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딸의 남자
미루 어린이집에서 결혼식 놀이를 한다며 예쁜 드레스를 입혀 보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결혼식 놀이라니, 요즘엔 이런 것도 하는구나. 너무 길어서 못 입고 가게 했던 엘사 드레스를 특별히 허락하니, 미루는 기쁨에 겨워 깡충깡충 뛰었다. 엄마, 사랑해! 입이 귀에까지 걸린 채 격렬히 나를 껴안은 미루.
며칠 후 사진이 도착했다. 사진 속의 미루는 엘사 드레스를 입고 머리에 화관을 쓰고 부케를 든 채 턱시도를 입은 어린이집 남자 동무의 팔짱을 끼고 새초롬하게 웃고 있었다. 진짜 결혼하는 신부처럼.
어, 이 진지한 분위기는 뭐지?
형용할 수 없는 묘한 기분과 함께 피식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짜식, 제법 신부 티가 나네. 6살밖에 안 된 녀석이…
문득 미루의 첫 남자 친구가 생각난다. 바로 마마카라바나를 같이 했던 레오다. 여행 중반부터 같이 밴을 타고 다녀서 땔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된 미루와 레오는 마마카라바나 공식 커플이었다. 생후 28개월 만에 미루에게 첫 남자 친구가 생긴 것이다. 미루보다 7개월 어린 레오는 눈웃음이 아주 예쁜 귀엽고 스윗한 아이였다.
하지만 말이다, 여기서 고백 하나 해야겠다. 그것은 바로…
난 레오가 미루의 첫 남자 친구가 되는 게 정말 싫었다!
결국 이렇게 털어놓는군.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이 사실을 알레나는 모르는데... 아마 알면 기절초풍하겠지?
레오는 결코 쉬운 아이가 아니었다. 알레나가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갈 정도로 지독하게 분리불안이 심한 엄마 껌딱지였고 시도 때도 없이 젖을 물어야 심리적 안정을 찾는 아이였다. 식사 시간에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이 없었고 떼를 오래 부렸으며 결정적으로 살짝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알레나는 레오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다. 훈육에 반대하는 알레나는 항상 부드럽게 타일렀는데, 한 번은 미루에게 큰 상처를 내서 그녀 답지 않게 혼을 냈지만 그런 엄마 모습이 재미있었는지 아무리 강하게 혼을 내도 목젖을 보이며 깔깔깔 웃었다. 조금 섬찟하기까지 했다. 한 마디로 레오는 모든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고집불통 힘든 아이였다.
그런 레오 때문에 힘들어하는 알레나를 보며 측은지심을 가지고 레오에게 정을 주려고 노력했지만 솔직히 자기 자식 때리는 아이에게 정을 줄 수 있었겠는가! 또 레오를 hyperactive child, 즉 ‘과잉행동장애의 아이’란 카테고리 안에 넣고 모든 걸 정당화하려는 알레나의 태도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진단을 받은 것도 아닌데, 갓난아기 때부터 지나치게 활동적이어서 자기 능력 밖의 일이라며 레오의 모든 행동을 덮으려고 했다. 내 눈엔 활동하기 좋아하는 여느 남자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는데 말이다.
이해가 안 됐지만 어쩌겠는가. 내가 알레나가 아니고 그녀의 진짜 속 사정은 모르는 것을. 결코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게 ‘남의 육아’다. 그리고 미루가 좋아하는데 일부러 떼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미루가 레오의 행동까지 따라 한다는 것! 아이들은 서로 모방하며 크는 법, 밥 먹을 때 같이 돌아다니고, 같이 카시트에서 울고, 같이 배변 훈련을 거부하는 등 전에 하지 않았던 행동까지 레오를 따라 할 땐 정말로 난감했다. 이럴 때 난 어찌해야 하나? 그렇다고 ‘우리 엄마가 너랑 놀지 말래.’ 할 수도 없는 일이고 말이다. 그렇게 맞고 뜯기면서도 레오를 좋아하고 보호하는 미루가 신기하기까지 했다. 뽀뽀하고 끌어안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알레나는 그런 둘의 모습을 보며 커플 탄생을 좋아했지만 난 글쎄… 어색한 웃음과 함께 팔짱을 끼고 속으로 말했다.
나 이 관계 반댈세!
다시 어린이집에서 온 사진을 본다. 비록 재미 삼아 한 놀이라지만, 마치 손때 묻은 옛 흑백 사진 속 신부처럼 제법 진지한 포즈를 한 미루의 모습을 보자니 이미 난 불쑥 커버린 미루가 웬 산적 같은 놈 하나를 데려와 결혼하겠다며 선포를 하는 상황에 봉착해 있다. 보아하니 이미 사랑에 눈이 멀었고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말이냐 방귀냐 귀에 들어갈 것 같지가 않다. 그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지.
순간 내 마음속 나비 한 마리가 꿈틀대더니 내 몸을 뚫고 하늘로 날아간다. 그 나비 옆에 다른 나비 한 마리가 붙어 동행한다. 멀리멀리 태양빛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져 간다. 미루야, 너 그렇게 가는 거니? 눈만 꿈뻑꿈뻑하다가 상상에서 깨어난다. 허허… 이 사진 참 요망한 사진일세.
앞으로 미루는 어떤 남자를 대령할까? 운동장 인양 레스토랑을 종횡무진 뛰어다니던 미루의 첫 남자 친구 레오와 그 뒤를 쫓아가던 미루가 생각난다. 훈육하느라 바빴던 나에 비해 그냥 빨리 먹고 나가자던 첫 예비 사돈 알레나가 생각난다. (그 후 난 알레나와 약간 거리를 두었더랬지.) 꿀밤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레오를 좋아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는데, 과연 난 미래의 남자 친구 혹은 사위에게 얼마나 쿨할 수 있을까? 만약 다시 레오가 미루의 남자가 된다면? 레오가 달라졌다고 해도 ‘이 관계 찬성일세!’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전적으로 미루의 자유의지에 맡기겠다며 쿨한 엄마인척 하지만 흔히 보는 드라마 속 막장 부모들이 먼 우주의 얘기는 아니구나란 생각이 든다. 내 자식도 완벽하지 않을진대, 이런 내 가식이 참 싫네.
궁금하다. 내가 카밀을 데리고 왔을 때 친정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아이고 내 사위!’라는 웃음 뒤엔 ‘이 결혼 무효일세!’하고 반전 시위하듯 피켓 든 엄마가 서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엄마 가슴을 뚫고 날아갔듯이 미루도 날아가겠지. 그때 기쁜 마음으로 손을 흔들 수 있기를. 세상은 돌고 돈다.
All photos by Yellow Du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