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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Mar 25. 2019

카밀과 미루의 신나는 네덜란드 자전거 여행

아빠와 딸

아빠와 딸


# 카밀이 소원을 이루다.


작년 여름, 카밀은 미루를 데리고 두 달 반 동안 유럽을 다녀왔다. 항상 원했던 ‘아빠와 딸’ 장기 여행을 실행하고 나에게 내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주기 위해서였다. 솔직히 한국에서 1년 반을 버텨준 게 용하다 싶었다. 떠나고 싶어 닥달하는 온몸의 세포를 어찌 달랬을까.


오랜만에 네덜란드 시댁에서 시부모님과 시간을 보낸 후 카밀은 평소의 소원을 바로 실행에 옮겼다. 미루를 자전거 뒤 유아 시트에 태우고 20일 동안 네덜란드 전국 일주를 한 것이다. 네덜란드는 면적이 작고 땅이 평평해서 (전체 면적 41.543 제곱미터로 전라도와 경상도를 합친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자전거로도 비교적 쉽게 전국 일주를 할 수 있다. 네덜란드 중남부 쪽 시댁에서 출발한 카밀은 시계 반대 방향으로 크게 나라를 돌며 친구들 집을 방문하고 SNS 상으로만 교류하던 사람들을 실제로 만났다. 그러면서 큰 도시, 작은 도시, 시골 마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자연까지 뒤에서 부르는 미루의 콧노래를 배경 삼아 열심히 페달을 밟으며 미처 자신이 알지 못했던 고향의 여러 모습을 즐겼다. 짐도 많지 않았다. 자전거 앞 바구니에 넣은 간이 텐트와 유아 시트 뒤에 달린 도시락 가방, 그리고 카밀이 맨 작은 배낭에 넣은 옷가지 몇 개가 다였다. 냄새가 심하지 않다면 아이가 며칠 동안 같은 옷을 입어도 상관없었고 비가 오면 큰 비닐을 뒤집어쓰고 달렸다. 숙소는 캠핑장과 친구 집, 카우치서퍼의 집에서 해결했다.   


화상 통화의 그들.


# 아이는 순간을 산다.


카밀은 미루와의 여행 일기를 매일 페이스북에 기록했다. 네덜란드어로 써서 번역기를 돌려야 했지만, 여행에서 벌어진 일들을 평소 자신의 철학과 적절히 버무려 표현한 그의 언어는 번역기의 필터를 관통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빠의 눈으로 관찰한 미루의 행동을 읽는 재미가 쏠쏠해서 매일 밤 그의 업데이트를 기다렸다. 일기에 표현된 미루는 호기심이 많았고 사람 가릴 것 없이 친해지는 놀라운 사교성을 보여주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잠자리가 불편하면 불편한 대로, 지루하면 지루한 대로 상황을 늠름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였고 만 5살 아이가 세상을 보며 할 수 있는 질문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그런 미루를 만나는 사람마다 사랑해줬다. 그중 몇 명은 나에게 따로 미루와 아주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며 ‘정말 예쁘고 사랑스러운 딸을 둔 것을 축하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뿌듯함도 뿌듯함이었지만 무엇보다 미루가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는 생각에 뭉클해졌다. (지금 이거 자랑인가? 자랑이다. 아! 이런 두더지 엄마 같으니라고.)


가끔 하는 화상 통화에서 난 이 아이가 진심 순간을 산다는 걸 느꼈다. 모든 아이가 똑같지는 않겠지만 최소 미루를 통해 본 아이는 본질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순간이 마치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 산다. 앞뒤 잴 것도 없이 그 순간에 충실하고 최대치를 즐긴다.

떠난 후 며칠 만에 처음으로 하는 화상 통화에서 미루는 날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 엄마! 그런데 미루 지금 꽃에 물 줘야 하는데... 그럼 어디 가지 말고 있어! 물 주고 금방 올게!


