이다. 한국의 ‘마추픽추’ 또는 ‘레고마을’이라 불리는 이곳엔 일부러 조각을 맞춰 놓은 양 정답게 어우러진 열 평 남짓한 집들을 따라 소박한 골목길이 펼쳐진다. 그러나 이 마을과 골목이 처음부터 이런 모습은 아니었다. 사실 감천동의 역사는 한국전쟁과 맞닿아 있다. 처음 피난민들이 내려와 정착했고, 나중에는 태극교라는 종교단체, 이어서 가난한 사람들까지 하나둘 더해져 만들어진 부산의 대표적인 달동네였다. 30여 년 전, 마을 사람들은 마치 가난을 지우기라도 하듯 예쁜 페인트칠을 하기 시작했고, 여기에 2009년부터 예술가들의 ‘마을 미술 프로젝트’ 등이 더해져 오늘날 부산에서 가장 특색 있는 마을로 남게 된 것이다. 감천마을의 매력은 꼬불꼬불 끊어질 듯 이어지는 골목길에 있다. 막다른 듯 하지만 골목 끝자락에서 다시 길이 연결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마주하는 막다른 골목. 마치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우리 인생을 닮은 이 골목길에는 전쟁 후 힘들었지만 정겨움이 가득했던 우리네 삶의 흔적을 곳곳에서 마주할 수 있다.


동피랑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길

통영에는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동피랑’이라 불리는 예쁜 마을이 있다. 동피랑은 ‘동쪽 비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이란 뜻. 이름처럼 비탈을 따라 좁고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을 오르다 보면 아담한 담벼락을 채운 예쁘고 화사한 벽화들을 만나게 된다. 사실 이 ‘달동네’는 철거 직전 한 봉사단체가 벽화를 그리면서 지금의 이색적인 풍경을 만들어냈고 지금까지 마을의 시간이 지켜지고 있다. 최근엔 동피랑과 마주 보는 서피랑이 더 걷기 좋은 골목길로 주목을 받고 있다. 동피랑에서 약 1km 떨어진 서피랑은 1980년대 후반까지 윤락가였던 곳이다. 뱃일을 마친 선원들이 술과 노래로 회포를 풀던 이곳은 현지인들도 꺼려하던 곳. 하지만 2013년부터 마을 곳곳에 조형물을 설치하고 벽화를 그려넣는 등 많은 이들의 노력으로 문화의 향기가 가득한 예술마을로 변신했다. 걷는 사이사이 아기자기한 풍경으로 쉴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누르게 하는 최고 명소는 99계단이다. 무엇보다 계단 중간 바지를 까내린 엉덩이 의자가 여행자에게 웃음을 건넨다. 서피랑은 박경리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의 무대이기도 하다.


글 _ Yellow trip 이현주



: Yellow trip 카카오 스토리

https://story.kakao.com/ch/yellowt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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