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타는 자동차

기억 저편에 있는 유아기의 경험

by Yellow Duck


불타는 캥구


# 경험, 어디까지 해봤니?


우리의 여행 중 가장 큰 사건을 말하라면 난 단연코 자동차 화재 사건을 말할 것이다.

'ep#17: 우리는 자동차를 소유할 팔자가 아닌 걸까?'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바로 그 캥구다.

이미 내 '노마드 베이비 미루'에서 자세히 쓴 이 사건은 예고도 없이 일어났고 지금도 그 원인을 알 수가 없다.


2014년 2월, 우린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떠나 다른 도시로 이동 중이었다.

한적한 국도로 접어든 지 얼마 되지 않아 카밀이 말했다.


- 차가 좀 이상해… 액셀을 밟아도 나가질 않네.

- 왜 그러지? 타이어에 펑크가 났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갓길에 차를 세웠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보닛에서 마치 흰 소복에 길게 머리를 풀어헤치고 티브이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그 일본 영화 귀신처럼 연기가 나더니 잡아먹을 듯 확 불이 붙는 게 아닌가! 심장이 바위와 같은 무게로 바닥에 쿵 떨어지는 순간, 뇌리를 스쳤던 건 평소 영화에서 보던 자동차 폭파 장면이었다.

영화 같은 장면이 실제로 일어나다니, 오 마이 갓!

카밀과 난 동시에 ‘Get the baby!’를 외치며 허둥지둥 탈출해 미루부터 빼냈고 보이는 대로 중요한 물품만 꺼낸 후 진짜로 폭파할까 봐 냅다 뛰었다. 실제로 폭파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았지만 그 당시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서워서 감히 근처에 가질 못했고, 그렇게 우리는 어딘 지도 모를 스페인 한복판에서 서서히 불꽃 속으로 사라져 가는 차와 활활 타는 짐들을 속수무책 멍하나 바라만 봐야 했다. 목을 조르는 듯한 매캐한 냄새가 퍼져 나갔고 구름 한 점 없는 새파란 하늘을 질투하듯 검은 연기는 뭉게뭉게 그 사이를 갈랐다.


건질 게 없네.


# 뭣도 모르는 미루


그때 미루는 13개월이었다.

황당함에 멍해 있던 우리와는 달리 미루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사건 내내 내 품 안에서 두 팔과 다리를 흔들며 까르르 댔다. 시커먼 연기와 시뻘건 불꽃에도 겁에 질리지 않은 것으로 보아 미루에게 이건 하나의 스펙터클한 놀이인 것이 분명했다.

경찰관과 소방관 아저씨들께 살인 미소까지 팍팍 날려주시니, 얘야! 너 엄마 속 타들어가는 거 안 보이니?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러다 문득 미루는 나중에 이걸 기억 못 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 아쉬운 마음이 들면서 또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미루는 이걸 기억 못 할 텐데,
지금 이 사건 말고도 이 모든 여행은 나중에 미루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하지만 이는 바로 경찰차의 사이렌, 소방차의 소화기, 그리고 허망하게 솟아오르는 연기와 함께 날아가 버렸다.


중요한 물건은 건졌으나 이 사고로 우린 모든 짐을 잃었고 추후 여행 계획에 많은 차질이 생겼다.

카밀은 아직도 이 사건 때문이 우리 인생이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만 없었더라면 지금쯤 우리가 원했던 공동체를 찾았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하지만 난 동의하지 않는다. 이 사고가 아니더라도 이에 상응하는 사건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믿지 않겠지만 난 불타는 자동차를 보며 알 수 없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무소유에 대한 간접 체험, 일종의 깨달음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이 사건은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우리의 여정을 돌아보라는 기회였다.

그리고 이후에도 신은 계속해서 그런 기회를 내려주셨다. 신은 원래 그런가 보다.


뭔 일이여?
우와! 재밌는 일인가 보다!


# 아기 때 경험한 일은 어디로 갈까?


사실 지금 난 운명론적 얘기보단 그때의 미루의 반응을 보며 했던 내 생각에 대해 말하고 싶다.

물론 지금 미루는 이 사건을 기억 못 한다. 사진으로 남아있는 증거를 보여줘야 그런갑다 하고 또 그게 자신의 얘기라는 걸 공감하지 못한다.

디즈니 픽사의 영화 ‘인사이드 아웃(Inside Our)’을 보면 기억 창고에서 색이 검게 된 기억 구슬은 죽은 기억이라며 청소기로 빨아들이는 장면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큰 사건도 현재 기억하지 못한다면 색을 잃고 그 흔적을 남기지 못한 채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야 할까?


베이비 드라마(Baby Drama)라는 게 있다.

아동극 분야의 다크호스로 대부분의 아동극이 4세 이상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에 비해 베이비 드라마는 1세부터 3세 아기들을 대상으로 한다. 스토리텔링 대신 아기들의 상상력과 인지능력을 자극하기 위한 체험 연극에 가까운데, 베이비 드라마의 개척자인 스웨덴의 수잔 오스틴(Suzanne Osten) 여사가 처음 소개했던 70년대만 해도 아기들이 연극을 본다는 개념 자체에 대해 상당히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세대를 거쳐 아기들도 공연 인지능력이 있다는 과학적 증명이 나왔고 점점 중요한 장르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과연 1세에서 3세 사이에 본 것은 어떤 형태로 인간의 기억 속에 남아 그 인생에 영향을 미칠까? 몸이 기억하는 것은 차원이 다를 텐데, 정서와 몸이 기억하는 이때의 경험은 아주 중요하지 않을까? 사뭇 뇌과학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짐을 모두 잃었다.


# 기억하지 못할지언정


지인 중 한 명이 돌잔치에서 돌잡이로 뭘 잡았는지 기억한다고 했을 때 ‘에라, 이 친구야!’하고 콧방귀를 뀐 적이 있다. 난 몇 살까지 기억할까 더듬어 보면 5살이 한계인 것 같은데, 지금 미루를 보며 5살 이전의 난 어땠는지 어머니께 여쭤보고 싶다. 그때 있었던 일들이 지금의 날 만드는데 어떻게 한몫했을지 궁금하기 때문이다.


과연 미루와 난 얼마만큼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남기는 이 모든 기록들이 다 쓸모가 있을까? 나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해도 ‘무슨 그런 거짓말을 해!’하며 날 흘겨볼지도, 혹은 '도대체 왜 그랬어?' 하며 힐책할지도 모른다. 심지어 '엄마가 나에게 해준 게 뭐 있어.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라고 뒤통수 칠지도.

내 통제 밖의 일이지만, 비록 기억을 못 할지라도 지금껏 길 위에서 함께 겪은 모든 일들이 미루 기억의 저편에서 깊고 확실한 흔적을 남겼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예쁜 흔적으로.

아니라면 난 정말 허무해질 것 같다.


앙상한 캥구

All photos by Yellow Duck


p.s 1: '노마드 베이비 미루'에 쓴 글들 일부를 다시 가져왔다.

p.s 2: 브런치북 #6 수상에 실패했다. 질투의 화신이 되어 수상작가들을 부러워하지만 딱 오늘까지다. 그래도 글쓰기는 계속된다. 수상작가님들, 너무나도 배가 아프지만 축하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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