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18 - 20190903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Tribute 2>


1.

이번 잡설 역시 잡생각이 아닌 생각이다. 사실 무슨 차이가 있나 싶지만 괜히 기분이 그렇다.



2.

요즘 미루는 매일 밤 자기 전에 '엄마! 내일은 엄청 좋은 날 보내자!'라고 한다. '오늘은 안 좋았어?'라고 물으면 '당연히 좋았쥐이~~ 그런데 내일은 더 좋을 거야!'라고 한다. 물론 그다음에 '음... 그러려면 먼저 엄마가 화를 안 내야 하고... 놀이터에 가야 하고... 아침에 어린이집 가는 준비를 내가 다 스스로 할 거니까 엄마가 먼저 이거 해라 저거 해라 말하면 안 되고...' 등등 조건이 붙긴 하지만. 매일을 좋게 살겠다는 의지에 불타는 미루를 보며, '이래서 어른보다 아이에게서 더 배우는 건가' 싶다. 이 아이는 정말 매일매일을 재밌게 살지 못해 안달이다.

크리스가 딱 이랬는데.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말 그대로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에 매일을 재밌게 보내려고 했는데. 공연 때문에 너무 바빠 좋아하는 티비 드라마도 못 보는 날이면 그렇게 투덜댈 수 없었는데. 이건 결코 재밌게 사는 게 아니라며.



3.

삶은 계속된다. 크리스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다음 날, 난 BTS 댄스 수업을 들으러 갔고 그다음 날은 해금 수업을 들으러 갔다. 며칠 동안 눈이 퉁퉁 붓도록 울 줄 알았는데, 난 금세 놀이터에서 노는 미루 모습을 보며 웃고 남편의 따스한 포옹에 미소를 짓고 맛집 많은 망원동에서 맛난 음식을 사 먹으며 즐거워한다. 하고 싶은 일들과 해야만 하는 일들에 쫓고 쫓기며 바쁜 하루를 마친다. 삶은 이렇게 계속되고, 또 그래야 한다. 크리스가 죽은 지 일주일이 지난 지금, 겉으로 보이는 내 삶엔 변화가 없다. 하지만 확실히 뭔가가 변했다. 무엇인지 딱 꼬집어 말하진 못하겠지만 분명 뭔가가 변했다.



4.

하지만,

이렇게 그냥 살다가도 문득,

멀쩡히 잘 있다가,

예고도 없이 갑자기,

어떤 감정이 쓰나미처럼 북받쳐 온다.

욱한다.

그리곤 운다.

뭐야, 인생이 뭐 이래? 왜 이리 불공평해? 젠장, 난 앞으로 계속 이런 불공평한 인생을 살아야 하잖아.

순간 억울하다. 크리스의 삶이 짠하다가 내 삶마저 짠해진다. 노마드일 수밖에 없는 까서방의 삶이 짠하고, 앞으로 나보다 두 배는 오래 살 미루의 삶이 짠하고, 결국 이 세상 모든 이의 삶이 짠해진다.

계속 짠하다 보니 배가 고파진다. 갑자기 곱창이 무지 땡긴다. 참다 참다 결국 잠깐 나갔다 오겠다고 하고 혼자 나와 단골 곱창 가게에서 만 원짜리 야채곱창을 하나 산다. '젓가락은 하나면 돼요.' 했더니 아주머니께서 '혼자 드실 건가 봐요?' 하고 묻는다. 집에서 먹기엔 눈치가 보여서 검은 비닐 봉다리에 넣은 곱창을 달랑달랑 들고 한강으로 간다. 마침 저녁 6시 40분. 전경 좋은 계단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저무는 붉은 햇살을 받아 성산대교가 멋진 실루엣을 드러낸다. 바람은 선선하고, 구름과 빛은 완벽하다. 그걸 보며 입으로 곱창을 마구 집어넣는다. 붉디붉은 노을을 보니 슬퍼서 눈물이 난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마치 크리스가 '옜다, 이왕 먹는 거 눈 호강하며 먹어라' 하며 완벽한 노을을 보내주는 것 같다. 내 입에서 못할 말이 튀어나온다. 젠장, 크리스 이 새끼... 왜 죽고 지랄이야... 마지막으로 본 크리스의 모습은 2010년 뉴욕에서다. 그때 그의 목소리로 들은 마지막 말은 '글쎄, 내가 과연 다시 널 만날 때까지 살아 있을까?' 였다. 슬퍼도 배는 고프고, 울면서도 곱창은 너무 맛있고, 목이 매이지만 목구멍을 타고 꼴딱꼴딱 잘만 넘어간다. 주변 사람이 쳐다보는 쪽팔림에도 불구하고 엉엉 울면서, 코 팽팽 풀면서 곱창을 먹는다. 눈물 젖은 빵이 아닌 눈물 젖은 곱창이다. 앞으로 몇 번이나 이렇게 울면서 곱창을 먹게 될까? 간 사람은 모르겠지만, 남은 사람은 이렇게 살아간다.



5.

생각해 보니, 내 인생의 한 부분을 크게 차지했던 친구의 죽음은 처음인 듯하다. 물론 죽음은 항상 곁에 있었다.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상갓집에 갔었고, 한두 번 만났거나 건너 건너 아는 애매한 관계의 지인이 죽었을 땐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메세지를 보내거나 조의금을 보냈다. 대학원 동기인 그리스 출신 디미트라는 십몇 년 전 젊은 나이에 피부암으로 죽었고, 내 미국 취업 비자 취득을 위해 여러모로 도와줬던 데이빗 마틴은 5년 전 희귀병으로 죽었다. 여러 번 같이 공연 작업을 했던 조명 디자이너는 교통사고로 죽었고 공연의 주인공이었던 젊은 배우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근 20년간 한국에서 살았지만 갑자기 네팔로 추방된 네팔 친구 미누도 고향인 포카라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했고, 나 초등학교 저학년 때 우리 집에 들어오셔서 평생 같이 살았던 보모 할머니께서는 미루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미처 미루 얼굴도 못 보시고 돌아가셨다. 죽음은 언제나 내 삶에 있었지만 크리스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은 꽤 남다르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남달라서일까? 젠장, 죽어서야 편히 숨 쉴 수 있는 삶이라니!


이제 점점 늘어나겠지. 내가 오래 살면 살수록 먼저 보내줘야 하는 친구도 늘어갈 거고, 상갓집에 가서야 오랜만에 만나게 되는 얼굴들도 늘어가겠지. 다들 이런 순환을 겪으며 살아왔겠지. 나이가 들어도 처음 겪는 것들 투성이고 배워야 하는 것들 투성이다. 이렇게 난 주변에 의해 커간다.



6.

사람들은 각자 어떤 방법으로 상실감을 극복할까? 현재 내 방법은 한강에서 숨이 턱에 찰 때까지 마구 달리는 거다.



7.

신기하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너무 빨리 가지만 인생은 너무 길다.



오늘은 여기까지.

너무 길어질라.

오늘은 갑자기 초밥이 땡겨서 접시 하나에 1100원 하는 회전 초밥집에서 딱 9 접시를 점심으로 먹었다.

9900원. 충분히 배가 부르다.

이걸로 오늘 하루가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면.

미루 말대로 어제도 좋았지만 오늘이 더 좋은 날이 될 수 있다면.


KakaoTalk_Photo_2019-09-03-12-55-22.jpeg


#요즘하늘장난아니던데

#친구여그대가보내주는겐가

#고맙구려

#곱창이라니

#참을수없는존재의가벼움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오늘의 잡설 #17 - 201908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