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 여행하며 느낀 잡생각을 씁니다.
<필리핀 단상>
1.
필리핀에 대해선 아는 게 별로 없다. 트럼프쯤은 껌일 것 같은 강력한 통 배짱 통치자 두테르테(Duterte)가 있고, 치안이 안 좋아 얼마 전 유명한 한국 여행작가가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고, 몇 천 개의 섬이 있어 범죄자들이 숨기 쉽고, 영어가 국어 중 하나라서 저렴한 가격의 영어 캠프에 방학 동안 자녀를 보내는 강남 엄마가 많다는, 지극히 낮은 수준의 단편적 지식만 있다. 기본적인 필리핀어(따갈로그어)를 공부할 시간도 없이 와서 세부 공항에 와서야 ‘thank you’가 ‘살라맛(salamat)’이라는 걸 알았다. 어디든 그 나라 언어의 기본적인 문장 몇 개를 아는 것은 현지인과의 벽을 허무는데 가장 효과적인데, 영어 역시 이 곳의 국어라는 이유로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장기 여행의 첫 행선지에서 난 벌써부터 게으름을 피우고 있다.
2.
세상에나, 필리핀이 스페인의 식민지였구나. 그것도 400년 동안이나! 몰랐네, 몰랐어. 세부 시티에서 스페인 식의 건물과 거리 이름이 왜 이리 많은가 했더니 그래서였구나. 마카오에선 포르투갈에 있는 것 같고, 베트남 하노이의 한 구역에선 프랑스에 있는 것 같다더니, 여기도 마찬가지다. 그 옛날, 그들은 뭐가 그리 충분치 않아서 바다 건너 이 먼 곳까지 와서 그들의 깃발을 꽂았을까? 유럽 땅도 충분히 넓은데, 배멀미를 견뎌가며 올 가치가 있었을까? 제러드 다이아몬드는 ‘총, 균, 쇠’에서 ‘아마도 그건~ 날씨 탓인가봐요오오~~’로 단순화했는데, 결국 인간은 환경의 동물이구나.
그나저나 너무 덥다. 왜 이리 중간이 없나? 아주 춥거나 아주 덥거나. 세상이 이리 이분법 이어서야!
3.
세부 시티에선 스페인 영향의 건물 때문인지 몰라도 괜히 남미에 있는 것 같았다. 사람들도 남미인처럼 보였다. 생긴 게 왜 이리 비슷하지? 나만의 착각인가? 혹시 이들과 남미인과 어떤 연결 고리가 있나?
4.
미루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던 건 길고양이와 길강아지였다. 떠도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너무 많다. 한국에서도 길고양이는 자주 봤지만 (특히 망원동) 강아지는 대부분 주인 잃은 강아지였는데, 여긴 다 길강아지들이다. 광견병으로 인한 사망이 왜 많은지 자연스레 고개가 끄덕여진다. 눈으로도 아픈 게 확연히 보이거나 오토바이나 차에 치여 파르르 떨며 죽어가는 고양이와 강아지도 종종 본다. 미루는 그걸 보고 울음을 터뜨렸다. 동물 만지는 걸 좋아하는데, 여기서는 만지지 말라고 주의를 줬다. 필리핀에 고양이와 강아지를 위한 단체가 있는지 궁금하다. 여기선 개팔자가 상팔자가 아니다. 사실 제3 국가 대부분의 개팔자가 그럴 것이다.
5.
비닐봉지와 플라스틱 사용량이 장난 아니다. 우리나라도 일회용 용품이 문제인데 여기도 그렇다. 그나마 다행인 건 휴양지의 바에서는 다 종이 빨대를 쓴다. 현재 시키호르(Siquijor)란 섬에 있는데 어젠 즉흥적으로 숙소 스탭에게 큰 쓰레기 봉지를 빌려 바닷가에 버려진 쓰레기들을 주웠다. 플라스틱 물병 캡이 가장 많았고 스티로폼도 많았다. 숙소 주변의 바닷가만 주웠는데도 커다란 봉지 2개를 가득 채웠다. 쓰레기라면 질색하는 미루는 꽤 열심히 주웠고 내일도 또 하자고 했다. 나중에 지구가 멸망한다면 그건 진짜 쓰레기와 환경 문제 때문일 거다. 픽사의 ‘월-E’가 우리의 미래다. 그 와중에 얼마 전 열린 유엔 기후 협정에서 문제 확인만 했을 뿐 딱히 진전된 내용이 없다는 뉴스를 읽었다.
6.
여느 동남아 휴양지가 그렇듯 외국인 천지다. 특히 백인들이 많다. 남자들은 웃통을 벗고 자기 가슴 근육을 자랑하며 다닌다. 다이버들이 모이는 곳이니 좀 유난스러울까. 여자들은 ‘저럴 거면 차라리 벗고 다니지.’ 생각하게 만드는 비키니를 입고서 선탠을 한다. 저런 복장으로 교회나 사원에 들어가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웃긴 건 가지고 온 수영복 어깨끈이 첫날부터 끊어져서 수영복을 사야 했는데 하나 같이 ‘남사스런’ 비키니여서 결국 나도 그런 비키니를 사버렸다. 외국에 나와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비키니를 사서 입을 용기가 생기다니. 남의 눈치 보며 사는 한국인인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칫, 쭉쭉빵빵 아니면 어때. 그래도 카밀은 예쁘다고 해주는 걸! 비키니 입을 거야!
7.
동남아에 오면 난 항상 늙은 백인 남자 팔짱을 끼고 다니는 젊은 현지 여자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내가 외국인, 특히 백인 유럽 남자와 결혼한 입장인지라 최대한 편견의 눈을 가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데, 노골적으로 젊은 여자 찾는 배불뚝이 백인 노인과 그런 백인만 노리는 현지 여자들을 보면 그냥 팍 짜증이 난다. 세상은 요지경인 것을, 웬 오지랖인지.
오늘은 여기까지.
글이 길어지고 톤이 전반적으로 부정적이네. 이리 삐딱해서야 원! 긍정적이 되자고!
정말로 오랜만에 ‘휴양’이란 걸 하고 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아무것도 안 하고 늘어져 있다. 나도 이런 거 할 줄 아는구나. 새롭다.
오늘의 잡설 대신 여행의 잡설을 시작합니다. 그 전의 여행 이야기는 브런치 북 '공항에서 당신이 한 마지막 질문'과 매거진 '나는 지금 집으로 가고 있어'에서 더 보실 수 있습니다.