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설 #30 - 20191113

오늘 하루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by Yellow Duck

<2프로 모자르게 잘난 사람의 비극>


1.

이렇게 말하면 누구는 재수 없고 잘난 척한다고 하겠지.

하지만 이건 꽤 오랫동안 내 열등감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로 뭐 하나 아주 특출나게 뛰어난 게 없는 거.

항상 2프로 살짝 부족한 거.

난 놈이면 확실하게 난 놈일 것이지, 여기 찔끔 저기 찔끔,

분명 이것저것 재주는 많은 것 같은데, 빵 터지는 게 없는 거.

아이고, 갑자기 귀가 막 간지럽네. 돌 날아오는 소리가 들리네.

하지만 생각해보라구.

전에도 썼다만, 우선 현재 내 정체성이 뭐냐 이거야.

- 연극을 했지만 연극하는 사람도 아니요,

- 미루와 함께 무대에도 섰지만 아동극 전문가도 아니요,

- 그림을 그리고 가르쳤지만 그림을 업으로 삼은 사람도 아니요,

- 여행을 했지만 여행으로 밥 벌어먹고 사는 전문 여행가도 아니요,

- 봉사 활동을 했고 기부를 하지만 NGO에서 일하는 사회활동가도 아니요,

- 책을 출간했지만, 베스트셀러를 낸 작가도 아니요,

- 사진 전시회를 열었지만, 사진작가도 아니요,

- 영어를 가르쳤지만, 전문 영어 강사도 아니다.

이게 뭐냐고!!

만드는 거, 그리는 거, 쓰는 거, 찍는 거, 가르치는 거,

모두 딱히 못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대박 잘하는 것도 아니잖아!

바로 2프로 모자르게 잘난 사람의 비극.

분명 이 중에서 뭔가 한 건 터지고 돈을 긁어모을 게 있을 것 같은데,

아따 마... 징하게도 안 터지네... 우쨘댜...

이게 나에겐 열등감이었다.



2.

거의 충동적으로 끊은 비행기 티켓이었다.

까서방과 어떤 의견 차이로 (이젠 뭐였는지 기억도 안 난다) 툭탁거리다가 거의 협박조로,

- 그럼 나 그냥 확 티켓 사버린다! 내가 막 정한다! 나중에 딴 말 하지 마!

- 그래! 해봐! 해봐! 내가 눈 하나 꿈쩍하나 봐라!

- 에잇! 진짜 한다! 한다구! 클릭!

그렇게 끊어버린 티켓이었다.

클릭을 하고 나니 허무함이 밀려왔다.

그동안의 긴 고민이 이렇게 다툼 끝에 온 한순간의 충동으로 결정되다니.

도대체 난 뭘 고민한 걸까.

허무함도 잠시, 조급함이 밀려왔다.

아, 내가 진짜 비행기 티켓을 끊긴 끊었구나. 가긴 가는구나.

그렇다면...

그렇다면 말이지...

이거 어쩌나. 가기 전에 해야 할 일/하고 싶은 일들이 너무 많다!!



3.

왜 진작에 하지 않았단 말인가.

내 그림으로 전시회도 하고 싶고,

내년 달력도 만들고 싶고,

달리기 시작한 거 마라톤도 뛰고 싶고,

미루와 합작한 동화 '까끌까끌 수염 아빠'도 번역해서 내놓고 싶고,

한국 돌아온 후 얼굴 한 번 제대로 못 분 분들 만나고 싶고,

지금 배우는 해금과 방탄 춤도 훨씬 더 잘하고 싶고,

무엇보다 부모님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데,

오호통재라!

전시회를 하고 달력을 만들기엔 그동안 그려놓은 그림 수가 너무 적고,

마라톤을 뛰기엔 안 달린 지가 벌써 한 달이고,

동화 번역해서 내놓기엔 이미 있는 원고도 출판사를 못 찾았고,

한 분 한 분 얼굴 보기엔 다들 너무나 바쁘게 살고,

해금과 춤은 당장에 확 늘 수 있는 게 아니며,

부모님과의 시간은 보내고 보내도 모자란다.

아아~ 이거 어쩌나, 시간이 너무 없다!!

짧은 시간 내에 이 모든 걸 해낼 능력이 내겐 없다!!



4.

왜 진작에 하지 않았나, 자책이 시작됐다.

난 왜 이리 게으른가, 난 왜 이리 항상 충동적이며 헐렁헐렁한가.

