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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ellow Duck Mar 31. 2019

새해 풍경

그 무슨 일이 생겼건, 가족이란


# 새해 이브

 

2016년 마지막 밤, 몇 년 만에 온 가족이 모였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처음 맞는 가족 행사다. 부모님, 남동생 가족, 그리고 우리 가족. 어른 여섯에 아이 셋. 새해 이브에 가족이 모두 모인 건 실로 오랜만인데 언제는 안 그랬냐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하룻밤이 진행되는 게 신기하면서도 당연한 건가 싶기도 하다. 사연 없는 가족은 없다고, 마음 한구석 쌓인 감정을 가족이라는 이름 아래 애써 눌러야 하는 부조리를 토닥이며, 


그래도 이 정도면 우리 가족은 참 준수한 거야.


라고 중얼거린다. 


종일 사촌 오빠 보고 싶다고 보챈 미루는 오빠가 오자 흥분이 극에 달한다. 7살 오빠를 졸졸 쫓아다니고 오빠는 그런 미루를 부담스러워한다. 7살, 5살, 3살 아이들이 안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부엌으로 줄을 지어 뛰어다닌다. 우와, 아이 셋이 뛰니 정말 혼이 쏙 빠지는구나! 마마카라바나도 했던 난데, 이건 완전 차원이 다르다. 새삼 다자녀 엄마들이 존경스럽다. 결국 아랫집에서 두 번이나 연락이 온다. 한 번은 경비실을 통해, 한 번은 직접 인터폰으로. 아랫집 남자는 '쿵쿵거리거든요!'라고 짜증스럽게 말한다. 조금 당황스럽다. 어르신 두 양반이 몇 년을 조용히 살았는데, 그간의 조용함은 잊고 하루 정도 가족이 모여 정신없는 걸 못 참아주다니. 새해 이브인데 꼭 이래야 할까? 내가 안 당해봐서 그런가? 층간 소음의 긴장을 직접 경험해보니 그제야 내가 한국에 왔구나 실감이 된다. 다른 어느 것도 아닌 층간 소음에서. 발끝으로 통통 뛰는 미루에게 그러지 말라고 주의를 준다. 아, 이게 한국 살이구나. 


저녁을 뭐 먹을까 고민하다가 편안함에 잠식된 우린 결국 배달 음식으로 해결하기로 한다. 어머니, 나, 올케, 세 여자 모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게 피곤하다. 배달 책자를 넘기며 뭘 먹을까 고민하는 것도 꽤 재미있다. 어머, 이런 것도 배달이 돼? 역시 해운대 해수욕장 한복판에서 자장면을 시키는 배달의 민족답군. 배고프다 성화하는 아이들 때문에 후다닥 냉면과 치킨, 순대볶음으로 결론을 낸다. 세 음식의 부조화가 나중에 위장에서 어떤 난리를 칠지는 지금 알 바가 아니다. 난 다 먹어버릴 거니까. 식탁에 앉아 이러저러 얘기가 오가는 사이 음식이 도착한다. 진짜 몇 년 만에 받아보는 배달 음식인가! 유럽에선 피자 외엔 상상도 못 하는 것을! 새삼 작은 것에 감사하는 날 발견한다. 새해 이브인데 밤늦게까지 배달 일을 하는 분을 보자니 괜히 미안해진다. 음료수를 사양하는 아저씨께 한 마디 덧붙인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배달 음식을 먹으며 티브이를 본다. 어렸을 땐 연말마다 각 방송국에서 하는 시상식을 보는 게 관례였다. 10대 가수 가요제나 방송 3사 연기 대상을 보며 새해 맞는 걸 당연하게 생각했고 올해의 대상! 하며 드럼 소리가 울릴 때 과연 누가 될까 긴장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지금은 당최 봐줄 수가 없다. 시상식이 원래 이렇게 어색했던가? 사회자며 시상자며 그 예의 바르고 상투적인, 어색한 침묵을 유혹하는 멘트라니! 그래도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끝까지 본다. 유느님의 대상 수상은 지극히 옳다. 그렇게 새해 이브가 간다. 냉면과, 치킨과, 순대볶음과, 긴장된 연기 대상 발표와, 오랜만에 늦게 자는 게 허락된 아이들의 흥분된 조잘거림과, 소파에 앉아 별말씀 없으신 아버지와, 휴대폰 기능을 물어보시는 어머니와, 그걸 받아주며 천천히 설명하는 동생과, 과일 깎으며 아이 교육 문제로 수다 떠는 올케와 나와, 새해에 먹는 네덜란드 전통 디저트를 만들어 보겠다며 부엌에서 밀가루 샤워를 하는 카밀 사이로, 한 해의 마지막 밤은 그렇게 새해에게 바통을 넘기려고 헐떡거리며 뛰어간다. 그리고 땡 하고 밤 12시. 티브이에선 예전과 꼭 같은 레퍼토리인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 노래가 나온다. 우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소리 지르며 서로를 안느라 바쁘다. 


카밀이 만든 네덜란드 디저트 올리 볼른

# 2017년 새해 아침


그리고 아침, 아주 게으른 새해 첫날이다. 동생 가족은 이미 밤에 돌아갔고, 부모님, 카밀, 미루 모두 늦게까지 이불 밖으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난 슬쩍 안방 문을 열고 엄마 이불속으로 들어가 아주 오랜만에 엄마를 껴안고 누워 시답잖은 티브이를 보며 역시나 시답잖은 주변 사람 뒷담화를 한다. 누군 어떻게 살아요? 어머, 그래요? 잘 됐네. 아 갸! 갸는 우에 살아요? 아… 갸가 말이다… 글쎄 그렇게 됐다 하대. 어머나, 어쩌다 그렇게 됐대요? 하는 순간, 니들 뭐 하노? 하시며 슬쩍 아버지가 들어오신다. 그 작은 1인용 요에 어른 셋이 구겨져 눕는다. 엄마와 난 멈췄던 뒷담화를 계속하고 아버지는 멀뚱히 티브이를 보신다. 그냥 서로 등 벅벅 긁어주는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모습이다. 맞다. 이 정도면 우리 가족은 참 준수하다. 가끔 난 이 축복이자 구속인 가족이 너무 좋아 어쩔 줄을 모르겠다. 


소파에 앉아 책을 읽는다. 모국어로 된 책을 읽는다는 건 정말 즐겁구나. 읽고 싶은 책이 많은데 도서관에서 검색할 때마다 ‘대출 중’이다. 새해 다짐에 항상 오르는 항목이 독서지만 워낙 오랫동안 한국어 책 읽기에 굶주렸는지라 자신 있게 독서를 New Year’s Resolution에 올린다. 별일 없이 하루가 간다. 어느새 엄마랑 식사 고민을 하고 있다. 삼시 세끼 고민은 해를 넘겨도 계속되는구나. 어제 남은 거 대충 먹고 미루에겐 조기 한 마리 구워줘야지. 그 비싼 조기를 말이다. 그리고 같이 목욕하려고 목욕물을 받아야지. 미루 씻긴 다음 엄마한테 내 등도 좀 밀어달라고 해야지. 


마치 한 번도 떠나지 않았던 것처럼 천연덕스럽게 한국 생활을 시작한다. 2017년 새해가 밝았다.


그리고 어느새 이것도 2년 전 이야기가 됐다. 천연덕스럽게 시작했던 한국 생활은 과연 지금 어떤 모양새인가? 2019년 새해 풍경은 그때와 어떻게 달랐나? 내 가족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안녕한가? 


Photos by Yellow Duck & Joon 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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