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사적인 침대의 의미를 우리 아이와 나누자
동양이든 서양이든, 그게 친정집이든 시댁이든 혹은 친구 집이든,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아이와 함께 다른 사람을 만날 땐 항상 ‘엄마 자격증’ 혹은 ‘부모 자격증’을 시험받는 기분이다. 밖으로 말하지 않아도 다들 옆에 ‘재는 엄마/부모가 어떻길래 저럴까?’ 등의 말풍선 하나씩은 달고 있고, 가까운 사람일수록 그 크기는 더 하다.
시아버지의 ‘Is that so?’ (과연 그럴까?), 친정 엄마의 ‘애가 좀 느리네.’ 지인의 ‘그거 몰라?’ 등등…
무덤덤하고 남의 말을 잘 안 듣는 나도 저절로 그 말들에는 눈썹을 치켜들게 되니, 그래서 미루가 남들과 있을 때 좋은 행동을 보이길 바라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지적질을 당하기가 싫은 것이다.
시아버지는 처음부터 카밀과 나, 그리고 미루가 한 침대에서 자는 것에 불만을 표하셨다.
네덜란드에서는, 아니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태어날 때부터 독립심을 키운다는 이유로, 혹은 부부관계를 더 중시한다는 이유로 아기를 아기방에 따로 재운다. 밤에 아기가 울면 바로 달려가 달래지 않고 울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냥 기다리는 프랑스식 수면 교육은 이미 우리나라에서도 잘 알려져 있다. (난 ‘프랑스 육아, ‘핀란드 육아’ 등 유럽 국가의 육아를 칭송하고 일반화하려는 경향에 강한 반기를 든다. 애들마다 다르고 부모마다 다른 법인데 왜 자꾸 육아를 하나로 규정지으려 하냐고!)
시댁을 방문할 때마다 시아버지는 미루 요람을 따로 만들어주셨지만 요람은 그냥 옷을 거는 옷걸이로 전락해 자존심만 구겼을 뿐, 우린 평소처럼 한 침대에서 잤다. 시아버지는 거기에 대해 비아냥 거리셨다.
- 언제 따로 미루 침대 만들래? 20년 후에? 아니면 결혼한 후에?
사실 미루를 따로 재운다는 건 우리 상황과 맞지 않았다. 생후 6개월부터 계속 돌아다니는 상황에서 아이에게 무슨 수로 방을 따로 준단 말인가? 또 나 스스로가 아이와 같이 자는 게 좋은 걸!
가지 말라고 붙잡아도 우리로부터 독립할 건데 뭘 그리 서둘러?
아무리 길어 봤자 10년이야.
이게 내 지론이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를 향한 아이의 함박웃음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그 기쁨이란! 뽀로로의 에디 같은 그 웃음을 왜 내가 양보한단 말인가! 다행히 카밀은 내 의견을 존중해줬다.
침대로 대변되는 잠자리만큼 사적인 공간도 없다. 이곳만큼 최대의 무방비 상태로 서로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공간도 없다. 살을 만지고 그 사이에서 작용하는 자기장을 느끼고, 숨결을, 하다못해 지난밤 무엇을 먹었는지 적나라하게 알 수 있는 아침 입 냄새라도 느낄 수 있는, 사람 사이에 있어 가장 밀접하고 온전히 자신이 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침대는 남녀 관계든 부모와 자식 관계든 스스로와의 관계든 그 모든 관계에 공평하다. 난 이런 침대를 내 아이와 함께 나누고 싶다. 같이 누워 눈을 맞추고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면서, 남편과 느끼는 것과는 다른 엄마와 아이와의 은밀함을 나누고 싶다. 서로 안고 잘 때의 그 포근함을, 내 뒤에 엄마라는 든든한 존재가 있다는 안정감을 다른 어느 장소도 아닌 침대에서 미루에게 주고 싶다. 다행히 미루는 아기 때부터 잠을 잘 잤고, 덕분에 난 다크서클이 배꼽까지 내려오는 수면부족을 겪지 않아도 됐다. 내 육아 사전에 ‘백일의 기적’이란 처음부터 없었다. 난 운이 엄청 좋은 엄마였다.
육아 문화는 다 다르다. 동양과 서양, 나아가 가족과 가족 사이, 하다못해 부부 사이에서도 다 다르다. 무엇이든 문화 충돌인 것이다. 살아온 환경에 맞게 몇 세기에 걸쳐 쌓여온 것이니 어느 문화가 더 좋다고 말할 순 없다. 그걸 받아들여 어떻게 나만의 문화를 만드느냐는 오롯이 내 몫이다. 같이 자는 걸 선호하는 내 문화가 시댁의 그것과 충돌할 때 그 속에서 슬기롭게 합의점을 찾는 것 역시 내 몫이다.
시댁에서 내 방식대로 육아를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유식 만드는 것부터 자는 것, 입는 것, 행동 제약의 범위까지, 시험도 그런 시험이 없었다. 하지만 이게 어디 시댁뿐이랴. 친정에서도, 어린이집 엄마들 사이에서도, 친구들 모임에서도, 심지어 전철 안 옆에 앉은 할머니에게서도 비교당하고 재단당하는 게 육아다.
갸우뚱한 표정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속에 숨겨진 수많은 말풍선의 내용들을 상상한다. 하지만 이런 것에 흔들릴 내가 아니지. 미루야, 난 그냥 내 ‘쪼’대로 밀고 갈 거야! 그러니 너도 엄마를 도와다오! 같이 파이팅!
한국 나이로 7살이 되고 자기 방이 따로 있는 요즘, 얼마 전부터 따로 자기 시작한 미루는 이 상황을 그리 즐기지 않는다. 엄마 아빠랑 같이 자고 싶다며 버티지만 결국 아빠 손에 이끌려 방으로 들어간다. 희한하게 우리와 같이 잘 땐 통잠을 자더니 혼자 잘 땐 밤중에 꼭 한 번씩 깨고 호시탐탐 우리 침대로 들어올 기회를 노린다. 그러면 난 기꺼이 이불을 연다. ‘엄마 여기 있어’하면서. 다리를 내 몸에 턱 올리며 온몸으로 안기는 요 녀석이, 곰돌이처럼 내 품에 쏙 들어오는 요 녀석의 느낌이 너무 좋다.
언젠간 자기 방 문을 잠그고 출입 금지를 외칠 이 녀석. 결코 지금의 이 행복을 버릴 용의가 없다. 혼자서도 잘 자게 될 그때를 기다리련다. 내 욕심에 억지로 끼고 자려고만 안 하면 되겠지.
참고로 처음부터 따로 재워서 수면 교육 효과를 본 가족도 봤고 (대표적으로 아이 셋인 카밀의 둘째 동생 가족.) 시간 되면 알아서 혼자 자니 아주 편하다고 한 가족도 봤다. 그러니 이건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거다. 결코 일반화하면 안 된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난 미루에게 ‘아무리 울어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라는 포기를 아기 때부터 가르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살 길이 얼마나 먼 데…
미루야, 엄만 네가 울면 무조건 달려갈 거야! 무조건 무조건이야아아~~! 짜짜라짜라짜라 짠짠짠!
All photos by Yellow D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