젠장, 난 왜 이리 항상 2프로 모자란가??!!

가기 전에 이루고 싶은 수많은 일들은 오히려 내게 현타를 줬다.

멍해졌고, 그러자 아무 생각이 안 났고, 그러자 지난 5월에 왔던 무기력/우울이 또 몰려왔다.

아놔, 한 번 알게 된 이 우울이란 녀석은 이제 지가 오고 싶을 때 오는구나.

이 녀석 왜 이리 제멋대로야? 짜증나게.

그렇게 또다시 무기력에 치를 떨던 10월의 어느 날.

뜬금없이 김상중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런데 말입니다. 당신은 도대체 누구에게 뭘 증명하려고 이리 조급한 겁니까?

예?

...... 그러게요

...... 왜 그런 걸까요?

아마......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3년의 한국 생활을 어떤 식으로든 잘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죠?

다시 떠나는 발걸음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고 싶었나 보죠?

폼 좀 잡고 싶었나 보죠? 나 이러고 떠난다고.

....... 그래요.... 그랬나 봐요...

피식 웃음이 났다.

칫, 웃겨... 폼 잡을 게 뭐가 있다고.

내가 물욕은 없어도 명예욕은 있구나.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내 욕망이 창피하기도 했고,

'그래도 아직 쏴라 있네~!' 싶기도 했다.



5.

7월 말부터 방탄 춤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벌써 4개월째다.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4개월 정도 추니 이젠 얼추 따라간다.

동작의 스웩을 따지기 전에, 박자 안 놓치고 안무 따라가는 게 어디냐.

게다가 방탄 춤이 좀 빠르고 빡세?

처음엔 다들 추는데 나만 혼자 박자 놓쳐서 멍하니 서있었다니까!

그런데 못해도 너무 재밌다.

한 번은 윤기가 되고, 한 번은 석진이가 되어 추는 춤이 너무 신난다.

빨리 잘 추고 싶다고 조급해하지도 않는다.

왜냐고? 백날 해봐야 방탄처럼 되지 못할 거라는 걸 아니까.

그러니 그냥 즐기기만 해도 괜찮은 거다.

이렇게 계속 추다 보면 언젠가는 진짜 그럴듯하게 추겠지 하면서.

딱히 어떤 기대 없이, 어떤 목적 없이 지속적으로 하는 일의 즐거움이란.

매주 수요일 두 시간 확 땀 빼며 춤추는 이 시간이 너무 즐겁다.



6.

전시회 안 해도 괜찮다.

달력 안 만들어도 괜찮다.

책 출간 안 해도 괜찮다.

그냥 방탄 춤을 추는 것처럼, 이 모든 것도 이렇게 하기로 했다.

2프로 모자라니까 오히려 조급할 것 없이 즐기며 할 수 있겠다.

얼추 따라가는 방탄 춤처럼 언젠간 이 모든 것도 얼추 따라가겠지.

재주가 있는 게 어디야. 진짜 재수 없는 열등감이야.

딱히 어떤 기대 없이, 어떤 목적 없이 지속적으로 하는 일의 즐거움을

연극에서, 그림에서, 글쓰기에서, 사진에서, 영어 번역에서 찾아보련다.

난 놈은 난 놈의 팔자로 태어난 거다.

난 놈이 아닌 난, 난 놈 아닌 팔자로 잘 살아가련다.



7.

그냥 다 때려치고 아몰랑~ 아몰랑~ 아몰랑~인데,

그걸 굳이 이렇게 그럴싸한 변명으로 만들려고 한다.

하여간, 이노무 허세는... ㅜㅜ



오늘은 여기까지.

오래만에 글이 길다.

그런데 나 이렇게 솔직하게 써도 되는 거야?

갑자기 얼굴이 화끈!!


(아아~~ 살 좀 빼면 더 날렵해지려나.... 창피해도 올린다. 난 관종이니까.)



평소 페이스북에 단상처럼 올리던 글을 마음먹고 일기처럼 페북과 브런치 동시에 올립니다.

글쓰기에 집중하고자 하는 채찍질이기도 합니다.

페이스북에 올렸던 글이기에 독자가 그동안의 제 신상 몇 가지를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 하에 글이 전개됩니다.

(ex: 다문화 가족이며, 예전엔 대학로에서 무대 디자이너로 일했고, 오랫동안 여행을 했으며, 딸아이 미루는 한국 나이로 7살이며, 드로잉 수업을 진행하며, 얼마 전에 달리기를 시작했다는 것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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