그리고는 스크린에서 사라져 버렸다. 살짝 서운한 건 어쩔 수 없었으나 꽃에 물을 주는 순간의 재미에 충실한 미루를 보고 웃음이 났다. 자기가 곧 갈 테니 그 자리에서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듯이 활짝 웃으며 ‘엄마! 진짜 보고 싶어!’하고 소리치는 미루가 징징 짜는 미루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미루는 천상 여행 체질인가 보다. 유전자인가, 아님 자란 환경의 산물인가?    


부산에서.


# 효도 여행 가고 싶은데.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와의 여행은 어렸을 때뿐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방학마다 부산이나 강원도로 가족여행을 갔던 기억. 낚시를 좋아하셨던 아버지는 주문진 등지에서 낚시를 하셨고, 남동생과 난 해변에서 놀고, 미술을 전공하신 어머니는 그 옆에서 유화를 그리셨다. 그나마 그것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자 시들해졌다. 부모님은 점점 더 바빠지셨고 동생과 난 머리가 커져 친구들과 보내는 시간이 우선이었다. 방학 때마다 갔던 가족여행은 아버지의 바쁜 스케줄에 밀려 슬슬 귀찮은 연례행사가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갔던 가족여행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 후로 아버지와 여행은커녕 같이 뭔가를 했던 기억은 없다. 사실 아버지 당신도 자식과 딱히 뭘 해야 할지 모르셨던 전형적인 한국의 '옛날' 아버지셨다. 1937년생, 구한말 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우며 자란, 자식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제대로 표현할 줄 모르는 소위 ‘옛날 분’인 아버지. (자꾸 영화 '국제 시장'이 생각나는 건 왜일까?)


아들이었던 내 동생과의 관계는 다를 수 있겠지만, 내가 경험하지 못 한 ‘아버지와 딸’의 시간을 미루가 딸바보인 카밀과 가지고 있다는 게 질투가 났다. 더불어 먼저 아버지께 손을 내밀지 못한 내 무뚝뚝함을 후회했다. 지금이라도 모시고 효도여행을 가고 싶건만, 부산조차 움직이는 게 싫으시다며 영 시큰둥해하시니, 하아... 이젠 너무 늦은 걸까? 미루는 최소한 나중에 이런 후회는 없겠구나.


아빠는 슈퍼맨


# 슈퍼맨이 돌아왔다.


요즘은 아빠 육아가 대세다. 아빠가 잘 놀아줘야 아이가 똑똑해진다는 책까지 나왔다. 내 주변에도 아이들과 잘 놀아주고 시간을 더 많이 보내는 아빠가 많아졌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본다. 육아의 남녀평등을 넘어 엄마와 아빠와 동등하게 시간을 보낼 때 아이의 사고와 감성의 스펙트럼은 더 넓어진다고 생각한다. 엄마 아빠가 충족시켜줄 수 있는 그 범위가 다를 테니 말이다.

자신의 감정과 의견을 제대로 표현할 수 있는 5살 이후의 여행은 아기 때 그저 부모를 따라다니던 여행과는 또 다른 의미를 가진다. 주도적으로 여행의 방향을 선택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미루와 하는 여행은 예전보다 훨씬 재미있다. 재작년 가을에 갔던 태국 여행과 작년 초여름에 갔던 제주도 여행은 지금까지 다닌 그 어떤 여행보다 감정 공유의 범위가 넓었다.


20일간의 네덜란드 여행 후 그들은 짧게 영국을 다녀왔다. 카밀의 또 다른 소원이었던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드 지방에 가기 위해서였다. 하이킹까지는 할 수 없었지만 앞으로 할 게 하나 더 늘었다며 좋아했다. 영국에서는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사진 속 미루는 비틀즈 동상 옆에서 포즈를 취하며 영국을 즐기고 있었다. 미루는 후에 어떻게 이 아빠와의 여행을 기억할지 곱씹어서 물어봐야겠다.


부쩍 큰 모습으로 인천공항에서 만난 미루가 내게 한 첫마디는 이거였다.


엄마, 왜 이렇게 작아?


키가 150cm도 채 안 되는 나를 보고 하는 말. 그래... 네가 거인국 네덜란드에서 날아왔지... 그렇게 말할 만도 하다. 허허허~~


아빠, 어디 가?


 Photos by Yellow Duck and annonymous couchsurf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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